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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숙 Sep 17. 2024

어느 할아버지의 눈물

  우리 아파트 정원. 4년 전에는 채소가 가득하던 그곳에 이제는 잔디가 푸르다.  정원 양 옆으로 키가 훌쩍 큰 두 그루의 팜 추리가 우리 아파트의 경비원이나 된 듯 버티고 서 있다.  며칠 전 불어온 바람에 떨어진 팜 추리 잎이 지저분하여 줍고 있었다.  “정원사가 오지 않나요?” 지나가는 사람이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순간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4년 전에 만난 그 할아버지 음성인 듯하여.  놀라 쳐다보는 나에게 그 한마디만 던진 신사는 웃음을 지으며 내게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내 마음은 어느덧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가슴 아리게 생각나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참 따뜻하고 친절하던 분.       

  낮선 할아버지 한 분이 지나가시다가 아파트의 작은 정원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지혜로운 여인이군요.  정원에 꽃이 아닌 채소를 심다니......”라고 말을 걸어오는 할아버지는 이곳에 이사 온지 1년이 지난 어느 날 내가 처음 보는 분이었다.  웃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유창한 영어에는 언제나 그렇듯 잔득 주눅이든 채로 대답을 겨우 했다. “이것을 무엇이냐, 저것은 어떻게 먹는 것이냐?”를 열심히 묻고 나는 더듬거리며 그러나 공손하게 꼬박꼬박 대답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고 대답을 할 수 없어서 멋쩍게 “음......내가... 영어가 부족해서......미안합니다.”라고 더듬거렸다.  할아버지가 나에게 미국에 온 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물었다.  “4년쯤......” 이라는 나의 말에 “4년에 그 정도면 잘 하는 편인데 뭘 그러냐.”며 칭찬까지 아끼지 않는 그 할아버지는 퍽 다정한 분 같았다.

  아이가 있느냐, 아이는 미국에 잘 적응하느냐 등 질문하셨다.

  “나는 1학년 때 미국에 처음 왔습니다.”라고 하시더니 갑자기 먼 산을 보는 듯 아련한 눈빛과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학교에 입학한 날 화장실에 가고 싶었는데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날 바지에 똥을 싸고 말았습니다.”라며 60년 전으로 돌아간 아득한 모습이었다.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했는지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 나이 70살을 바라보는데, 지금은 모든 기억이 가물 하여 어제의 일도 잊어버리는데도 불구하고 그 옛날 60년 전의 일이 바로 어제 일보다 더 생생하게 나의 기억에 남아있습니다.”라며 얼굴에는 미소가, 그러나 가슴에서는 아팠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그 말에는 이민자라면 누구나 겪었음직한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또한 그 말은 내 가슴에 아릿한 기억이 되살아나게 했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는 첫날 아이보다 내가 더 떨리고 불안했다.  아침에 일어나 기도해주고 학교로 데리고 갔다.  입학하고 한 2주쯤 되었을까,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아이가 울고 있으니 데리고 가라고.  깜짝 놀라 학교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사무실에 앉아 이미 눈물을 그치고 나를 기다리는 아이를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가라고 한들, 들어오라고 한들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  정말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말 할 줄을 몰라서 그냥 쉬는 시간까지 참고 기다려야만 했을 것이다.  

  그 할아버지는 다음에도 자주 만났다. 높다란 펜스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아파트 앞에 손바닥만 한 정원이 있었다.  주인이 잔디를 심을 것이라 말하고는 해가 지나도 그냥 두었기에 내가 상추며, 쑥갓이며, 케일이나 호박 등 여러 가지 채소를 심었다.  채소를 만지고 있을 때 가끔 그 앞을 지나가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 할아버지에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만큼만 대답하고 함께 웃곤 했다.

  한번은 만면에 미소를 가득히 머금고 나에게 다가와,  “내가 오늘 몹시 흥분되는 날입니다.  내 딸이 30살인데 어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동안 딸은 아이가 없어서 딸이 몹시도 불안해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아직 나이가 어리니 조금 더 기다리라고 말을 하면서도 나 역시 불안했었는데 어제 아들을 낳았습니다.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나,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답니다.  믿어지세요?” 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축하합니다, 정말 축하합니다.”맘껏 축하해드렸다.  

  할아버지는 가끔씩 지나가다가 내가 정원에 없어도, 집안에서 움직이는 모습에 창가에 보이면 길가, 펜스너머에서 큰 소리로 불러 이야기를 걸었다.  나 역시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방문을 열고 나와 함께 이야기 하곤 했다.  어쩌면 그 할아버지는 지나는 길에 나와 잠시 이야기 나누고 가는 것이 즐거움이었는지 모른다.  비록 영어가 되지 않아 긴 이야기나 깊은 이야기는 나눌 수 없었겠지만. 자그마한 체구에 약간은 남루한 행색.  나이보다 10년은 더 들어 보이는 그 할아버지는 우리 아파트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곳에 시에서 마련하여준 보금자리에서 비슷한 형편의 사람들과 함께 생활한다고 했다.  가족은 딸 하나가 전부라고 말한 그 할아버지는 이민생활에 어려움이나 아픔을 나와 함께 이야기했다.  

  작은 정원이지만 가득히 자란 채소들은 우리가 먹는 것은 고작 서너 잎이고 주로 남에게 나누어주었다. 어느 날, 누군가에게 주려고 열심히 상추를 따고 있었다.  그 할아버지의 손에 술병이 들려서 나의 아파트 앞을 지나가다가 문득 멈추어 서서 나를 보았다.  그런 할아버지의 눈에는 가득히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언제나 밝은 웃음이 얼굴에 가득해 보는 것만으로 나도 미소를 머금게 하는 그런 할아버지의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벌떡 일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세상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그런 것이 삶이 아니겠냐며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당신은 참 착한 여자이고, 친절한 여자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을 했다. 첫 번째 말은 나에게 들리게 또렷하게 말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흘러내려 얼굴에 가득한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는 듯 그냥 흘리며 내 앞을 지나쳐 갔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고 마음이 답답했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다음날 아침이던가.  바로 우리 집 한두 블록쯤 위쪽에서 시끄럽게 앵앵거리는 앰블런스 소리가 들렸다.  약간의 불안한 생각이 속에서 올라왔지만, 뭐 별일일까 하고 지나쳤다.

  그날 이후 4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그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어디로 가셨을까?  하나뿐인 혈육인 딸집에 가신 것일까?  아니면……. 어디에 물어 볼 곳도 없고, 그 할아버지가 사는 곳이 어딘지 정확하게 모르는 나로서는 가슴만 졸였다. 더구나 나는 그 할아버지의 이름도 모른다. 왜 일찍 이름이라도 물어보지 않았을까? 찾을 길도, 알아볼 방법도 없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며 서서히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오늘 아침 그 신사의 말 때문인가, 갑자기 많이 생각난다. 그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잔디가 가득한 정원 한 켠을 걷어내고 조그마한 공간을 만들어 상추라도 서너 포기 심어야겠다.  혹시라도 다시 말을 걸어올지 모르는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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