어릴 때 우리는 개를 키웠다. 개라야 지금처럼 ‘반려동물’운운하는 정도는 아니었고 속된 표현으로 ‘똥개’였다. 넓은 마당에 개 한 마리쯤 있는 것은 그 무렵의 가정에는 너무나 자연스런 풍경이었다. 자그마한 강아지 한 마리 사서 몇 달 잘 키워서 팔면 제법 몫 돈을 마련할 수 있는 때였으니까. 개를 키우면 먹다 남은 음식을 버리는 일도 없고, 집을 지키는 수문장 노릇도 해주고, 우리를 반갑게 맞아도 주니 돈을 번다는 것,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집에서 기른 닭도 잡아먹지 못하는 분이시다. 한번은 닭을 키워 오빠가 고등학교 들어간 기념으로 잡아먹겠다고 하셨다. 병아리를 얻어서 모이를 주며 마당 한 구석에서 열심히 길렀다. 다 키워놓고, 먹을 때가 되자 도저히 잡지 못 하겠다 시며 그 닭을 차라리 팔았다. 그리곤 닭 가게서 손질된 닭을 한 마리 사 오셔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 분이 개를 키워서 남에게 팔려갈 때는 언제나 마음 아파하시며 팔곤 하셨다. 개라는 것이 영특하여 주인이 드나들 때 얼마나 알은체를 하는지 정을 들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동물이다.
그때도 시장에서 작은 ‘바둑이’를 한 마리 사서 집에서 먹다 남은 음식을 주며 예쁘게 키웠다. 한두 달쯤 되었을까? 하루는 밤에 개가 짖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놀라 밖을 내다보니 귀여운 ‘바둑이’가 몸부림을 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린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무서워만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금방 알아차리셨다. “야가 쥐약 묵고 죽은 쥐를 줏어 묵었나보네”하시며 얼른 비눗물을 갈아 먹였다. 안 먹으려고 발버둥 하는 것을 어린 오빠와 내가 잡고 어머니는 입을 억지로 열어 들어부었다. 그 시절에 무슨 동물병원이 있은 것도 아니고, 마땅히 먹일만한 약이 있지도 않았다. 그저 비눗물이 최고의 약이었다. 그것을 마시고 쥐약 먹은 쥐를 다 토해내라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그리고 우리의 간절한 간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바둑이는 점점 힘을 잃어갔다. 몸이 자꾸 굳어가는 것이 무서웠다. 나는 늦은 시간까지 바라보다 졸음을 이기지 못해서 잠이 들었다. 어머니는 밤을 꼬박 세며 간호하셨다. 아침에 눈을 떠서 가장 먼저 바둑이를 찾았다. 내가 일어나면 언제나 문 앞에서 나를 반기던 바둑이가 보이지 않아 얼마나 허전했는지. 마당 한쪽켠에 덮개로 싸여진 바둑이의 몸은 시멘트처럼 딱딱해 보였다. 그 후 어머니는 다시 개를 사지 않으셨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감당하지 못하겠다 하시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개를 키워보지 않았다. 떠나보내는 것은 언제나, 누구나 힘든 일이다.
최근에 또 다른 가슴아픈 떠나보냄을 겪었다. 벼룩이 있는 것 같다. 온 몸이 물려서 여기저기 울긋불긋 야단이 아니다. 긁고 또 긁어서 약을 발라도 듣지를 않는다. 아파트 메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을 쳐 달라고. 독한 약이니 화초를 모두 밖에 내놓았다. 약을 친 후 4시간이 지나야 사람이 집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6시간쯤 후에 집에 들어가서 문을 모두 열어 환기를 시키고 청소를 깨끗이 하고 화초를 들였 놓았다. 약 냄새가 진동하지만 독한 기운은 이제 거의 가셨으리라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화들짝 놀랐다. 화초가 죽어가고 있다. 밤새 그들은 독한 약을 마시며 아파했다. 내가 너무 일찍 들여놓았나보다고 후회하며 다시 밖에 내 놓았다. 딸의 성화대로 생수를 듬뿍 주어서. 며칠을 애를 쓰며 돌보았는데 화초는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잎들이 내 가슴에 박힌다. 너무 정들어 보내고 싶지 않다. 어떻게 해야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다시 내 품에 돌아올 수 있을까? 온 정성을 다 쏟았는데도 기어이 떠나겠다고 마음 굳힌 것 같다.
오래진 않았지만 정말 아꼈다.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 가슴 졸였다. 그러나 떠나야 한다면 나도 독한 마음먹고 보내야겠지. 그동안 너로 인해 행복했다. 작은 대화가 하루의 피곤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던 날들이었다. 그 행복으로 만족하며 잊어야겠지. 행복의 무게보다 이별의 무게가 더 무겁다는 걸 배우게 해준 너를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