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앞의 [[01.3.2.3.12. 사사들의 연대기 1]]에 언급한 사사기의 개요와 구조에 관해 계속 언급하려 한다.
사사기는 아내인 이스라엘의 음행에 대한 기록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에스겔 작가는 글을 쓰기 전 꿈을 꾸었다.
꿈속의 장소는 달동네였다. 절벽과 같은 경사에 시멘트 블록과 콘크리트로 지어진 동네였다. 에스겔이 꿈속에서 보니 자신의 옆에 있던 젊은 아내가 동행한 젊은 기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절벽의 끝에서 그 기자와 양손을 맞잡고 즐겁게 장난을 치며 뛰는 것이 보였다. 에스겔은 질투가 났지만 자신이 보는 상황에서 저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니라고 마음을 추스르려 했다. 그러나 마음속이 불편하고 그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도 최대한 마음을 들키지 않고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순식 간에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아내가 5층 높이의 시멘트 절벽 아래로 보였다. 떨어졌는데 떨어진 절벽에 기대어 앉은 모습이었다. 의식이 없는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위에서 쳐다보니 출혈이 없었다. 옆에 있는 기자를 보니 충격을 받았는지 땅에 드러누워 정신이 나가버렸다. 기자의 얼굴을 보니 얼굴은 보이지 않고 얼굴에 카메라 모양의 고무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그 덮개를 벗기고 얼굴을 보니 정신이 나가서 이상한 말을 주절거리고 있었다. 에스겔은 시멘트 절벽 아래로 내려가 보려 했지만 미로 같이 건설된 이곳에서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119에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전화는 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기자 녀석이 해주면 좋을 텐데. 나는 어떻게든 아내에게 내려가 보아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만 어지러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리고 꿈에서 빠져나와 의식의 세계에 들어왔다.
꿈에서 깨고 나니 이상했다. 꿈속에서 본 아내는 자신의 아내가 아니었다. 장소도 너무 낯선 곳이었다. 기자도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5층 높이의 절벽에서 떨어진 꿈속의 아내가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졌는데 피도 흐르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또 바닥에 떨어진 채로 누워있는 것이 정상인데 의식을 잃은 사람이 절벽을 기대고 앉아 있는 것도 이상했다. 떨어지자마자 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렇게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분석보다 먼저 머리와 가슴을 지배한 것은 절망적인 감정과 그 불운한 느낌이 현재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일 수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그는 그 상태에서 우리(하나님)에게 물었다.
"이 꿈이 제가 처한 현재의 상황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이렇게 묻고 나서도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닐 거야. 개꿈일 거야.'
우리는 에스겔의 마음에 감동을 부었다.
"어제 본 성경들을 보아야 해"
에스겔은 성경을 찾기 시작했다. 성경 구절들을 피곤해서 기록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기록들을 찾아 읽으려 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내용이 있었다.
'왕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사사기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에는 우리(하나님)가 왕이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사사들도 모두 왕인 우리의 명령을 출납하는 사원들이었다. 사사기의 1부는 이런 모습이었던 여호수아 세대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들이 아직 쫓아내지 못한 이방 민족과 그들의 우상과 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2부에서는 우리의 대리자인 사사들을 통한 구원을 다룬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들이 이방민족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왕이 없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왕이 우리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왕인 우리를 버렸다. 그래서 자신들은 왕이 없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사사기의 기자도 17장 이후에 계속 왕이 없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사사기의 왕이 없으므로]]라는 말이 등장할 때는 동심원구조가 보인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죄악의 근원적인 문제가 왕인 우리를 버리고 떠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2부의 가장 중앙에 있는 기드온에게 왕이 돼라 하고 또 그의 아들 아비멜렉은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왕이 필요하다고 가시나무와 같은 아비멜렉에게 왕이 돼라 했다. 이는 왕인 우리를 버리는 행동이다. 그리고 다른 왕을 구한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3부에서 이스라엘에 왕이 없다고 반복하는 것이다. 바로 왕인 우리가 이스라엘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왕인데도 왕이 없다고 하고 우리 외에 다른 왕을 구한다. 이것은 명백한 반역이다. 사랑하는 신랑을 향한 신부의 배신이다. 남편이 있는데 남편이 없다고 다니면서 다른 남편을 구한다면 그 여자는 음란한 여자이며 간음을 꿈꾸는 여자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이러한 모습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음란을 향해 달려 나갔다. 다른 왕을 구한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에는 왕이 생겨났는데 대부분의 왕들은 악하여 우리를 대적하고 백성들에게 폭정을 행했다.'
[[01.3.2.3.12. 사사들의 연대기 1]]의 후반부에 언급한 내용이었다. 그 순간 에스겔의 머리에 깨달음이 왔다.
'바로 이 마음이구나.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그래 간음이다. 간음. 그로 인한 질투로구나.'
그제서야 에스겔은 꿈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기저에 있던 감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질투였다. 아내가 외간 남자와 손을 맞잡고 기뻐서 뛰고 있는 장면 만을 보아도 솟구치던 그 감정, 심지어 그 감정으로 순식간에 아내가 떨어지자 고소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내가 떨어진 곳을 확인하는 순간 그곳이 5층 높이의 절벽이며 죽을 수도 있는 위급한 상황임을 인식하고 질투는 사라지고 아내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꿈속에서 그곳이 그렇게 위험한 곳인 줄 모르고 그냥 두 계단 정도 아래의 곳으로 아내가 떨어지는 줄 알았을 때는 질투로 인해, 그리고 그 순간 기자와 마주 잡은 손이 떨어지는 것으로 인해, 마음이 고소했다. 아내가 키스를 한 것도 아닌데, 상대를 껴안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순간적으로 질투가 났다. 그것도 꿈속의 아내는 모르는 여자였는데도 내 아내라는 설정 만으로도 질투와 분노가 솟았다. 그 감정은 사랑한다면 당연히 생기는 감정이었다. 이성이 그것이 억측일 수 있음을 말하고 있고 사실 관계를 묻거나 관찰하여 파악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데도 질투는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난다. 그것이 사랑의 증거다. 질투가 없다면 사랑이 아니다. 보통 여자들은 길을 걷다가 남편의 시선이 다른 여자를 향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한다. 특히 그 여자가 예쁘다면 말할 필요도 없다. 남편이 그 여자의 모자나 구두나 또는 그 여자의 특이한 행동을 관찰했을 수도 있는데도 일단은 질투로 인해 남편을 꼬집거나 등짝을 후려친다.
사사기는 음녀들의 음행록이다. 성경에서는 우리(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은 음행이라고 정죄한다. 또한 그 음행의 다른 이름은 우상숭배다. 앞에 언급한 사사기의 7 7 7 구조나 7 12 7의 구조를 살펴보면 그것은 음행의 기록임을 알 수 있다. 7번의 음행이 3번 반복되며 점차 그 죄의 깊이가 깊어진다.
1 부(삿 1:1-3:4)의 7은 7지파의 정복에 관한 것인데 저들은 정복을 완성하지 못하고 강한 이방 족속들을 남겨둔다. 자신들의 힘으로 상대할 수 없는 적들을 남겼다. 예를 들어 유다는 갈렙이 있어 기럇아르바(헤브론)와 기럇세벨(드빌)을 점령했다. 그럼에도 유다 지파는 골짜기 또는 평지의 강한 족속들을 쫓아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저들이 철전차를 소유한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각 지파는 쫓아내지 못한 이방 족속들이 있었다. 저들이 정복하지 못한 이유는 자신들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오직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점령하라고 명령한 우리가 함께 하는데 자신들의 힘의 연약이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이방족속을 약속의 땅에서 쫓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사사기 도입부인 1부(삿 1:1-3:4)의 기록은 레위를 제외한 12 지파 모두의 정복과 실패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오직 7 지파의 정복과 실패만을 기록했다. 의도가 있다. 레위 지파가 빠지더라도 요셉 지파가 둘이므로 12 지파가 된다. 그래도 오직 7 지파의 정복 전 만을 간략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7이라는 수는 언약의 족속들에게는 태초의 창조의 완성 후 주어진 안식의 7의 의미를 가져 완전함 또는 완성을 뜻한다. 이는 성경의 구전이나 또는 기록된 성경을 읽음으로 대대로 전달된다. 히브리어나 영어의 성인으로 자라는 것이 완전함을 나타내는 것 또한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데 완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발달을 완성했음을 뜻한다. 이는 태초의 창조가 끝나듯이 인간의 성장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물론 태초의 창조와 그 완성은 완벽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 완성과 그로 인해 일을 쉼을 뜻하는 안식의 7은 완전을 뜻한다. 이를 대적하여 일어난 패역의 7도 또한 반대의 뜻으로 완성과 완전을 의미한다. 처음 가인에게 우리가 표를 주고 가인을 죽인 자에게 7 배의 저주를 부과한 것은 악한 의미가 아니었다. 단지 가인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7배의 벌이란 그 벌이 가혹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가인을 죽이려는 자들에게 두려움을 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전에 설명한 대로 라멕은 그 수를 자신의 죄악을 자랑하는 데 사용하여 가인을 죽인 자에게는 벌이 7배이지만 자신을 죽인 자에게는 77배의 벌이 있으리라고 했다. 이로 인해 언약의 백성들에게 7은 선의 완성과 완벽을 의미하는 7도 되지만 타락의 극한과 그 끝에선 극악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곳 사사기에서 백성들의 불순종과 우상숭배는 극에 달했다. 반복하여 죄를 범하고 불순종하다가 광야에서 죽은 출애굽 세대의 극악과 여호수아를 잊은 세대의 극악과 죄악의 절정에 이른 라멕의 극악은 동일하다. 믿음이 없어 이방 족속들에 대한 완전한 정복에 실패한 이스라엘은 결국 이방족속들과 결혼하고 이방의 신을 섬긴다. 그들은 강 건너편에서 자신들의 조상들이 음란하게 거짓 신들을 섬겼던 것처럼 또다시 다른 신들을 섬긴다. 그러므로 저들은 광야나 애굽의 백성과 같이 자기 행로에서 엎드러질 자들이다. 애굽의 백성과 같이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수장되거나 또는 광야를 통과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는다. 저들은 결코 죽음을 뜻하는 홍해를 건너지 못한다. 또한 육신의 소욕의 죽음이 일어나는 광야를 통과하지 못한다. 저들은 죄악의 육신이 살아 즉 죄성이 살아 역사함으로 결코 의인들의 땅인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그렇게 수고하여 가나안을 얻게 하고 우리를 따를 수 있는 우리의 나라에 인도하였는데도 또다시 애굽과 광야로 돌아가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곳에서 사랑했던 것들을 음란히 사랑한다. 그 모습이 마음속에 있으면 탐심이고 그 탐심으로 우상들에게 빌면 우상숭배다. 둘 모두 사랑하는 우리를 배신한 음란한 행동들이다. 저들의 간음은 끝이 없다. 저들은 스스로 우리를 떠났으므로 저들의 죄는 극악에 이르러 완전한 7에 이르렀다. 만약 저들이 차라리 애굽에 있던 자들이었다면 그 죄악이 적었을 것이다. 우리는 애굽에서 저들의 조상들을 부를 때에 그들의 불순종을 참아주고 벌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저들이 죄악의 세상속에서 우리를 잊은 자들이었기에 저들을 참아주고 기다리며 저들에게 우리가 누구인지 죄악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죄악을 벗고 어떻게 거룩한 우리의 백성으로 살 것인 지를 가르쳤다. 그런데 여호수아 세대의 후대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의 기적과 홍해의 기적과 수많은 기적을 듣고 보았음에도 또 우리를 잊고 음란하게 다른 신들의 하체를 탐하여 자신들의 하체를 벌거 벗겼다. 저들의 음욕은 끝이 없으며 그 간음은 수를 헤아릴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스라엘의 무수한 간음과 그 간음을 용서하고 호세아(예수님)와 같이 사랑으로 품는 우리(하나님)의 끝없는 구원을 기록한 책이다.
2부(삿 3:5-16:31)는 앞에 기록한 사사기 개요의 목차에서 AA.로 시작하는 번호가 매겨졌다. 1부는 A.였고 2부는 AA.로 나타내어 그 타락이 두 배로 가중되었음을 나타내었다. 물론 3부는 AAA.로 더 증가된 죄악의 가중을 나타내었다. 더블 A와 트리플 A를 사용하여 영어식의 제곱과 세제곱의 의미를 사용했다.
2부(삿 3:5-16:31)는 12 사사가 등장하는데 모든 사사의 등장의 배경에는 이방 민족의 압제가 있다. 또한 그 이방 족속의 압제를 부른 것은 이스라엘의 음란이 있었다. 저들이 우리를 버리고 음란히 다른 것들을 탐하기 시작하고 그 간음한 우상들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지 못했기에 이방 족속들의 약탈에 시달렸다. 일반적인 나라나 부족들도 전쟁에 시달리고 약탈에 시달리지만 극동의 연해주를 시작으로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중동과 북아프리카로 이어지는 유목민족들의 삶의 터전에서는 약탈이 일상이며 삶의 중요한 구성 요소다. 저들은 척박한 초원이나 광야나 사막을 유랑하면서 부족한 것들을 농경민족들로부터 약탈하는 방식으로 거의 대부분의 역사를 살아온 자들이다. 이집트나 이스라엘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지역들이다. 그래서 이집트는 유목민으로 이루어진 용병들을 고용하여 자신들의 곡식을 지켰다. 그런 와중에도 유목민들에게 나라를 잃은 기간도 상당했다. 지금 남아 있는 이집트인들은 나일강 하류 삼각주의 원주민들이라기보다는 그곳을 침략하여 점령했던 유목민들의 후예들이 대부분이다. 이집트인들의 황금으로 된 관과 장신구들, 새와 늑대와 태양을 숭배했던 흔적들과 고인돌과 그의 확장인 돌로 쌓은 거대하고도 높은 무덤들은 저들의 원 선조가 유목민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저들의 석관은 저들의 선조가 유목민임을 암시한다. 이스라엘도 돌로 된 동굴 무덤에 장례를 치렀는데 이도 유목민의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유목민은 처음에는 구하기 쉬운 나무나 돌을 이용하여 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세력을 이루면 석실로 된 무덤을 만들고 그 자체를 관으로 여겨 그곳에 장례를 치른다. 이러한 무덤의 형태가 북방이나 고구려, 고조선 그리고 북방 부여와 흉노의 후예들인 백제와 신라에도 나타난다. 저들이 한 곳에 정착하기 시작하면 유목민의 발전된 철기와 비교하여 많이 조악한 발달되지 못한 형태의 토기가 나타나는데 그 토기로 무덤을 만들어 옹관묘를 만들기도 했다. 돌로 쌓던 것을 벽돌로 대체하기도 했는데 백제의 무덤들이 그러했다. 또한 후대에는 무덤에 회칠을 하고 벽화를 그렸는데 고구려나 가야의 무덤이 대표적이다. 사사기의 이방족속들의 압제는 이러한 유목민족적 환경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사사기의 기록에 나타나는 타락의 특성이 있는데 죄는 대를 거듭하며 쌓여 그 죄악이 관영해진다는 것이다. 처음 시작한 죄와 대를 거듭하며 쌓이는 죄는 그 농도도 달라진다. 그에 따라 사람들의 일상에서 나오는 죄의 농도도 달라진다. 처음에는 단순히 이방 족속들과 혼인하여 그들의 우상을 섬기는 정도였다면 후대로 갈수록 우리의 율법은 망각하고 자기 죄악의 길을 달리며 이방의 신들을 음란히 섬긴다. 그에 따라 도덕적 음행도 그 악함이 더 짙어진다. 단순히 이방의 우상을 숭배하고 그에 대한 구원이 사사들에 의해 주어지던 것과는 달리 기드온을 정점으로 사사들조차 죄악으로 빠져든다. 기드온은 약탈한 금 귀고리를 백성들에게서 취하여 에봇을 만들고 그것을 이스라엘이 우상으로 섬겨 종교적 음란을 행하게 했다. 백성들이 기드온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우리(하나님)가 왕이므로 자신은 왕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을 추종하는 백성들에게서 전쟁의 승리에 대한 예물로 금을 취하고 그것으로 우상을 만들었다. 또한 왕과 같이 많은 아내를 두고 70 명의 아들을 낳았다. 결국 그 아들 중 하나가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나머지 형제들을 죽였다. 그리고 왕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제했다. 망대에 올라 있던 백성들을 불태워 죽인 그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다. 그 반역의 아들인 아비멜렉은 여자가 던진 맷돌에 머리가 터져 죽었으나 그 타락은 계속 이어졌다. 사사 입다는 창기의 아들이었으며 불량배들과 어울리는 자였다. 그는 율법을 몰라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는 어이없는 일을 범했다. 삼손은 그보다 더 타락하여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며 나실인이나 이스라엘인들이 피하여야 할 사람이나 짐승의 사체를 만지는 것도 서슴지 않고 죽은 사자의 사체에서 생겨난 야생벌꿀을 취하여 먹었다. 이방 족속의 여인을 사랑하여 결국 그 여인으로 인해 나실인의 머리를 잘리고 눈이 뽑히는 일을 당했다. 백성들을 타락과 음란에서 돌이켜야 할 사사 자신이 타락하여 이방 여인을 사랑하고 그 이방 여인으로 인해 나실인의 거룩을 잃어버렸다. 삼손이 사랑한 이방 여인들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 많은 이방 여인들을 사랑한 삼손의 타락은 이스라엘 타락의 나락을 보여준다. 사사들이 이렇게 율법을 망각하고 타락하니 백성들의 타락은 더 극에 달했다.
3부(삿 17:1-21:25)는 트리플 A(AAA)로 표기하여 타락의 절정을 나타냈다. 이곳에는 이스라엘의 타락을 보여주는 7개의 이야기의 플롯이 있다. 바로 7번의 음행의 기록이며 우리의 길을 거역하며 자기의 타락을 달리는 7번의 자기 길이 있다.
처음에는 종교적 음란이 등장하는데 우상숭배다.
첫 번째 우상숭배는 한 가정에서 일어났다. 미가의 집안에서 기드온과 같이 에봇을 만들어 자기들이 은을 부어만든 우상을 섬겼다. 심지어 레위 소년을 취하여 에봇을 입히고 자기들의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았다.
두 번째는 미가의 우상을 탐내어 우상과 레위 제사장을 탈취한 단 지파의 음란에 대한 기록이다. 음란한 우상숭배는 이제 개인과 한 집안을 넘어 지파 단위로 확대가 되었다. 이 우상 숭배는 이스라엘이 멸망당할 때 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이 종교적 음란이 심해지며 이스라엘은 자연히 도덕적으로도 음란해졌다.
첫 단계의 음란은 개인적 차원의 것이었다.
레위인이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는데 그 첩이 음란을 행했다. 간음을 행한 그 여인은 남편에게 잘못을 고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두 번째 단계의 음란은 도시적 차원의 것이었다.
그 음란한 여인을 레위인이 설득하여 돌아오는 길에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 성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그 간음을 행했던 첩이 윤간을 당했다. 극심한 윤간을 당한 여인은 결국 너무 시달린 탓에 기운이 빠져 죽었다.
세 번째 단계의 음란은 지파적 차원을 넘어 이스라엘 국가적 차원의 것이었다.
음란한 여인의 주검을 본 레위인 남편은 참람하게도 자신의 아내의 시신을 열 두 토막을 내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보냈고 열 두 지파는 결국 베냐민 지파를 집단 학살했다. 또한 자기 딸들을 베냐민 지파에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렇게 하여 첫 왕 사울이 나올 지파의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 모든 일을 행할 때에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일들을 저질렀다. 심지어 자신들의 이러한 집단학살에 참여하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을 멸했다. 자신들의 악행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칭찬해야 할 것인데 집단학살을 거부한 의인들을 학살했다. 그리고 베냐민을 위한 대책으로 내놓은 것도 납치와 강간이었다. 자신들 스스로의 결정과 맹세가 틀렸으면 회개하고 베냐민 형제들과 다시 통혼하면 될 것인데 자신들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실로의 딸들을 베냐민 지파가 납치하여 강간하고 아내로 삼도록 했다. 이는 집단 납치와 집단 강간으로 결국 전쟁에서 보일 수 있는 가장 극악한 전쟁범죄다.
이스라엘은 우리(하나님)를 떠나 타락함으로 그 음란을 더하였고 그 영의 음란은 육신의 음란으로 나타나 온갖 더러운 죄악이 이스라엘에 관영하였다. 저들의 죄는 라멕의 죄와 같으며 저들이 행한 추잡한 납치와 강간과 살인은 라멕의 죄를 능가하는 것으로 홍수 이전의 타락과 같았다. 이들의 타락이 너무 극악하여 우리는 마지막 3부에서는 저들의 행위에 상관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상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저들이 우리의 도움을 거부하고 우리에게 묻지도 않았다. 저들은 회개하지도 않았으며 그래서 우리가 저들을 구원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사사들이 없었다.
이것이 인생들의 상태요, 인생들의 모습이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더 성결하여 저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저들도 동일한 죄인이다. 저들도 결국 멸망할 백성이지만 내가 선택하였다. 저들을 특별히 생각한 것이 아니다. 저들을 통해 열방에 구원을 선포하기 위함이었다. 저들의 죄악을 인하여 저들을 멸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나 예수가 갈 길을 예비하기 위해 저들을 참고 참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들을 사랑했다.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들인 저들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으로 인해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천대동안 축복한다. 천대는 마지막 심판이 올 때까지 이어져도 채워지지 않을 후손의 대수이다. 천대라는 것은 결국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말이다. 어떤 의인의 자손이든지 그렇게 축복한다. 결국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러한 의인이 하나씩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모든 인생들을 축복한다. 굳이 따지자면 너희 현생 인류는 모두 의인 노아의 자손들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를 축복하고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이를 말함은 나의 사랑이 선택된 자들만을 향한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혈통이 이스라엘인으로 태어났다 하여 저들이 선택된 민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 나를 사랑하는 자들은 이방인이라도 축복된 선민이 되며 심지어 고자라도 의인의 회중에 들 수 있다. 자신의 과거가 어떠하였든지 나에게 오면 그 이전의 모든 더러움을 제하여 버리고 거룩한 나의 피로 세탁한 세마포의 흰 옷을 입혀 나의 자녀로 삼을 것이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로 삼아 거룩한 나라를 상속하게 할 것이다.
나의 의도는 너희 죄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너희가 돌이켜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능력을 부어주는 것이다. 진정 새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면 단지 나의 은혜를 구하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위로부터 능력이 임하여 너희는 이전과는 다른 새 피조물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 현재 너희가 다니는 뾰족 지붕집에서 말하는 거짓된 거듭남이 아닌 진정한 거듭남이 너희를 새롭게 할 것이다. 뾰족 지붕집에서는 여전히 사기꾼들이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 거듭났다는 표를 주며 머리에 물을 묻혀 그것을 세례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묻겠다. 너희 세례 받은 자여 너희에게는 거듭남의 능력이 있느냐? 너희 세례 증서가 너희 거듭남의 능력을 나타내어 주고 있느냐? 너희 입교는 너희 뾰족 지붕집에 들어가는 증서냐 아니면 그것으로 진정 우리(하나님)의 집에도 들어올 수 있는 것이냐? 나의 집에 들어온 자는 나의 아들이며 그는 나의 형상을 가지며 나의 DNA를 소유하여 그속에서부터 거룩함이 흘러 나온다. 진정한 증거는 이것이며 방언과 은사가 증거가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귀신들에게서도 온다. 너희는 절의 중들이 방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느냐? 너희는 무당들이 귀신들이 도둑질한 능력을 빌어 기적을 행하는 것을 아느냐? 그러나 저들이 따라 할 수 없는 것은 심령의 거듭남이며 우리로부터 흘러나오는 거룩의 실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