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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숙 Sep 12. 2024

할리우드 살아요


언젠가 한 시트콤이 인기를 끌었다. 친구가 아주 재미난 드라마라고 적극 권장하여 봤다. “청담동 살아요.”라는 제목의 그 드라마는 청담동에서 세 얻어 만화방을 하는 서민들의 이야기다. 청담동이 부자동네라는 것을 그때에야 알았다. 그 드라마 때문인지, 때맞추어 신문에서는 청담동에 살고 있는 유명 스타들과 기업가들을 즐비하게 늘어놓으며 그 동네가 얼마나 부자동네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 부자동네서 뒷방을 세 얻어 사는 서민들은 그래도 남들에게“우리 집은 청담동이에요.”라고 한다. ‘있어’ 보이기 위함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인간의 허세는 무죄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작은 허세쯤은 가지고 있음이니. 그것을 눈감아주지 못하고 탓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리어 그가 너무 세상을 건조하게 사는 사람이 아닐까.

내가 살던 곳은 할리우드‘쪽’이었다. 걸어서 육, 칠 분이면 지난 날, 또는 현재 유명스타들의 이름이 새겨진 별들이 줄지어 있는 Hollywood Blvd.을 걸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이면 그 유명한 CNN방송국 앞에 서있을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십오 분 정도만 걸으면 오스카상 시상식이 열리는 코닥극장 앞에 다다를 수 있는 거리가 나의 집이었다. 몇 년 전 오스카상 시상식이 있던 날 마침 한국에 있는 친구와 전화할 일이 있었다. 친구가 때맞추어 오스카상에 대해 언급했다. 때를 놓칠 수 있겠는가? 나는 당당히, 자랑스레 말했다. 우리 집이 바로 그 근처라고. 한국의 친구는 상상의 나래를 폈을 것이다. 얼마나 훌륭한 집일까 하고. 우리 아파트 컨디션에 대해서는 절대로 입 열지 않았다. 우리 현관문을 열고 집 앞에 나서면 ‘HOLLYWOOD' 사인이 바로 보인다는 말만 했다. 

그럼에도 내가 사는 아파트는 서민 아파트였다. 한 블록만 앞뒤로, 혹은 옆으로 가면 다 좋은 곳이었다. 동네는 정말 좋았다. 할리우드니 오죽할까. 그러나 내가 사는 아파트만은 낡고 자그마한 아파트였다. 겨울에 우기가 들어서면 염려부터 해야 했다. 비를 유난히 좋아했기에 반갑기도 했지만, 다른 쪽에는 걱정도 있었다. 비만 오면 창으로 빗물이 넘쳐들어 온 집안에 가득하기 때문이었다. 방도, 거실도, 부엌도 다를 것이 없었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막기 위해 커다란 타월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창가를 막고 그래도 흘러내릴 때는 수도 없이 타월을 짜고 바꾸며 빗물의 침입을 막아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참 바보였다. 아파트주인에게 이야기하여 빗물을 막을 물받이를 해 달라고 하면 되었을 것을. 왜 나는 그런 말도 못하고 내가 겪어야하는 ‘고난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듯, 무슨 ‘죗값을 치르는’ 마음으로 그 일을 그렇게도 묵묵히 해왔을까. 밤에는 잠을 편히 잘 수도 없었다. 몇 번이고 일어나 타월을 짜거나 갈아줘야만 했으니까. 아파트가 허술하여 여름은 한없이 덥고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춥지 않은 로스앤젤레스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누군가가 내게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내 집은 할리우드’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할리우드 쪽”이겠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피아노 가르치는 일을 한다. 학생들의 집으로 가서 가르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부모들은 가끔 내가 어디에 사느냐고 물어본다. “할리우드‘쪽’에 살아요.” 나는 분명히 ‘쪽’을 강조하여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분명히 내가 말한 그 ‘쪽’을 ‘어느 쪽’에다 던져버리고 “아, 네... 할리우드에 사시는군요.”라고 말한다. 혹시 내가 ‘할리우드’만 강조하고 ‘쪽’을 희미하게 발음한 것이었을까? 그들은 피아노 교사쯤 되니까 할리우드에 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할리우드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조금 더 훌륭해 보이나보다. 어떤 학부모들은 한 수 더 뜬다. “아, 그 동네 예술가들이 많이 사시지요?” 글쎄, 눈 씻고 찾아보아도 내 눈에는 예술가들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예술가가 아니니 내 눈에 뜨이지 않음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하여간 모든 이들이 나를 ‘할리우드’에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했을까? 내 대답은 언제나 ‘우아한’미소로 대신했다. 입은 꼭, 다물고. 결코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나는 모든 상상을 상대방에게 넘기고 혼자서 한없이 ‘고상한’ 표정을 지었다. 할리우드 사는 사람답게.

그런데 이런, 내가 이사를 했다. 팔 년간의 화려했던(?) 할리우드 생활을 모두 접고 멕시코 사람들이 군집해 사는 곳으로 왔다. 이제는 비가와도 빗물이 창으로 세어 들어올까 염려 없이 비를 즐길 수 있다. 여름도 먼저 집보다 시원하다. 겨울은 추위를 모른다. 살기가 전보다 더 좋아졌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가 사는 곳을 물어보아 우리 동네를 이야기하면 첫마디가 “어머, 그 곳 위험하지 않나요?”라고 한다. 방금 전 우리 아파트에서 총기사고라도 난 듯, 그래서 그 소식을 듣기라도 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조금은 가여운 눈길까지 보낸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까지 멀쩡히 살아 있다. “할리우드 살아요.”라고 말할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살고 있는 곳에 따라 사람이 달라 보이는 모양이다. 

지금의 생활환경은 전보다 더 나아졌다. 그러나 남들에게 우아한 미소와 고상한 표정으로“저, 할리우드 살아요.”라고 대답할 수 없음은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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