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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자른날(들풀의 마음쓰기 2)

여러분의 .초기 기억은 건강하신가요?

by 들풀

사랑하는 딸, 아들!

아버지는 지금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마음공부를 하고 있어..

아버지의 공부는 프로이드를 거쳐, 융, 지금은 아들러에 이르렀어..

너희도 심리 쪽에 관심이 있으니, 아부지보다는 더 잘 알고 있을 테지만..​

어제는 급우들과 초기기억에 대한 얘기를 나눴어..

자! 아부지의 초기기억을 이야기할게, 들어볼래?


언제 쯤이었을까?

그래, 내가 대여섯살 쯤 되었을거야..

우리집은 소를 두 마리 키웠고, 저녁에는 큰 가마솥에 쇠죽을 끓였지..

쇠죽솥은 너무 커서, 아부지는 겁이 났어..

청솔가지에 불이 붙으면서 나는 연기는, 어린 내게는 너무 매웠어..

그날, 조금 더운 여름날이었으니, 아마 7~ 8월쯤 되었을거야..

아버지는 새벽녘에 야들야들한 풀을 지게에 한 짐 가득 베어 왔어..

엄니는 다른 집 품앗이에, 아버지는 논에 가시고..

할머니는 밭에 가셨어..

집에는 다섯살박이( 여섯살박인가?), 아무튼 나 혼자였어..

초기 기억은 잉걸처럼 아득합니다

나는 배가 고팠어..

먹을 것은 없고, 나는 옆집 복이를 찾아 갔지..

엄마를 따라 갔는지 복이도 없고, 순이도 없었어..

배고픔을 달래려고 놀잇감을 찾았어..

아! 눈에 번쩍 띄는 좋은 게 있었지..

그건 작두였어..

나는 할머니가 작두로 혼자 풀 써는 모습을 보아 두었어..

그래, 이렇게 한 손으로 풀을 잡고 다른 손으로 누르면 되지..

아! 쉽네..

손으로 풀을 집어 한 줌을 썰고, 또 한줌을 썰었어..

운명의 세번째 작두질..

아차! 작두를 놓아버렸어..

댕강!

고백하자면 말이야..

아프지는 않았어..

처음에는 눈물도 흘리지 않았지..

나는 작두를 들어 손을 빼내었어.

약지는 겨우 껍질만 붙어 있고,

중지는 뼈가 드러났고, 새끼손가락도 반쯤은 푹 파였어..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어..

근데 갑자기 피가 솟구치는 거야..

나는 더럭 겁이 났어..

소리를 질렀어..

"으앙, 할매! 손가락이 잘렸어."

한참을 울고 있는데, 옆집 아지매가 달려 오더라..

손가락을 대충 붙이는데, 울 할매가 오셨어..

"아이고, 내 강생이! 울매나 아프노."

할매가 눈물을 흘리며 우는데, 나도 따라 울었어..

엄니는 일이 끝난 후에 오셨어..

사실 그때는 할머니가 훨씬 좋았어..

엄니가 날 때리면 쪼르르 할머니께 이르는 거야..

"할매, 엄니가 내 때렸어."

그러면 할머니는 엄니를 혼쭐나게 나무랐어..

나는 그게 너무 고소하고 재미있었어..

엄니께는 말을 꼬박꼬박 높히지만 할매한테는 항상 반말이야..

할매는 무조건, 언제나 내 편이었어..

나는 할매가 잔칫집에서 담배쌈지에 넣어오는 눈깔사탕이 맛있었어..

아니, 사실은....

할매는 봉초(봉지 담배)를 피우셨어.

담배쌈지에 담배를 넣어다니시다가 긴 곰방대에 꼬깃꼬깃 넣어 태우는데..

그곳, 쌈지가 내 사탕의 창고였거던..

사탕에는 담배가루가 진뜩하게 묻어 있었어.

나는 사탕에 묻은 담배를 빨아서 퉤, 퉤 뱉았어.

알싸한 맛이 목구멍에 걸렸지만 나는 끝까지 사탕을 쪽 쪽 빨아먹었어.

이야기가 옆길로 새었네, 아무튼..

엄니는 무명옷을 북 찢었어..

그리고 된장을 발랐지..

참 많이 쓰라렸어..

이틀 후에 엄니는 부산 공장에 다니는 누나들한테 다녀왔어..

엄니가 없으면 내 세상이야..

아무도 나를 나무랄 사람이 없었거던..

60년이 지났는데도..

한손은 붕대를 감았고, 나는 다른 손으로 물웅덩이를 만들었어..

올챙이도 한마리 넣었는데....

아 씨, 복이가 웅덩이도 훨씬 크게 만들고 올챙이를 다섯마리나 넣는거야..

그러고도 혀를 낼름거리며 더 크게 웅덩이 확장공사를 하는데..

나는 눈이 뒤집어지고 말았어.

나도 두 손을 걷어 붙였어..

겨우 붙은 손가락에 물이 들어가는데도 아픈 줄을 몰랐어..

<그러니 따님과 아드님! 너무 경쟁 하지마요, 다쳐.>

엄니가 오셔서 붕대를 푸는데, 진물이 줄줄 흐르는 거야..

살점이 썩어 들어가는 모양이야..

엄니는 솜으로 진물을 닦아내고 겨우 상처를 잡았어..

크, 그래서 손가락을 잃지는 않았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약지는 움푹 패여있고..

중지와 새끼손가락에는 긴 흔적이 남아 있어..

아버지는 너희들을 홀로 두면 두려워!

연락이 되지 않으면 안절부절하고..

이미 성년이 되었는데도, 항상 너희의 안전을 살피려고 노력하지..

아부지는 지금까지 그 이유를 몰랐는데..

손가락 자른날, 다섯살박이에게 새겨진 두려움의 발현이었던 거야.

언제 시간이 나면 너희들의 초기기억도 함께 나눠 보자.

아부지가 너희 가슴에 어떤 생채기를 내었는지 두렵지만..

치유는 상처를 드러내었을 때 가능하다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구나..

우리딸은 가장 힘든 고개를 넘고 있지만..

잘 이겨내어서 마침내 승리자가 될 것이라고 확신해!

오늘도 힘을 내어보자..

아부지가 많이 사랑해!

(2016. 4. 들풀.)


★ 사실 초기기억이 스토리로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작두에다 풀을 썰었고, 나무 손잡이를 놓쳐 피가 났고, 할머니가 달려와서 우셨고, 엄니가 된장을 발라주셨고, 엄니가 부산누나들한테 갔을 때 물장난을 해서 덧났고..

여러분의 초기기억은 어떠신가요?

혹시 아픔으로 남아있지는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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