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삶은 삶은 달걀 껍데기다

버려진 달걀 껍데기가 다시 달걀이 됩니다

by 들풀
버려진 달걀 껍질이 다시 계란이 될지도..

가장 씨알이 작은 싱싱달걀을

가장 싸다는 <홈뿌라스>에서 샀다.

스무알에 2,600원을 주었으니

한 알에 130원 꼴이다.

세상 물가가 다 올랐는데도

달걀과 요구르트는 10년 전, 그대로다.

또 있다.

우리 마누라의 키, 우리집 살림살이

우리 아이들 성적!​

아내는 달걀을 깨끗이 씻고

한 판을 통 채로 삶는다.

아이들에게 떡볶이라도 해주려는 심산이겠지.

식히려고 프라스틱 소쿠리에 담아

식탁에 얹어 둔 삶은 달걀을

아내의 혀 차는 소리를 귓 등으로 흘리며

TV 앞에서 거실 바닥에 또르르 굴러서 까 먹는다.


게임 하던 아들도 하나를 까서 먹다가

‘노른자는 팍팍해서 싫다’며 젖혀 놓는다.

다닥 다닥 달걀 껍데기가 붙은 노른자!

내 삶은 저 삶은 달걀 노른자와 꼭 닮았다.


이태 전만 해도 생산력은 있었는데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겨우 목숨만 붙어 있다.

초란 노른자를 닮았던 샛노랗던 정신은 희끄레해졌고,

기꺼이 아이들의 자양분이 되었던

뽀얗던 흰자위 육신도

이제 기력을 잃고 말았다.

아이들은 흰자위를 좋아하고

마누라도 흰자위만 골라 먹고

아버지의 정신, 삶은 노른자는

자잘한 달걀 껍데기가 덕지 덕지 붙은 채로

소쿠리 한 켠에 내동댕이 쳐졌다.

계란 껍데기만 쌓인다

“공부 잘 하는 것보다 바른 심성이 우선이다.”

“혼자 있을 때 더 지켜라!”

“조금 손해보고 살아라!”

“우리, 너, 그리고 나!”

“일절만!”


나는 노른자에 묻은 달걀 껍데기를 털어내고

혹시 묻었을 뵈지 않는 먼지를 수돗물에 살랑 씻어

입 안에 톡 털어 넣는다,

“내 딸아, 아버지의 삶은 저 삶은 달걀같단다.”

“내 아들아, 흰자위보다 달걀 노른자를 좋아해 다오!”

“내 마누라, 계란 노른자로 황색지단 부치고

흰자위로 백색지단 부쳐서

제대로 된 물국수나 한그릇 말아 주소!“

달걀은 이제 알맹이를 아이들에게 모두 먹히고

프라스틱 소쿠리에는 빈 껍데기만 그득 남았다.

(2009. 7. 들풀)

ㅡㅡㅡㅡㅡㅡ


♧ 올리면서

이 글을 쓴 지 16년이나 흘렀네요.

마트 전단지를 보니, 달걀 한 판 특판가격이 4,980원(정상가 5980원)이네요.

16년 사이에 무려 2배가 넘게 올랐는데,

그래도 다른 품목보다는 덜 오른 것 같습니다.


그때는 막 50대에 접어 들었는데,

이제 은퇴를 하고 60대 중반을 넘고 보니..

버려진 달걀 노른자가 아니라

숫제 달걀 껍데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달걀 껍질을 닭에게 쪼아 먹이면,

튼실한 달걀로 다시 태어날지도 몰라요.

현재의 들풀 모습일지도..

#시시한날에읽는시 #들풀시 #브런치시 #달걀 #삶은달걀

keyword
화, 목, 토 연재
이전 18화세월에게 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