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많이 온다. 평생 처음 있는 가뭄이라고 온 캘리포니아가 야단이었는데 얼마나 다행인가. 그동안의 모든 가뭄이 이 비로 해갈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유난히 비를 좋아하는 나는 요즘 신이 난다. 비는 아무리 오래 와도 지루하지 않으니 비가 그저 고마울뿐이다. 지난밤부터 쏟아진 비는 아침이 되었어도 계속하여 풍성하게 쏟아붓는다. 새벽에 일어나 창을 통해 바라보는 비의 모습과 그 소리가 나를 한없이 행복하게 만들었다. 빗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무엇이, 어떤 음악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그 소리를 듣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만큼은 모든 아픔도, 고통도, 외로움도 다 사라지고 만다. 내가 한국이 그리운 가장 큰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인 것을.
아침 일찍 볼일이 있어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비가 더 많이 내렸다. 그 순간을 조금 더 즐기고 싶어서 어딘가에 차를 멈추고 싶었다. LA 한인타운 길거리에 주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찌할까? 이 비를 좀 더 즐길 수 있는 자리가 없을까? 궁리하며 천천히 운전하는 내 눈에 들어온 것은 ‘Jack In the Box’ parking lot이었다. 아 저기가 좋겠다. 아침 이른 시간인 데다 비가 오고 있으니 마침 주차장이 비어있었다. 차를 세우고 빗소리를 들으며 비 오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차 백미러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옷은 몹시 초라하고 손에는 뭔가를 가득히 들고, 우산도 없이 비를 흠뻑 맞으며 다리는 절룩거리며 비틀비틀 걷고 있었다. 바지는 얇은 면 반바지에, 윗옷도 얇기 그지없었다. 더 중요한 건, 두꺼운 옷이든 얇은 옷이든 이미 다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상황에 옷이 두꺼우냐 얇으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듯 보였다. 힘은 하나도 없고, 허기가 그를 감싸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의 삶의 무게가, 추위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그 비가 그를 짓눌렀나 보다. 많이 지쳐 보였다.
빗소리는 잊어버리고, 비 오는 모습도 보지 않고 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내 차 백미러에서 사라진 후 몸을 돌려 뒤로 돌아보았다. 힘겹게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망설였다, 내게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마음으로는 그를 도와야지 생각하면서 몸이 빨리 따라주지를 않는다. 내게는 왜 그것도 용기가 필요했을까. 큰 용기를 내서 차 문을 힘껏 열고 나왔다. 그의 뒤를 따라 ‘Jack In the Box’ 가게 문을 열었다. 계산대 앞에 선 그는 자기의 다 젖은 가방(?)을 뒤지고 있었다. 돈을 꺼내기 위함이었다. 계산대에 다가간 나는 “저 사람의 계산을 내가 하겠다”라고 말하니 cashier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내가 돈을 지불 할 테니 무엇이든 당신이 원하는 것을 먹으라고 했다.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그 곁에서 이미 주문을 마친 휠체어를 탄 또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자기 것도 함께 계산해 주겠냐고. 그는 이미 돈을 손에 쥐고 있었으며 젖지도 않았고, 많이 피곤해 보이지도 않았다. 잠시 생각한 나는 그에게 그러겠노라 했다. 처음 사람은 작은 것을 시켰지만 나중 사람은 큰 것으로 주문을 바꿨다. 어쨌든, 그들에게 따듯한 아침 한 끼를 대접하고 이미 아침을 먹은 나는 그냥 나왔다. 두 번째 음식을 시킨 사람은 나에게 thank you라고 인사를 했지만 처음 사람은 그 말조차 할 힘이 없는 듯 보였다.
큰 것이 아닌 작은 것으로 남에게 베풀기가 어쩌면 더 어려운 듯하다. 그것도 습관이 되어야 하니 쉬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 많은 뉘우침을 받았다. 작은 베풂도 나에게는 연습이 필요하다니, 내가 살아온 삶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모든 것은 훈련이 필요하다. 어떤 것이든 몸에 배도록 훈련해야 한다. 친구를 통해 들은 말이다. 나이가 든 후에는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이 뇌에 좋단다. 비록 작은 일이라도, 뭔가 어색하고 익숙지 않은 일을 행동으로 옮김으로 행복도 얻게 되고, 앞으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생기면 그 또한 뇌가 활동하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얼마의 돈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습관의 문제이다. 작은 것을 나누고 베풀면 그것은 나에게 행복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가끔 그 사실을 잊고 산다.
비로 인해 행복을 얻으려 한 오늘, 22달러로 인해 나의 뇌는 좀 더 젊어졌고, 더하여 가슴 한쪽의 작은 부분에 뿌듯한 행복이 전해지는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