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스겔 Jun 08. 2024

01.3.2.3.8. 율법의 종- 모세의 연대기 10

01.3.2.3.8.10.2.1.2. 둘째, 아론의 지팡이와 물의 신들에 대한 심판  

    01.3.2.3.8.10.2.1.2.1. 물에 대한 심판  
    01.3.2.3.8.10.2.1.2.2. 짝퉁 창조신화  
    01.3.2.3.8.10.2.1.2.3. 찐통 창조의 기록  

    01.3.2.3.8.10.2.1.2.4. 진실과 거짓     

    01.3.2.3.8.10.2.1.2.5. 하늘과 땅과 바다(천지)


01.3.2.3.8.10.2.1.2.5. 하늘과 땅과 바다(천지)


01.3.2.3.8.10.2.1.2.5.1. 미완의 하늘 땅 바다와 속임


여기서 우리(엘로힘, 하나님)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천지를 창조했지만 처음 만들어진 땅과 하늘(어둠, 우주는 빛이 없는 진공의 흑암,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끝을 알 수 없이 깊은 공간)은 아직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어 그 형태들이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았다. 귀신들이 흉내를 내려고 최대한 우리가 만들었던 창조의 과정을 흉내 내고 그 속에 자신들을 삽입하여 신의 흉내를 냈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원래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는데 이집트의 귀신들은 자신들의 속임수로 혼돈에서 질서로의 유에서 유의 창조를 주장했다. 이는 자신들이 원하는 다신론적 세계관을 이집트인들에게 세뇌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처음 있던 땅과 깊음의 표면의 어둠과 그 표면에 성령이 운행한 미완의 하늘과 땅과 바다의 창조에 대한 언급이 없다. 정확하게는 그 정확한 형태가 무엇인지를 정확한 묘사를 하지 않았다. 물론 그 미완의 하늘과 땅과 바다라는 단어 자체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 미완의 하늘과 땅 즉 천지의 창조가 창 1:1에 이미 포함되어 선포되었다. 그 모든 것도 우리(하나님)가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의 다신교에서는 이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들의 신화에는 이에 대한 공교한 속임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이집트의 속임과 같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는 없는 것이 인간들이 믿도록 유도하는데 장벽을 없애는 것이 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자체가 한계에 갇힌 인간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닌 거짓이다.


 01.3.2.3.8.10.2.1.2.5.2. 혼돈과 속임


또 귀신들은 우리가 창 1:1에 창조하여 이미 존재하던 미완의 땅과 하늘(어둠의 우주공간)과 바다에 대한 정체에 대해서도 속였다. 땅이 공허하다는 것은 땅과 물(바다)이 분리되지도 않았고 그곳에 살아가는 생물들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비어있다. 즉 void의 뜻이다. 단순히 존재적 공허를 말할 때의 공허가 아니다. 그러므로 공허라는 번역은 틀린 번역이다. 정확하게는 비어있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히브리어의 정확한 뜻도 동일하다. '비어있다'의 반대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점령하여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헬라 철학과 이집트의 종교적 의미(공허, 혼돈)를 덧붙이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번역과 해석은 70인역에서 온 것이다. 70인역의 번역 배경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음을 알 것이다. 이집트 신화 속의 속임에 여기서 성경 번역에 침투하였고 후에 수많은 거짓 번역의 원흉이 되었다.

바른 성경은 다음과 같이 창 1:2절 전반부를 번역하고 있다.  

*2 땅은 형체가 갖추어지지 않고 텅 비었으며,*

카톨릭 성경도 거의 비슷한 번역을 하고 있다.

*2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영어 KJV도 동일한 번역이다.

*2 And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

또한 히브리어 원어를 거의 직역한 YLT도 같은 번역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2the earth hath existed waste and void,*



 그것은 하늘과 땅과 바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형태가 없고 비어있는 땅은 물과도 분리되지 않았다. 물과 땅의 분리는 셋째 날(창 1:9~10)에 일어나게 된다. 또한 물과 우주(깊음과 어둠)의 분리와 대기권과 우주 공간의 분리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질 자체는 우리의 창조의 선포에 의해 이미 만들어졌지만 그 속에 존재해야 할 것들과 공간들이 아직 설정되어 분리되지 않았다. 이는 과정이다. 원소와 각각의 분자들은 결합되어 이미 형태를 이루었다. 그리고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필요한 구성요소들이 서로 합해져 뭉쳐져 있었다. 땅이 되기 위한 원소들은 그 모든 원소들이 이미 질서 정연하게 배열되어 땅으로 조합되기를 기다리는 컨베이어벨트 위의 부품들과 같이 대기하고 있었다. 바다와 하늘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도 그렇게 우리의 법을 따라 질서를 가지고 배열되어 있었다. 그것을 표현한 것이 성령이 표면에 운행하고 있다는 표현이다. 너희는 읽기는 읽어도 깨닫지 못하면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인간들의 언어와 문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집트의 짐승신들의 어리석음을 닮았구나. 창조의 과정에는 너희 어리석은 인간들이 과학이라 떠들며 너희 교만의 어깨를 들썩이는 도구로 삼는 법칙들의 모든 것들이 이미 그 효능을 발휘하여 질서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만든 것들이다. 너희는 단지 그 과학법칙을 줍듯이 발견한 주제에 그 법칙을 만든 존재인 우리를 판단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 너희가 조금만 지혜로왔다면, 최소한 저 아인슈타인과 같은 머리 수준만 되었어도, 인격적 존재의 신은 몰라도 과학의 법칙을 만든 우주의 어떤 법과 질서의 존재에 대해서는 추론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인슈타인과 같이 최소의 겸손은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창조의 과정도 모르는 것들이 이를 혼돈이라 하는 것은 귀신들의 장난질에 불과하다. 내가 이미 만든 것은 그 나름의 법을 가지고 물질화되어 이미 질서를 부여받았다. 원소들과 분자들은 우리가 만든 법을 따라 구성되고 움직인다. 이미 그 안에는 명확한 질서와 법칙이 존재한다. 그리고 원자 하나에만 해도 엄청난 질서(로고스)와 힘(듀나미스)에 의한 강력함이 존재한다. 원소 하나가 분열하거나 융합하여 낼 수 있는 힘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 힘들의 일부를 그것도 불환전하게 사용한 것이 원자폭탄이며 수소폭탄이다. 그런데 그 물질이 질서가 없는가? 그 물질들을 사용하여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을 채울 존재들을 만드는 창조의 과정의 미완의 상태를 혼돈이라 할 수 있는가?

밀가루에 우유를 넣고 버터를 넣어 반죽을 하고 그곳에 견과류를 넣는다면 너희는 그것을 혼돈이라 하는가? 그것은 혼돈이 아니다. 단지 빵이 되는 과정의 모든 법칙을 그 안에 담고 있는 잘 조합되고 계획된 중간 단계의 물체이다. 그것을 혼돈이라 한다면 그야말로 빵을 만드는 방법도 모르는 문외한의 평가라 할 수 있다. 빵을 만드는 과정을 아는 자라면 그 반죽이 얼마나 정확한 계량에 의해 질서 정연한 순서에 따라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다. 결코 그것은 혼돈이라 할 수 없다. 귀신들이 태초의 과정 중에 있던 미완의 하늘과 땅과 바다를 혼돈이라 한 것은 창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것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이것만 보아도 세상의 귀신들과 소위 과학자라고 하는 것들이 떠드는 소리가 얼마나 무식한 소리인지 알 수 있다. 그 존재적 한계도 모르는 터무니없는 교만의 다다이즘에 불과한 그것들을 우리가 들어주어야 할 이유가 없다.

너희는 우리가 창조한 하늘과 땅과 바다를 다스리도록 너희 인간에게 권세를 주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가 창조를 기록한 창세기 1장의 구조는 이로써 양괄식의 구조가 된다. 또한 아래와 같이 세부적으로 보면 양괄식 구조가 여러 개 겹친 동심원구조가 된다.

A 엘로힘(창 1:1)- 창조자
B 창조의 시작-일
C 미완의 하늘(어둠)과 땅(공허)과 바다(물)(창 1:2 )
D 공간의 창조(창 1:3~13)

d 공간의 거주자를 창조(창 1:14~31)
c 완성된 하늘과 땅과 바다(창 2:1)
b 창조의 완성(창 2:2~3)- 안식
a 엘로힘(우리)(창 2:2~3)- 창조자


여기서 핵심 포인트가 되는 것은 A와 a로 우리(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늘과 땅과 바다의 창조자이며 통치자인 신이다.

그리고 이 양쪽의 대칭 구조에서 완성된 역할을 하는 것이 B와 b다.
B(창 1:2절)는 창조 과정의 하늘과 땅과 바다며 시작이다.
b(창 1:26~)는 창조 완성의 하늘과 땅과 바다며 끝이다.

B(창 1:2절)를 혼돈으로 보아버리면 우리가 의도했던 동심원구조는 파괴되고 원래의 의도대로 해석될 수 없다. 우리가 기획했던 문학적 양식의 아름다움이 파괴되는 것이다.

그런데 귀신들과 일부 어리석은 학자들은 이 B(창 1:2절)를 혼돈이라 보았으니 그 근본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해석일 수밖에 없다. 귀신들과 이교도들은 그렇다 쳐도 이교도들의 글들을 읽고 어리석게 그 혼돈의 신화적 해석을 받아들인 역사에 존재했던 여러 신학자들은 그 우둔함과 아집이 이집트의 신들을 닮은 짐승들의 그것보다 더하다. 자신들이 읽고 있는 주석이나 석의집들의 출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것을 읽고 그 모호하며 혼돈스러운 카오스적 멍함을 즐기는 꼴이란 그 어리석음의 교만을 즐기는 귀신들 중 하나 사탄의 우스꽝스러움을 능가하는 볼거리다.


01.3.2.3.8.10.2.1.2.5.3. 우주 밖 물과 속임


사실 온 우주의 바깥에는 물이 없다.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것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한계 안의 것들이다. 창세기 1장의 궁창 위의 물도 인간의 눈에 보이는 물이다. 결코 우주를 벗어난 무한히 먼 곳에 있는 물들이 아니다. 궁창 위의 물은 대기권 위의 성층권도 넘어서는 곳에 위치했다. 내가 명령하여 물들이 궁창 위에 뜨게 되었을 때 물은 지구 주변을 둘렀다. 투명한 물의 막이 되어 지구를 온실과 같이 감쌌다. 우주 공간과 붙어 있어도 물이 얼지 않은 것은 태양의 복사열과 방사선들 때문이었다. 이것들은 궁창 위의 물을 데워주었다. 그리고 물의 특성상 그 온기를 오래 간직한다. 지구의 자전에 의해 태양의 반대편에 위치하게 된 물도 밤새 그 온기를 유지했다. 낮이 되면 또 데워졌다. 물론 대기권 위의 물은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밤의 어둠에 있는 물에게 반대편의 낮의 데워진 물이 온기를 더해주었다. 낮에는 영상 123도 밤에는 영하 173도를 오가는 지구 대기권 밖이지만 물은 그 모든 것을 이기고 얼지 않았다. 이는 온실과 같이 지구내부에 열을 응축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낮에 123도 밤이 -173도면 당연히 열의 손실이 더 높아 얼어야 하지만 지구에 응축된 열로 인해 물은 얼지 않고 그 형태를 유지했다. 그래서 거의 투명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구에서 보면 사실 물의 막은 있지만 투명한 유리를 톻해 바깥을 보는 것처럼 우주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집트 신화에서 귀신들은 우주의 밖에 물이 있다고 했다.


01.3.2.3.8.10.2.1.2.6. 귀신들의 속임의 목적


타락한 천사들은 자신들이 신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태초에 우리가 처음 창조한 미완의 물질들 속에 자신들을 신으로 투영시켜 넣었다. 공간과 공허, 그리고 시간과 어둠, 혼돈에 자신들을 대입시켜 신이라 주장했다. 사실 창조와 그 이전에도 혼돈이란 없었다. 오직 혼돈은 귀신들의 주장일 뿐이다. 자신들의 존재를 주장할 수 있는 개념을 법과 질서와 반대되는 개념에서 찾으려는 귀신들은 혼돈이란 가공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사실 우주의 어느 곳에도 시간의 어느 시점에서도 혼돈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우리의 질서와 법을 따라 움직인다. 빵반죽과 같이 혼돈스러워 보여도 그 속에는  정확성과 규칙성을 내제한 엄청난 비밀의 질서가 있다. 그런데 귀신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우리를 부정하는데서 찾으려 했는데 그 개념이 혼돈이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것을 찾아 혼돈이라 만들어내었다. 혼돈이 혹 피조계에 존재한다면 귀신들에게 속아 인간의 정신이 미쳐버린 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혼돈이 아니다. 고장이 나도 정확한 질서 안에서 고장 나는 증상들이 나타나고 그것을 통해 이상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정신병리학에서 인간의 정신증들을 진단하고 그 증상들을 분류할 수 있는 것이다.

타락한 귀신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혼돈에 두며 그 정체성을 미완성의 하늘과 땅과 바다를 의미하는 미완의 비어있는 땅과 깊음에 투영하려 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실 이것도 이들이 속인 것이다. 그런 것은 애초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의 창조 기록 중 일부를 변조하여 마치 그것이 있는 것처럼 속였다.

그 미완의 하늘과 땅과 바다 중 바다에 초점을 두고 그것에 혼돈과 혼란을 투영했고 그리고 그것이 우주의 모든 것을 넘어서는 엄청난 넓이와 힘을 자랑하는 것처럼 속였다. 태초의 누(혼돈의 바다)가 우주의 모든 것을 감싸고 있고 우주보다 넓다는 거짓 설정을 한 것이다.

사기를 치는 목적은 간단하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없는데 가지고 싶고 탐나는 것이 있으면 정상적으로는 차지할 수 없으니 사기를 쳐서라도 얻으려는 것이다.

타락한 귀신들은 신이 아닌데 신이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기억상실증에 걸린 인류를 대상으로 사기를 쳐서라도 신인척 하고 싶은 것이다.

그 기록의 흔적이 이집트 신화며 세상의 수많은 신화들이다. 세상의 조잡한 종교가 내세우는 것들은 항상 다 비슷하다.

이런 거짓들은 참 신인 우리가 가면 모두 그 어둠 속에 숨긴 거짓들이 드러나고 정죄되며 심판대에 오르게 된다.

이집트의 타락한 귀신들(사탄)과 악한 인간들(육체) 그리고 그들이 만든 (세상)은 이제 자신들의 악함으로 인하여 심판대에 오르게 되었다. 이것은 이미 일어났던 일의 기록이며 역사다. 너희도 이 역사의 기록을 통해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 너희 시대의 속임과 너희 시대의 거짓 종교와 너희 시대의 거짓 이념이 무엇인지 눈치채기를 바란다.


01.3.2.3.8.10.2.1.2.7. 물의 신들에 대한 심판


다시 이집트 신화로 돌아가겠다. 태초에는 빛도 없는 어둠의 심연만이 존재했다. 그 심연은 혼돈의 바다였다. 그 혼돈의 바다의 이름은 눈(Nu, Nun, Nuanet, Nunet)이었다. 그곳은 심연(abyss, chaos)으로도 생각되기도 했고 바다라 여겨지기도 했다. 또는 나일강으로도 여겨졌다. 그 물속에서 벤벤이라는 언덕이 솟아올랐고 아툼이 스스로 탄생했다. 아툼은 세상의 창조신이다. 아툼은 빛을 창조했는데 그 빛이 태양신 라다. 오벨리스크 기둥은 이 태양의 빛인 라를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피라미드도 태양의 빛이 퍼지는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라는 법과 질서의 여신 마트를 낳았다. 이제 세상의 혼돈은 사라졌다. 마트의 법이 세상의 질서를 가져왔다.


이집트인들의 세계관에는 마트가 가져온 질서의 세계 바깥을 혼돈의 누가 여전히 둘러싸고 있다. 혼돈의 누는 모든 것의 탄생의 근원이며 여전히 창조된 질서의 세상도 혼돈의 누에 포함된 일부일 뿐이다. 이집트인들은 모든 세상의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은 누에서 나왔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 누가 바로 혼돈의 바다 즉 물이다.

그 물이 피로 변한 것은 모든 세상의 근원인 물(혼돈의 바다, 또는 나일강)이 심판받은 것이다. 눈(Nu, Nun, Nuanet, Nunet)이 피바다가 된 것이다. 이는 이집트의 모든 것이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 눈(바다, 물)에서 나온 신들이 모두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눈(바다, 물)에서 나온 모든 피조계가 심판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둘째 심판으로 물을 심판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물(눈, Nu, Nun, Nuanet, Nunet)이 피바다로 변한 것을 본 이집트인들은 누구나 자신들의 생명이 끊어질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의 가장 강력한 신이 이미 심판을 받았음을 눈으로 목도했다.

이집트에서 나일강은 생존에 절대적이다. 그들의 농업은 나일강의 범람과 함께 시작한다. 나일강은 그들이 농사 지을 비옥한 범람지역을 준다. 그리고 모든 물의 수원지가 된다. 비록 모래에서 우물을 팠어도 그 우물은 나일강의 물이 모레필터에 의해 걸러져서 나온 물이었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에게 나일강은 생명줄이었다. 그 물의 흐름이나 범람의 정도가 조금만 차이가 있어도 농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에게 나일강은 절대적 존재였다. 마치 신과 같았다.

그 나일강의 신이 하피였다. 더 정확히는 나일강의 범람하는 물이 하피였다. 나일의 범람은 농업에 절대적이었는데 하피가 바로 범람 자체였으며 또한 범람의 신이었다.

이집트에 왕조가 들어서기 전에는 나일강의 이름이 하피였다. 하피 신 자체가 강이었다. 그러다, 왕조가 들어서면서 물을 뜻하는 나일이 강의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하피는 범람의 신으로 따로 불렸다.

하피는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여자의 유방을 달고 임신한 배를 하고 있다. 머리에는 연꽃을 꽂기도 하고 이집트의 섬기는 지방에 따라 파피루스나 보리를 꽂기도 한다. 모두 나일강을 상징하는 식물들이나 곡식이다. 또 나일강은 이집트의 주신인 태양신이 아침마다 산책을 한다. 그 나일강의 신이 하피다. 이집트 신화에서 물의 신인 눈에게서 아침에 태양신이 떠오른다. 나일강에 태양신이 아침 산책을 한다는 표현과 사실 동일한 표현이다. 여기서 물의 신인 눈과 하피가 동일시되기도 한다. 그래서 하피는 나일강의 물로부터 떠오르는 태양신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나일강과 관련된 신들이 많다. 태초의 혼돈의 물신 눈(Nu, Nun, Nuanet, Nunet)과 그리고 나일강의 범람의 신 하피, 그리고 혼돈의 물로부터 나온 모든 이집트의 신들이 관련이 있다.

물이 피로 변한 사건은 또한 하피가 다스리고 태양신이 거니는 나일강이 피로 변한 것이다. 결국 나일강 속의 생물들이 죽임을 당했다. 또 나일강의 물을 마시고 그 물로 농사를 지어야 하는 이집트인들도 시간이 지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릇과 연못의 물조차 피로 변했다. 이집트인들은 나일강 주변의 모래를 파 그곳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려 했다. 나일강의 모래가 필터링을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레와 흙의 필터링 능력도 한계가 있다. 곧 그 물도 마실 수 없게 될 것이다.

모든 물이 피로 변한 사건은 쉐즈무와도 관련이 있다. 그는 죽은 자의 머리를 와인프레스에 넣고  짜내는 공포의 신이다. 그는 지하세계의 하급신이었다. 인간의 범죄를 단죄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머리에서 피를 짜내었다. 그는 여러 기능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와인과 피를 관장하는 신으로 알려졌다. 쉐즈무는 나일강이 피로 변했는데 이에 대해 아무런 능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또한 쉐즈무의 신화를 알고 있는 모든 이집트인들은 이 사건의 의미가 쉐즈무가 의미하는 죽음 이후의 죄과에 따른 심판임을 알 수 있었다.

참고로 이집트인들은 상형문자를 썼으며 그것은 상형인 동시에 표음문자였다. 그런데 이 문자들은 사용하는 자가 서기관들과 고위층뿐이었다. 일반적인 백성들은 문자를 알지 못했다. 상위 1%만 문자를 사용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문맹이었다. 이런 이집트인들의 대부분은 기록된 신화를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의 대부분은 구전으로 신화의 거의 대부분의 내용들을 알고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식으로 편성된 신화의 내용을 전 국민들이 즐기고 믿었다. 모세의 시대에 살았던 이집트인들도 동일했다. 또한 이집트에 살았던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인 경우는 적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설화적 신화들은 구전을 통해 이야기로 들었다. 지금 내가 이 글에서 언급하는 내용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방대한 이야기들을 구전으로 전하고 들었던 이집트인들이나 히브리인들의 관점에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듣는다면 모세가 기록한 것처럼 신화에 대한 설명은 생략해도 될 것이다. 이미 그들은 듣는 순간 뱀과 물과 개구리에 대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대 백성들을 위해 집필된 모세의 출애굽기(Exodus, 출이집트기)에는 신화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하피와 태양신 라와 이집트의 모든 신과 세상의 근원인 눈이 우리(하나님)에게 패배한 것이다. 그들은 원래 타락한 천사들 즉 귀신들이므로 이러한 결과는 당연한 것이다. 또한 그들은 원래 태양도 세상의 근원인 물도 아니었다. 단지 그들은 타락한 천사들 즉 귀신들일뿐이었다. 그 타락한 천사들의 수장이라는 사탄도 한낱 귀신일 뿐이다. 우리는 이집트의 가장 강력하고 근간이 되는 나일강과 관련한 신들과 이집트의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창조의 근원, 눈과 나일강의 신 하피를 심판함으로 이집트의 모든 것을 심판했다. 그 모든 사기와 거짓을 드러내었다. 바울은 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했다.

Colossians 2:15 개정
15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사람들은 나의 십자가가 실패와 죽음의 자리라고 생각하지만 사도바울은 위와 같은 평가를 했다. 삼손이 마지막 죽음으로 무찌른 적이 살아서 무찌른 적보다 많았던 것과 같이 나의 최고의 승리는 십자가였다. 구약 모세 시대나 엘리야 시대에 엄청난 기적들이 일어났지만 그 모든 기적보다 더 놀라운 사건이 나의 십자가다. 사실 타락 이후의 구약이나 신약의 모든 기적들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근거가 십자가에 있다. 이 놀라운 사건이 없었다면 구약이나 신약의 우리의 모든 인간 세상에 대한 개입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타락 이후의 우리(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모든 개입의 근거는 십자가였다. 십자가는 그만큼 위대하고 전적이며 그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런 100%의 사건이다. 이집트에서 행한 기적도 모두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세상에 펼친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내가 사람이 된 이후의 사건을 기록할 때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12 기적 중 장자의 죽음과 그 장자의 죽음을 포함한 유월절은 모두 십자가에 대한 예표였다. 그리고 홍해의 사건도 이 십자가의 죽음과 관련한 사건이다.

이제 세상과 파라오가 의지하는 능력의 가장 강력한 것이 무너졌다. 나일의 신이 무너졌으니 이제 나일강으로부터 오는 모든 축복도 사라질 위기다. 만약 우리에게 굴복하여 우리의 백성 이스라엘을 놓아주지 않는다면 이집트는 그 권력의 근원적 힘인 나일강의 풍요가 사라질 것이다. 결국 이집트 문명은 쇠퇴하고 멸망할 것이다. 이제 이집트의 거짓신들의 패배가 시작되었다. 참 신인 우리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파라오는 굴복하지 않았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육신의 왕은 언제나 동일한 어리석은 고집으로 그 마음의 통을 가득 채우고 있다. 마치 피로 변해 먹을 수 없는 나일의 물을 물항아리에 저장한 어리석음과도 같다.

이전 10화 01.3.2.3.8. 율법의 종- 모세의 연대기 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