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와 갈렙의 침노
침노의 단어 뜻은 침략하여 노략한다는 것이지만 우리(하나님) 나라의 침노는 도둑질하고 빼앗고 빼앗고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다(요 8:44). 우리의 침노는 살리는 것이며 해방시키는 것이다. 어둠에서 빛의 나라로 옮기는 것이다. 원수에서 자녀로 복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완성될 에덴으로의 회복을 가나안에 심었다. 그것은 자라 결국 말세지말의 회복으로 이어질 것이다. 가나안의 위치가 원래 에덴이 있던 곳이다. 에덴동산이 있던 곳은 가나안의 예루살렘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 이름은 평강의 도성이다. 원래 평강 즉 안식이 있었던 태초의 도성이 바로 에덴이며 그곳을 상징하는 성읍이 예루살렘이다. 그래서 이 땅의 것이 아닌 영원히 회복되는 에덴의 이름은 새예루살렘이다.
이러한 완성된 회복을 한 번에 나타낸 것이 가나안이다. 그러므로 가나안에 대한 해석을 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특히 가나안에서 일어난 정복을 바라볼 때는 침노의 시와 때를 분별하여 역사 속에 언제 천국이 침노를 하는지 그리고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의 나라가 완전한 새 세상으로 도래하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처음 출애굽도 유월절 피뿌림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약속을 따라 홍해를 건너고 시내산의 법을 받았다. 그곳에서 모세가 만난 우리 여호와를 만나고 회막이 있고 그것이 성전이 되었다.
성전이 세워질 그 땅을 처음 정복한 자가 여호수아다. 여호수아 세대의 침노는 사실 전체를 보여줌과 동시에 일부를 보여준다. 일부라 함은 다윗과 솔로몬의 성전세대로 나아가는 왕국의 시작이라 그렇다. 또한 전체라 함은 마지막 말세의 옛 세상의 멸함과 새 세상의 시작을 보여주는 것이라 그렇다. 그렇게 침노가 완성되어 그 땅에 안식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왔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세상을 점령하지는 않았다. 여호수아의 정복은 이를 잘 보여주는 침노다.
침노의 시작은 이미 이집트를 떠남으로 시작되었다. 이집트에서 있었던 12 기적은 이집트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두려워 떨게 했다. 이미 저들은 심판의 소식에 두려워 떨었다. 40년의 광야 세월이 지났음에도 저들은 과거 이집트에서 있었던 우리의 심판과 해방의 기적들에 놀랐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아우르는 거대한 기적들로 자신들이 섬기던 귀신들은 행할 수도 없는 경이에 저들은 경악했다.
그 세대가 광야를 거쳐 요단의 동편 땅에 시혼과 옥을 정벌하고 드디어 요단을 건넜다. 그 과정도 홍해를 건넌 것과 같은 기적이었다. 비가 내려 홍수가 나는 시기의 강이 벽을 이뤄 멈추고 그 마른 땅으로 이스라엘이 건넜다. 그곳에는 언약궤가 함께 했다. 피뿌리는 우리(하나님) 여호와의 발등상이 있어 임재가 있는, 만남이 있는, 속죄소가 그룹들에 의해 덮이는 영광이 함께 했다. 그러므로 거대한 홍수의 죽음이 멈추고 그 길을 내어 내 백성들을 건너게 했다.
저들은 유월절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와 함께 광야에서 죽었다. 그리고 부활의 언약을 따라 광야에서 새로 나 우리의 아들이 되었다. 그들이 건넌 곳이 홍해요 또 요단이었다. 하나는 바다와 하나는 강이었다. 바다는 큰 죽음의 시작이요 그 죽음의 과정은 광야였다. 그리고 부활의 언약이 강을 멈추게 했다.
이제는 우리의 아들들이, 천국의 아들들이 땅에 침노한다. 그래서 그 침노한 곳을 빼앗아 우리의 나라로 귀속시킨다. 그 과정들을 여호수아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기고 이기고 이기는 말세지말의 전 세계적 연쇄회복과 다시 살림의 꿈을 예표하고 있다.
여호수아서는 가나안의 정복과 분배를 모두 기록하고 있으며 유업을 받을 족속들에게 유업의 분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보이고 있다. 이는 말세지말에 임할 새 세상에서의 분배를 예표하며 교회가 모든 만물 위에서 통치할 새 통일적 질서를 보여준다.
여호수아서의 정복과정은 여호수아가 이끌어간다. 그런데 그 정복의 약속을 받은 자가 또 등장한다. 다음의 기록들을 보라.
Joshua 14:6-15 바른
그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여호와께서 가데스바네아에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나와 당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일을 알고 계십니다.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 땅을 정탐하라고 나를 가데스바네아에서 보냈고, 내가 돌아와서는 내 마음에 있는 대로 그에게 보고했습니다.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마음을 녹게 했으나, 나는 여호와 나의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으므로, 그날 모세가 이렇게 맹세하기를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유업이 될 것이니, 이는 네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하신 때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내 온 그 사십오 년 동안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살아 있게 하셨습니다. 내가 오늘날 팔십오 세이지만, 모세가 나를 보냈던 날과 같이 오늘도 여전히 강건하고, 전쟁에나 출입하는 일에 내 힘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므로, 이제 여호와께서 그날에 말씀하셨던 이 산지를 내게 주십시오. 그곳에는 아낙 사람들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하다는 것을 당신도 그날에 들었으나,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그들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를 축복하고,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헤브론을 유업으로 주어, 헤브론이 지금까지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유업이 되었으니 이것은 그가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기 때문이다.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아르바였는데,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다. 그 땅에 전쟁이 그치고 평온해졌다.
Joshua 15:13-20 바른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유다 자손 가운데서 기럇아르바, 곧 헤브론 성읍을 분깃으로 주었으며, 아르바는 아낙의 아버지였다. 갈렙이 거기에서 아낙의 세 아들, 곧 아낙이 낳은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다.
갈렙이 거기에서 드빌 주민을 치려고 올라갔으니, 드빌의 옛 이름은 기럇세벨이었다. 갈렙이 말하였다.
"기럇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
그런데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그곳을 점령하였으므로, 갈렙이 그에게 자기 딸 악사를 아내로 주었다.
악사가 출가할 때 남편에게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청하라고 재촉하였고, 악사가 나귀에서 내리자, 갈렙이 자기 딸에게 물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악사가 말하였다.
"제게 복을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제게 네게브 땅을 주셨으니, 샘물들도 주십시오."
갈렙이 그 딸에게 위의 샘들과 아래의 샘들을 주었다.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유업이 될 것이니, 이는 네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갈렙이 가데스바네아에서 모세를 통해 받은 것이었다.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모든 정탐군들이 우리 여호와를 원망했다. 또한 모세와 아론도 원망하여 엎드러졌다. 그때 믿음으로 우리를 따른 자가 여호수아와 갈렙이었다. 그때에 갈렙에게 준 약속이다.
그 약속대로 우리는 갈렙에게 그가 밟는 곳을 유업으로 주었다. 그의 자손들에게도 그들이 밟는 땅을 약속대로 주었다.
갈렙과 같이 온전히 우리를 따르는 자가 기업을 얻을 수 있다. 갈렙은 우리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갈렙의 이름 뜻은 개(dog)다.
Numbers 14:20-24 바른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네 말대로 용서한다. 그러나 진실로 내가 살아 있고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상에 충만한 한, 내가 이집트와 광야에서 행한 내 영광과 이적들을 보고도 나를 열 번이나 시험하고 내 말에 순종하지 않은 이 모든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한 땅을 보지 못할 것이고, 나를 멸시한 자는 아무도 그 땅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으므로, 그가 갔던 그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그의 후손이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갈렙을 한국어인 개로 대체하면 위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내 종 개는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으므로, 개가 갔던 그 땅으로 내가 개를 인도하여 개의 후손이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개의 가장 큰 행동의 특징은 주인을 따르는 것이다. 개가 주인을 따르던지 무리의 우두머리를 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들은 충성심이라 말한다. 그러나 개가 리더를 따르는 근본적 이유는 생존이다. 함께 하여 자신의 무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찾아 행동한다. 늑대의 무리는 집단의 힘으로 살아간다. 하나하나가 강한 것이 아니라 리더 아래에 뭉쳐 집단의 힘을 발휘한다. 개는 늑대를 길들인 것으로 늑대의 특성을 일부 공유한다. 개는 늑대가 자기 무리의 리더에게 복종하듯 자신의 리더인 사람에게 복종한다. 개는 주인과 함께 하며 주인이 싸울 때 함께 싸운다. 그런데 리더인 주인이 쓰러지면 당황하고 도망을 치는 경우가 많다. 자연 상태에서도 대부분 강한 상대를 만나면 늑대의 무리는 흩어진다. 물론 훈련된 개들 중에는 주인이 쓰러져도 주인을 위해 싸우는 개들도 있다. 그런데 이는 본능이 아니라 훈련된 것이다.
늑대와 개의 행동 특징은 충성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 특징은 생존을 위해 정세를 파악하는 능력이다. 그 판단에 따라 생존을 위한 싸움을 리더를 중심으로 하고 또 물러나 도망을 가기도 한다. 승률이 높을 때는 함께 달려들어 상대를 제압한다. 늑대와 개는 자연계에서 최강자에 속한 동물들이 아니다. 혼자서는 오히려 약자다. 그런데 약한 것들이 모여 자신들보다 강한 동물을 사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최강자인 호랑이나 사자를 만나면 늑대들은 무리를 이루고도 이길 수 없다. 늑대와 개가 무리를 이루고 상호의존적인 이유는 바로 약함 때문이다. 혼자서는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백수의 제왕 호랑이나 갈기를 휘날리는 수사자와는 다르게 혼자서 숲을 호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약하기에 죽은 동물의 사체를 먹기도 하고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한다. 그런데 늑대가 강함을 나타내는 이유는 강자와 약자를 판단하고 자신의 능력과 겨루어 이길 상대인가를 분별해 내는 능력 때문이다. 그래서 지는 싸움은 하지 않고 오직 이길 수 있는 상대를 골라 이기는 싸움을 한다.
갈렙이라는 개가 선택한 것은 만군의 여호와다. 승부의 가름을 판단하는데 타고난 갈렙은 만군의 여호와의 옆에 있으면 언제나 이길 수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어떤 역경을 만나도 포기하지 않았다. 오직 우리가 무엇을 말하는지만 들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면 자신의 능력과 상관없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었다. 믿음이란 근거 없는 만용이나 계산 없는 무모함이 아니다. 우리를 앎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앎으로 우리의 편에 서므로 반드시 이길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데스바네아에서 이것을 알았다. 그래서 철옹성 같은 성벽과 가나안의 거대한 아낙 자손과 철전차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이길 수 없지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길 수 있음을 알았다. 이는 믿으려고 노력함이 아니었다. 사실을 확인함으로 아는 것이었다. 믿음은 이러한 것이다.
혹자는 오해하는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여, 실제로 없다고 생각하는데, 또는 불가능이라 생각하는데 이루어진다고 믿으려 노력한다. 그런데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단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믿음은 사실을 근거로 믿는 것이다. 당연히 강한 전능자가 옆에 있으니 아무리 강한 상대를 만나도 이길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명철은 여호와를 아는 것이고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경험하여 확인하고 아는 것을 말한다. 인격체인 우리를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를 경험하여 인격으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만나 영과 영으로 보고 우리의 존재를 아는 것을 말한다. 완전히 상대를 보고 경험하여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늑대나 개와 같이 승패의 판단이 빠른 존재는 최강자가 옆에 있는 것을 알면 무한한 승리를 확신한다. 그리고 무한한 믿음을 가진다. 왜냐하면 함께 하여 싸우는 자가 무한한 자이기 때문이다.
갈렙의 믿음은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청년은 지치지만 갈렙은 노년에도 지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갈렙은 늙었으나 우리는 늙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 믿음을 가진 갈렙에게 우리는 노년에도 청춘을 부어주었다. 그도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아 능력을 나타내게 하려 함이었다. 그래서 이방인인 그니스 족속 출신이라 이스라엘 저자들의 편견으로 성경에 많은 부분 기록되지 못한 갈렙이었지만 그의 등장은 언제나 읽는 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기를 갈망하게 한다.
그런데 아는가? 갈렙의 믿음의 비결은 충성도 인내도 끈기도 아니었다. 빠른 정세 판단으로 우리를 아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확신하고 앎으로 인한 담대함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믿음이 없고 의지가 약하며 실행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모두 우리(하나님)를 알라. 힘써 우리 알기를 구하라. 우리를 만나면 우리를 알게 되고 우리를 아는 자, 믿음의 용사요, 요셉과 같고 다니엘과 같으며 삼손과 같고 다윗과 같으며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을 것이다. 그들의 날에는 큰 침노가 있을 것이고 이 땅에 천국이 임할 것이다.
갈렙이 취한 헤브론은 어떤 곳일까? 헤브론은 나의 친구 아브라함이 거주한 곳이다. 나의 친구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랐다. 내가 줄 언약의 아들 이삭을 제외한 모든 것을 버렸다. 나중에는 심지어 이삭도 포기하라고 했을 때에 우리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번제로 바치려 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친구다. 히브리어 헤브론의 뜻이 친구다. 헤브론에 관한 성경의 언급은 서로 연관성을 가지며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Genesis 13:18 개정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Genesis 23:2, 19 개정
2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 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19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 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Genesis 35:27 개정
야곱이 기럇 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 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이방 그니스 족속이었던 갈렙이 취한 곳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거주했던 조상들의 땅이었다. 그곳으로 가는 베들레헴 에브랏 길에는 야곱의 사랑 라헬이 잠들었고 또한 헷족속에게서 산 무덤에는 모든 조상들이 묻혔다. 막벨라 굴에는 사라로부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모두 잠들었다. 이런 곳을 어떻게 이방 그니스 족속이 취했을까? 그리고 그는 왜 이방인이면서 가나안 정탐 때에 유다 족속의 대표가 되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는 이방인에 대한 선입견이 있다. 또한 유대주의자들의 선민사상과 그에 쇠뇌된 어리석음이 있다. 우리(여호와)는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를 구별하지 않는다. 이스라엘도 우상을 섬기던 데라와 같은 이방인에서 출발했다. 내가 데라와 아브람을 불러 아브람을 아브하람으로 만들고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은 것은 그들이 이방인이 아님도 그들이 우상숭배자가 아님도 그 이유가 아니었다. 내가 그들이 우상숭배자요, 우상을 파는 자였음에도 선택한 것은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원래 처지를 잊고 먼저 되었다 하여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방인들을 박해한다면 내가 어찌하겠가?
너희는 앞서 내가 기브온을 주도로 하는 히위족속들의 일부가 항복하였을 때 어떻게 그들을 대하였는지 보았다. 무엇보다 이방인이었다가 나에게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어찌 대하였는가? 알고 있다.
나 예수는 세상에 있을 때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Matthew 19:30 바른
그러나 많은 으뜸 된 자들이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이 된 자들이 으뜸이 될 것이다."
Matthew 20:16 바른
16이와 같이 마지막이 으뜸이 되고 으뜸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Matthew 20:20-28바른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께 다가와서 절하며 무엇인가를 요청하였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 중 하나는 주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말씀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요청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구나. 내가 마시려 하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그들이 말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시겠으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내 아버지께서 예비해 놓으신 자들의 것이다."
열 제자들이 듣고 두 형제들에 대하여 분개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을 곁에 부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그들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그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서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가운데서 큰 자가 되기 원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또 누구든지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기 원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이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왔다."
갈렙은 믿음의 조상들의 땅을 기업으로 얻었다. 또한 갈렙이 속한 유다지파의 왕 다윗도 헤브론에서 왕이 된다. 헤브론은 언약의 땅이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와 얻은 땅이었다. 조카(족하)인 롯도 떠나보내고 롯이 선택한 비옥한 소돔과 고모라의 반대편 산악 스텝지대에 정착했다. 그 땅은 고지대의 오지였다. 그리고 척박한 땅이었다. 양이나 칠 수 있는 척박한 땅 그곳이 아브라함이 선택한 땅이었다. 우리를 선택하여 아브라함이 얻은 곳이 오지의 땅이라니 그곳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하늘의 별과 같이 해변의 모래와 같이 수도 없는 자손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얻은 언약의 자손은 겨우 이삭하나였다. 죽음에 이르기 까지 얻은 땅은 막벨라 굴이 있는 헤브론의 밭이 전부였다.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를 선택한 아브라함은 오직 우리의 친구가 되었다.
갈렙이 헤브론을 취한 것은 조상들의 믿음을 소유했음을 보이는 표다. 이를 통해 갈렙의 믿음이 구원을 얻을 믿음임을 보인다. 또한 갈렙의 믿음이 조상들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갈렙은 조상들이 자기 고향과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 추위와 강도와 죽음의 위협 속에서 나를 따른 것처럼 이집트의 안락한 모든 삶을 버리고 우리를 따랐다. 노예와 같이 취급되던 이스라엘의 유다지파가 됨으로 이집트에서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안락함이 아니라 우리의 언약을 선택했다. 요셉을 통해 예언되고 아브라함을 통해 예언된 출애굽의 약속을 붙들었다.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실 언약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우리를 따랐다. 그래서 그는 예언대로 가나안 7 족속을 멸하는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 전쟁에서 조상들의 유업이었던 헤브론을 취하게 되었다. 그는 조상들과 같이 이 땅 나그네 삶에서 우리의 친구가 되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가 가라는 땅으로 가서 우리가 하라는 일을 했다. 그렇게 온전히 우리를 따랐다. 이 모습은 말년의 아브라함의 장성한 믿음을 닮았다. 그래서 이스라엘 중 아브라함의 집 헤브론을 기업으로 얻은 자가 되었다. 땅(유업)의 분배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의 기업을 취한 자는 바로 갈렙이었다.
조상들과 요셉을 통해 예언된 이스라엘 구원의 역사에 있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침노하여 빼앗는 전쟁을 이끈 리더는 여호수아였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서 조상들의 언약의 유업을 가장 정확하게 이은 자는 갈렙이었다.
Genesis 37:14 개정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떼가 다 잘 있는 여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세겜을 거쳐 도단으로 간 요셉은 결국 형들에게 잡혀 이집트로 팔려가게 된다. 요셉은 그날 아무 생각 없이 떠난 헤브론으로 그 오랜 세월동안 돌아가지 못할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조상들의 집을 떠난 요셉을 뒤 좇아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고향 헤브론을 떠나 이집트에서 요셉과 같이 나그네가 된다. 그리고 300여년 후에는 요셉과 같이 종이 된다. 또 요셉과 같이 이집트에서 우리(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 받으며 출애굽하게 된다.
Joshua 10:3-5 바른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헤브론 왕 호함과 야르뭇 왕 비람과 라기스 왕 야비아와 에글론 왕 드빌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였다.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와주시오. 우리가 기브온을 공격합시다. 기브온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들과 화친을 맺었기 때문이오."
아모리의 다섯 왕들, 곧 예루살렘 왕과 헤브론 왕과 야르뭇 왕과 라기스 왕과 에글론 왕이 모여 자기들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올라와서, 기브온을 대항하려고 기브온 앞에 진을 쳤다.
기브온을 공격한 이들, 곧 아모리의 다섯 왕들을 정복함으로 이스라엘의 침노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 이후 강력한 정복전을 통해 전체 가나안 지역을 빠른 시간 안에 점령하게 된다. 공격한 아모리의 다섯 왕 중에는 헤브론 왕 호함도 있었다. 또한 기브온 공격의 결과로 다섯 왕의 성과 국토는 점령을 당하게 된다.
이 점령은 후에 각지파별 점령지 분배에도 언급되는데 거기에서 유다지파의 점령의 완성처럼 기록된 것이 헤브론 점령이다. 그런데 이 헤브론 점령의 시초가 된 것이 바로 기브온 공격이었다.
Joshua 10:36, 39 개정
36여호수아가 또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에글론에서 헤브론으로 올라가서 싸워
39그 성읍과 그 왕과 그 속한 성읍들을 점령하고 칼 날로 그 성읍을 쳐서 그 안의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바치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드빌과 그 왕에게 행한 것이 헤브론에 행한 것과 같았으며 립나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같았더라
Joshua 11:21-22 바른
21그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의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다 없애고, 그들을 그들의 성읍들과 함께 진멸하였으므로,
22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아 있었다.
Joshua 12:7-10 개정
7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이편 곧 서쪽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에서부터 세일로 올라가는 곳 할락 산 까지 쳐서 멸한 그 땅의 왕들은 이러하니라 (그 땅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파들에게 구분에 따라 소유로 주었으니 8곧 산지와 평지와 아라바와 경사지와 광야와 네겝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라)
9하나는 여리고 왕이요 하나는 벧엘 곁의 아이 왕이요 10하나는 예루살렘 왕이요 하나는 헤브론 왕이요 하나는 야르뭇 왕이요
헤브론의 점령에 관한 것은 점령 당시의 상황을 담은 기록과 또한 그 기업의 분배 과정을 설명한 기록 등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헤브론을 실제로 점령한 자는 갈렙이지만 그 모든 것을 지휘한 자가 여호수아이므로 위의 기록들에서는 헤브론을 여호수아가 점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Joshua 14:13~15 개정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 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 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 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Joshua 15:13 바른
13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유다 자손 가운데서 기럇아르바, 곧 헤브론 성읍을 분깃으로 주었으며, 아르바는 아낙의 아버지였다.
Joshua 15:21~54 개정
21유다 자손의 지파의 남쪽 끝 에돔 경계에 접근한 성읍들은 갑스엘과 에델과 야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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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훔다와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과 시올이니 아홉 성읍과 그 마을들이었으며
Judges 1:10-12, 20 바른
10또 유다가 헤브론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에게 가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다. 헤브론의 이전 이름은 기럇아르바였다.
11그가 거기에서 드빌의 주민들을 치러 갔는데, 드빌의 이전 이름은 기럇세벨이었다.
12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점령하는 자에게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 하였는데,
20그들이 모세가 말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으며,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냈다.
갈렙에 의해 점령된 헤브론은 갈렙 자손의 유업이 되어 그곳에 갈렙의 후손들이 대대로 거주하게 되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거주하던 곳에는 갈렙 자손들이 영원히 거하게 되었다. 요셉이나 다윗의 계보를 가진 왕손들이 산 것이 아니라 이방인 갈렙이 그 기업을 잇고 그의 후손이 대대로 그곳을 차지한 것이다.
1 Chronicles 2:42 개정
여라므엘의 아우 갈렙의 아들 곧 맏아들은 메사이니 십의 아버지요 그 아들은 마레사니 헤브론의 아버지이며
1 Chronicles 2:43 개정
헤브론의 아들들은 고라와 답부아와 레겜과 세마라
헤브론은 지명이었지만 갈렙의 자손 중에는 자신들의 선조의 유업인 헤브론을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사람도 있었다. 갈렙의 자손들이 헤브론에 대한 마음이 남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Joshua 20:7 (개정_strong)
이에 그들이 납달리 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과
실수로 살인한 자들이 도망 가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성이 도피성이다. 이 도피성 중에 포함 된 것이 헤브론이다. 도피성은 심판당해야 할 죄인인 인간을 용서하고 구원하는 표다. 그런데 헤브론은 이 표들 중 하나로 선택되었다.
Joshua 21:10-12 바른
10레위 자손 가운데서 그핫 족속에 속한 아론 자손에게 첫 번째 제비가 뽑혔으므로,
11아낙의 아버지 아르바가 살았던 기럇아르바, 곧 유다 산지의 헤브론과 그 사방 목초지를 주었고,
12그 성읍의 밭과 촌락은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주어 그의 소유가 되게 하였다.
Joshua 21:13 (개정_strong)
제사장 아론의 자손에게 준 것은 살인자의 도피성 헤브론과 그 목초지이요 또 립나와 그 목초지와
Judges 1:20바른20그들이 모세가 말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으며,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냈다.
헤브론의 촌락과 밭은 갈렙 자손들에게 주어졌지만 그 주변의 초지는 레위 자손에게 주어졌다. 헤브론 촌락은 또한 살인자의 도피성이다. 살인자의 도피성이라는 말은 살인자들이 도피할 수 있는 도피처를 말한다. 이곳에서 살인자는 죽임을 당하지 않고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살인자는 평생 도피성 안에 갖혀 살아야 한다. 도피성을 떠나면 죽임을 당한다. 일종의 감옥이라 할 수 있지만 현대의 감옥과 같이 가혹하지는 않다.
그런데 이방인과 살인자와 레위인의 조합이 같이 붙어산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가? 너희들이 생각하는 거룩과 죄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우리는 살인자라도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용서한다. 그리고 거듭날 기회를 준다. 우리는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근본적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사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은 동일한 우리의 자식들이다. 단지 유괴 되어 원수에게서 자란 이방인은 아직 회개하지 못한 우리의 자식이다. 그런데 이방인이 회개하면 우리는 즉시 기브온 주민들이나 갈렙의 집안과 같이 환영하여 품에 품고 영원히 보살핀다.
자신이 어떤 죄를 과거에 저질렀어도 현재 우리의 자녀가 되었다면 겸손히 감사함으로 살면 된다. 죄를 지었다고 하여 죄인이 아니다. 현재에도 죄인으로 남아 죄를 지으면 죄인이다. 회개하여 죄를 이기고 현재 의를 행하는 자는 의인이다. 회개하여 거듭나면 죄를 짓고 싶어도 죄를 지을 수 없는 의인이 된다. 하늘의 아버지인 우리가 완전한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 진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있던 거짓신앙인들은 믿음이라 말하지만 믿음이 없다. 그들이 행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인간이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걸레와 같이 더러운 거짓의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참된 의로 돌아와 갈렙과 같이 기브온 주민들과 같이 나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누구나 레위인 중의 레위인인 제사장이 된다. 그렇게 된 자들은 믿음으로도 행함으로도 왕같은 제사장이 된다.
너희는 믿음이 변한 자가 행함이 변할 수 밖에 없음을 아는가? 나의 자녀는 나의 형상을 가지며 나를 닮은 그 마음의 본성과 행함 모두 그 형상의 능력을 나타낸다. 좋은 향을 내는 엠마 우드하우스 종 백장미가 향기가 없다면 그 꽃은 다른 종자다. 동일한 종자는 종자 고유의 색과 향을 가진다. 만일 이에서 벗어난다면 같은 종자가 아니다. 즉 가짜다. 말의 새끼는 말이며 소의 새끼는 소다. 그 종자에 따라 그 형질을 그대로 복제하여 가진다. 이와 같이 거듭난 믿음을 가진 자에게 거듭난 완전한 행실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하나님)가 기록한 성경에는 이를 상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앞에 산상수훈을 순서와 상관 없이 살펴본 이유도 이를 일부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경에 기록된 것을 다 본 너희는 무엇을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