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2.3.11. 개(갈렙)의 연대기

by 에스겔

01.3.2.3.11.1. 갈렙


여호수아 이야기의 마지막은 갈렙의 연대기를 통해 대신하려 한다. 또한 사사기의 시작도 이곳에서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사사가 누구인지 기억하는가? 사실 여호수아서의 마지막과 사사기의 시작은 갈렙에 의해 연결된다. 가나안 정복의 완성은 갈렙의 [[헤브론]] 정복에 의해 마무리된다. 이는 시간 순서의 정확한 마지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갈렙의 헤브론 정복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는 본문들은 지파별 땅의 분배나 지파별 땅의 정복에 관한 글들로서 시간적 순서로 배열된 본문들이 아니다. 앞에서 이미 갈렙에 관한 이 부분을 언급했다. 그런데 그 본문들은 시간 순서가 아닌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화자의 의도에 따라 편집된 것이다. 이는 화자를 감동한 우리(하나님)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다. 갈렙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 왜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시작이 그의 연대기와 관련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설명하겠다.



01.3.2.3.11.1.1. 이방의 개 갈렙


갈렙은 이방인이라 개와 같이 취급받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후대에 유대인들은 갈렙의 이름은 잘 언급되지 않는다. 신약에서 갈렙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을 가졌던 위대한 믿음의 영웅이었는데 그의 이름은 왜 신약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을까? 이는 갈렙이 이방 족속인 그니스 족속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못한 믿음을 가졌던 기드온이나 바락, 입다는 등장을 하지만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을 가졌던 갈렙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방인들과 그 혈통이 혼잡되었다 하여 이방인 아내와 그 아이들을 내보냈던 에스라 시대의 이스라엘을 보는가? 또한 앗수르의 혼혈정책으로 혼혈이 된 사마리아의 백성들을 개 취급 했던 유대인들을 보는가? 혼혈이었던 사마리아 지역의 산발랏과 도비야가 왜 예루살렘의 회복을 방해했다고 생각하는가? 포로귀환한 유태인들은 그들을 혈통이 혼혈이 되었다 하여 개 취급을 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회복하는 곳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이스라엘의 족보에도 올라가지 못했다. 물론 그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이방 신을 섬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회개하고 돌이키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불만을 품고 유대인들을 방해한 것이다. 그런 역사가 이어져 신약시대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개라고 했다. 그러나 나 예수는 그들에게 가서 사마리아인들을 개로 취급하지 않았다. 남편 5 명과 동거인 1명을 둔 문란한 사마리아 여인을 내가 어떻게 대했는지 너희는 기억하는가?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나에 대해 어떻게 했는가? 사마리아를 수도로 두었던 옛 북 이스라엘의 시골이었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했다. 나 예수도 나사렛 출신인 연유로 개잡종 취급을 받았다. 대부분 갈릴리 출신이었던 나의 제자들도 그래서 개잡종 취급을 받았다. 현재 너희들이 쓰는 언어로 3류 듣보잡보다 더 깔보고 멸시하는 말이었다.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으며 인간으로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개라고 했다. 영어로 The son of bitch나 한국어로 개새끼라고 번역해야 정확한 사마리아인이나 나사렛 사람에 대한 어감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행태는 믿음이 아니다. 단지 자신들의 혈통을 자랑스러워하는 인종 우월주의며 이는 우생학에 기초한 말도 안 되는 교만이다. 게르만(German)의 히틀러가 왜 유태인을 학살했겠는가? 바로 민족적 교만 즉 우생학에 기초한 순혈적 순수 게르만의 탁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경쟁상대였던 유태인을 말살시키려 한 것이다. 유태인들은 자신을 자랑하며 그 자랑으로 나 예수도 죽여버렸으며 이방인과 혼혈들을 개 취급 하며 구원에서 제외하고 멸시했던 대로 자신들이 같은 취급을 당했다. 바로 자신들이 행한 대로 그대로 돌려받은 것이다. 자신들이 행한 짓을 그대로 행하는 독일인들에 의해 동일한 취급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에서 유태인들의 피를 도저히 개잡종도 아닌 완전히 희석하여 그들이 생각하기에 사마리아인들이나 갈릴리인들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개잡종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그들은 자신의 혈통을 자랑할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개잡종의 완전판인 자신들의 개잡종 혈통을 가지고도 우월함을 느끼며 자신들이 섬기고 사랑하여 구원해야 할 아랍인들을 멸시하며 전쟁을 벌이고 심지어 인종청소까지 하고 있다. 이들은 독일의 나치가 그러했듯이 자신의 민족 아래 모든 세계가 굴복하고 굴종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들이 종교 우월주의에 빠져 모든 세상을 이슬람의 발아래 굴복시키려는 이슬람교도들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저들은 신약시대에 나를 죽였던 그 모습 그대로다. 20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저들은 변화되지 못했다. 여전히 추잡하고 악랄한 나치와 같은 그대로의 민족 우월주의에 도취되어 있다. 이들의 모습을 보라 과연 이들이 완전한 이방 혈통인 그니스 족속 갈렙을 인정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연유로 갈렙은 신약의 저자들이 인용할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01.3.2.3.11.1.2. 믿음의 개 갈렙


하나님의 친구(헤브론), 하나님의 동행자였던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옆을 충실히 마지막까지 따랐던 반려견(히 갈렙=개)이었다. 아브라함 즉 하나님의 친구였던 아브라함의 거처를 정복한 자 그곳을 취한 자였다. 갈렙의 이러한 행적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모든 민족이 실패하였을 때 믿음을 보인 단 두 명 중 하나가 갈렙이었다. 이보다 더한 믿음을 보인 자가 있었는가? 그는 다윗과 같은 믿음의 용사였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Joshua 15:14 개정
14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그 세 아들 곧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

다윗은 골리앗을 죽였다. 그런데 골리앗과 같은 거인 셋을 한곳에서 죽인 자가 있는데 그가 갈렙이다. 위의 구절에서는 쫓아내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 표현을 잘못 해석하면 죽이지는 못하고 쫓아내었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러나 쫓아내었다는 표현은 여호수아서의 주제에 부합하도록 변형된 표현이다. 갈렙이 헤브론을 취하는 장면은 이스라엘의 각지파의 각 가문에 유업(유산)을 분배하는 과정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유업에 관한 관점으로 기록되었다. 쫓아내었다는 표현은 단지 그들에게서 유업을 빼앗았다는 표현에 대한 의역이다. 즉 아낙의 세 아들 세새와 아이히만과 달매가 더 이상 헤브론을 유업으로 가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야라쉬(ירשׁ ירשׁ)라는 단어의 히필형으로 다른 자를 죽여 그의 기업을 빼앗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남의 땅을 빼앗고 그것을 대대로 유산으로 물려주려면 그 상대를 멸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그곳에 분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이의 땅을 빼앗았다는 것은 죽여 멸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좀 억지스럽다고 한다면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이스라엘이 점령하는 방식은 죽여 멸하는 것이다. 저들은 심판의 때가 이르러 심판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죄와 우상을 이스라엘이 멀리하기 위해 진멸당하였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점령 방식이다. 그러므로 거인 셋을 쫓아내었다는 것은 그들을 죽인 것이다. 결정적으로 사사기 1: 10절에 갈렙이 그들을 죽였음을 기록하였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였지만 갈렙은 골리앗과 같은 거인 셋을 죽였다. 그는 끝까지 그곳이 어디이든 우리를 따랐다. 결국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성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대적을 멸했다. 그들이 철옹성과 철전차를 가졌고 또 그중에 거대한 거인들이 있어도 갈렙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따위 거인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개와 같이 우리가 가는 어느 곳이든 우리의 편이 되어 싸웠다. 결코 패할 수 없는 전능자의 옆에서 영원의 젊음을 소유하고 싸워 이기고 이기고 이겼다.


01.3.2.3.11.1.3. 여호수아시대의 정복을 완성하는 자 갈렙


01.3.2.3.11.1.3.1. 헤브론 정복자: 안식을 가져온 자


앞에 이미 언급된 헤브론 정복 사건은 안식을 가져왔다. 그 땅에 전쟁이 그치고 안식이 있었다. 전쟁을 끝내고 쉬게 되었음이 안식을 뜻한다. 물론 이 표현이 가나안 전체에서 전쟁이 끝났음을 의미한다고 확정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표현일 수 있다. 그런데 동일한 표현이 여호수아서에 나온다.


Joshua 21:43-45 바른
43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모든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그곳에서 살았고,
44여호와께서 그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고, 그들의 모든 대적 중에 그들을 당해 낸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셨기 때문이다.
45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집에 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이루어졌다.


Joshua 22:4 바른
4이제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형제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이제 너희도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편에서 너희에게 준 너희 장막과 너희 소유지로 돌아가거라.


Joshua 23:1 바른
1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신 지 오랜 세월이 지났으며, 여호수아는 나이가 들어 늙었다.


여호수아의 정복에 의해 이스라엘에는 안식이 찾아왔다. 그런데 개인의 정복에 관련하여 쉼을 언급한 것은 갈렙의 정복이 유일하다.

이외에 여호수아서에서 안식이나 평안을 말한 것은 다음 구절이 유일하다.

Joshua 10:21 개정
21모든 백성이 평안히 막게다 진영으로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이르렀더니 혀를 놀려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하는 자가 없었더라

기브온 성읍이 이스라엘과 화친 언약을 맺은 후에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들과 전투가 벌어졌고 그 승리를 확정 지은 후에 기록된 것이다. 해와 달이 멈추어 서고 아모리 족속을 멸하기까지 그 현상이 지속되었다. 성경에서 이러한 기록이 남은 것은 이곳이 유일하다. 그런데 이 모든 전투의 원인이 기브온이 이스라엘을 속여서 화친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러한 이방인들이 위험에 쳐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밥을 세워 달려가 구원했다. 그리고 그 구원의 현장에서 태양은 기브온 위에 머물렀고 달은 적들이 있는 아얄론 골짜기에 머물렀다. 기적을 행한 우리의 의도가 분명히 보이는가? 우리는 기브온 위에 해를 비추며 그들을 지킨다. 그리고 기브온을 치려는 원수들 위에 달로 머무르며 우박을 내려 그들을 쳐 죽인다. 우리(여호와 하나님)는 혈통이 아닌 믿음을 본다. 우리는 이스라엘 순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백성을 사랑한다. 노예가 되어서라도 우리에게 돌아오기를 원했던 이방 족속 기브온을 사랑한다. 또한 이방인이라도 믿음으로 돌아온 갈렙을 사랑한다. 우리는 이들이 있는 곳에 강력한 능력으로 임하여 그들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그렇게 하여 나의 사랑하는 자들을 대적할 아무도 남겨 놓지 않는다. 그 결과 그곳에는 평강이 임한다. 더 이상 전쟁이 없는 것이다. 감히 아무도 두려워 쳐다볼 수 조차 없게 만든다.

그것이 안식이요. 평안이다.


01.3.2.3.11.1.4. 기럇세벨의 정복자: 웃니엘


Joshua 15:15-19 개정
15거기서 올라가서 드빌 주민을 쳤는데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16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17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함으로 갈렙이 자기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18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
19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 샘과 아랫 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갈렙은 그나스 또는 그니스라 불리는 족속 출신의 이방인이었다. 그런데 갈렙의 가족은 유다지파에 편입되어 살았다. 그의 아우의 이름은 그나스였다. 자기 족속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이스라엘에 편입되었지만 자신들의 출신이 어디인지를 기억하였다. 민족적 정체성을 가진 것이다. 너희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러한 이방 민족적 정체성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빠져들었던 순혈적 우생학에 빠져 이스라엘의 순수혈통과 이방인의 혈통을 비교하여 그 자체를 신앙의 기본적 출발점으로 생각한다. 이스라엘의 순혈을 가졌다고 하여 우리 여호와에게 인정받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은 순전히 어리석은 발상일 뿐이다. 혈통이 아니라, 신앙과 삶에서의 거룩이 문제다. 신앙은 이스라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여호와)를 사랑하고 믿고 돌이켜 새피조물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갈렙의 가문은 이러한 신앙을 가졌고 결국 갈렙의 조카 웃니엘도 그 신앙을 가지고 기럇 세벨을 점령했다. 의는 믿음에 있지 혈통에 있지 않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유대 순혈적 우월주의에 빠져 멸망했다.


01.3.2.3.11.2. 요셉과 유다


요셉은 유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져 이집트로 팔려갔다. 결국 그곳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인물이 되었고 형들과 아버지를 건져내었다. 유다는 요셉이 팔려간 후에 질투에 눈이 멀어 동생을 죽이려 한 형제들을 떠나 홀로 지내기도 했다. 그곳에서 아들들을 낳았고 후에 이들이 유다 족속의 뿌리가 된다. 바로 베레스와 세라였다.

우리는 요셉에게 은혜를 베푼 유다를 기억하고 그의 자녀들도 축복했다. 이렇게 하여 요셉과 유다는 우리의 경영에 사용되었다.

첫 리더는 항상 요셉에게서 나왔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항상 유다에게서 나왔다. 이 관계는 혈통에 대한 나의 기억함에 기반을 두지만 결국 후대에 믿음으로 그것을 취하는 자들을 통해 결정적으로 나타난다. 모든 이스라엘이 불신앙으로 엎드러져 밤새도록 통곡을 할 때에 믿음으로 서 우리(하나님)를 마지막까지 따른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아야 한다. 그래야 믿음으로만 세워져 땅을 점령하여 천국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저들은 형제의 관계로 어느 위치에 있던지 믿음으로 용맹을 발하여 그 세대를 정복한다.


01.3.2.3.11.2.1. 여호수아와 갈렙(웃니엘)


여호수아와 갈렙의 관계가 그러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여호수아의 통치 이후 두 번째로 이스라엘을 다스린 자가 바로 기럇세벨의 정복자 웃니엘이다. 저는 갈렙의 조카였으며 갈렙의 믿음을 유업으로 받은 자였다.

모세는 가나안 정복자가 아니었다. 모세는 광야의 사람이었다. 가나안의 첫 정복자이며 이스라엘의 첫 정복자는 여호수아다. 그리고 그 이후 가나안의 첫 재판관(사사)은 갈렙의 조카 웃니엘이다.

이 두 가문의 관계도 우리가 요셉과 유다를 기억하고 은혜를 베푼 것이었다. 여호수아는 요셉의 장자 에브라임 지파다. 그리고 갈렙과 그의 조카는 유다 지파다.


01.3.2.3.11.2.2. 사무엘(사울)과 다윗


여호수아는 정복자였으며 통치자였다. 그의 역할이 그러하였다. 정착 이후의 여호수아의 역할은 후대에 오는 사사들이나 왕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 위에서 백성을 지배하는 왕은 아니었다.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에는 웃니엘을 시작으로 사사들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사사의 시대의 마지막을 감당하고 이스라엘에 왕정을 시작한 인물이 사물엘이다. 사무엘은 에브라임 지파 엘가나와 한나의 아들이다. 사무엘은 선지자였으며 또한 제사장의 직무도 감당했다. 사무엘은 레위지파는 아니었으나 대제사장 엘리의 아래에 있으면서 결국 엘리와 그 아들들이 징벌로 죽자, 제사장의 임무도 감당했다. 또한 사무엘은 그를 공식적으로 사사라 부르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의 사사의 역할도 감당하였다. 사무엘은 소위 신학자들이 말하는 기름 부음 받는 삼중직 모두를 감당했다. 왕(사사), 제사장,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이렇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메시아라 부른다. 사무엘은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자신은 정확하게는 왕도, 제사장도, 선지자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섬기는 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뿐이었다. 이스라엘의 참된 왕은 바로 우리(여호와 하나님)다.

타락한 백성들이 우리를 대신할 왕을 구하였을 때에 그 왕을 세운 자도 사무엘이었다. 이방의 왕들의 능력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탁월한 사무엘이 있었고 그에게 전능으로 함께 하는 우리가 참 이스라엘의 왕이었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구한 것은 이방의 착취자와 같은 왕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악함을 인해 왕을 세웠다. 그 첫 왕은 요셉의 동생 베냐민 지파에서 나온 사울이었다. 요셉 지파의 사무엘이 동생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서 왕을 세웠다. 그리고 그가 실패하자, 유다지파의 다윗을 왕으로 세웠다.

여기서도 요셉과 유다에게 베푼 은혜가 드러난다. 나의 은혜는 천대에 이른다.


01.3.2.3.11.2.3. 남왕국과 북왕국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타락하여 왕국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다. 남왕국은 유다와 베냐민으로 구성되었고 자신들의 땅이 없었던 레위를 제외한 모든 지파가 북왕국이 되었다. 남왕국은 처음 출발할 때에 따르던 유일한 지파인 유다의 이름을 따라 유다 왕국이 되었다. 그리고 북왕국은 이스라엘 전체의 이름인 이스라엘 왕국이라 불리게 되었다.

앞에 사무엘 시절에 요셉 계열(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실패하자 우리는 유다 지파의 왕을 세웠다.

이제 유다 지파의 왕이 타락하자 왕국을 둘로 나누어 북왕국은 요셉 지파에게 주었다. 북왕국의 첫 수도는 세겜이었는데 이곳은 에브라임 산지에 있었으며 앞에 언급한 대로 세겜은 요셉 자손의 유업이다. 야곱이 요셉에게 준 유산이다. 북왕국은 이곳에서 출발하여 여러 곳으로 수도를 옮기다, 결국 사마리아를 도성으로 삼았다. 북왕국의 수도가 있던 곳은 대부분 에브라임 산지 즉 요셉의 장자의 영역이었다.

솔로몬의 타락에 대한 징계였지만 이곳에서도 우리는 요셉과 유다를 향한 은혜를 기억했다.


01.3.2.3.11.2.4. 예수(여호수아)와 유대


나 예수는 유다 지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다 지파의 요셉이었고 어머니는 레위 지파의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친족관계였으며 둘은 모두 레위 지파였다. 나는 왕의 가문에서 태어나 왕이었으며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난 제사장이었다. 그리고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 한량없이 성령이 부어짐으로 선지자의 역할도 담당했다. 나 예수는 원래 하나님이기에 이러한 것들이 필요 없으나 인간으로서 인간을 대신한 메시아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게 삼중직을 감당하도록 기름 부어져 나는 그리스도(메시아)다.

그리스도는 나의 직분명이다. 나의 이름은 예수다. 예수라는 이름은 한국어의 번역이고 원래 헬라어로는 이에수스이며 히브리어로는 여호수아다. 나 예수(여호수아)는 유대인들에게 갔다. 그래서 유대에서 복음을 전하고 유대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에 나의 영인 성령을 부었다.

나의 복음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을 순서로 전파되었다. 나 예수는 요셉 지파의 여호수아의 이름을 가지고 유다족속을 구원했다. 결국 구원받은 유대인들은 갈렙과 같이 사도가 되어 나 예수의 정복을 이어가며 열방을 정복했다. 이 관계도 여호수아와 갈렙의 관계와 같다. 바로 요셉과 유다의 관계다.

나의 구원 계획은 의인들의 의에 대한 은혜를 기억한다. 구원의 역사 속에 약속한 천대에 부어지는 은혜를 붓는다.


01.3.2.3.11.2.5. 혈통을 넘어선 구조


성경에 나타난 관계의 구조에는 혈통을 넘어선 구조들도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엘리야와 엘리사다. 이들의 관계는 마치 세례요한과 나 예수의 관계의 구조가 보인다. 이러한 형태는 위에 언급한 요셉과 유다 즉 여호수아와 갈렙의 구조와는 다른 형태다. 이 관계는 모세와 여호수아와의 관계의 구조와 유사하다. 하나는 율법에 속한 자의 모습을 보인다.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세례요한이 이 위치에 속한다. 그리고 후자는 은혜에 속한 자의 모습을 보인다. 여호수아, 엘리사, 나 예수가 이 위치에 속한다. 이는 거듭나지 못한 율법에 속한 자, 즉 육에 속한 자와 거듭나 은혜에 속한 자, 즉 영에 속한 자의 차이를 보인다. 하나는 종이며 후자는 아들이다.

그런데 요셉과 유다의 관계의 연장선에 있는 관계는 둘 모두 은혜에 속한 자다. 또한 거듭난 자이며 영에 속한 자다. 또한 둘 모두 아들이다.

이 관계는 둘 모두 가나안을 정복하는 자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러하며 나 예수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의 관계가 그러하다.


01.3.2.3.11.3. 여호수아서와 사사기


01.3.2.3.11.3.1. 반복과 연결


여호수아서의 마지막과 사사기는 연결되어 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정착을 위해 땅을 분배했다. 그런데 각 지파별 정복에 대한 기록은 땅을 분배하면서 잠시 언급될 뿐 여호수아서 자체에는 그 기록이 별로 없다.


이 분배의 기록도 구조가 있다.


처음에는 두 지파 반에 대한 기업을 분배한다. 이는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인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에 대한 것이 아니다. 동편에서 기업을 얻을 아홉 지파 반 중 두 지파 반에 관한 것이다.

그 처음은 레위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레위의 기업은 우리다. 그래서 저들에게는 분깃이 없다. 단지 저들이 거주할 거주지만을 주었다. 또한 그 거주지는 이스라엘 전체에 흩어져 있다. 저들이 이스라엘을 가르쳐 우리를 따르게 하려 함이었다.

실질적인 두 지파 반은 유다와 에브라임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였다.

그리고 실로에서 마지막 남은 7곱지파에 대한 분배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분배를 마친 후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을 귀향시킨다.

그 이후에는 여호수아가 백성의 리더들과 후에 모든 백성을 세겜에 모아 마지막 당부를 한다. 그 내용은 이스라엘이 우리(하나님)를 떠나면 그들에게 죄악을 저지르는 원수들에게나 내릴 재앙이 내린다는 경고가 포함된다. 경고의 목적은 저들이 우리를 따름으로 우리의 보호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 사랑하여 사는 것이 정상적인 삶이 아닌가? 그 관계를 떠나 가출하여 유괴범의 손에 놓이면 고통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 고통을 과연 징계라 하여 반항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자이겠는가?

그 이후 여호수아는 죽는다. 엘르아살의 죽음과 요셉의 뼈에 대한 장사가 언급되고 여호수아서는 막을 내린다.


사사기에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요단 서편에 대한 각 지파의 점령전이 있다. 7 지파의 점령전이다. 그런데 7 지파에게는 점령하지 못한 지역이 있다.

그리고 사사기 2 장에는 믿음이 없어 점령하지 못한 지역의 이방인들과 혼인하며 그들의 우상과 죄악을 받아들인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가 주어진다. 그리고 여호수아 세대의 경건한 리더들이 죽는다. 그 이후 이스라엘은 타락하여 징계를 받게 된다.


01.3.2.3.11.3.2. 구조


이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7 지파의 기업 분배(수 18~19장)
B. 배신에 대한 경고(수 23~24장)
C. 여호수아와 요셉, 엘르아살의 죽음(수 24:29~33)

a. 7 지파의 기업 정복과 실패(삿 1:1~36)
b. 배신에 대한 경고(삿 2:1~5)
c. 여호수아 세대 리더들의 죽음(삿 2:6~10)

그리고 이 부분에서 발견되는 반복된 언급은 갈렙의 헤브론 정복과 웃니엘의 드빌이라 하는 기럇세벨 정복이다. 이 둘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결국 경건한 세대의 죽음 이후에 이스라엘은 타락했다. 그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놓여 속국의 노예로 살았다. 그 후 웃니엘이 사사로 등장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이렇게 요셉과 유다에 대한 은혜는 후대에도 연결되어 그 효력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것은 여호수아와 그에 이어지는 웃니엘의 구원으로 나타난다.

여호수아서는 천국의 정복이며 사사기는 믿음으로 천국에 거하는 삶을 보인다. 그런데 사사기에는 다시 거듭나지 인생들은 이 땅에 천국을 주어도 그곳에 살 수 없음을 보인다. 그래서 구원의 절박함과 저들의 절망적 상태를 위해 대신 죽어줄 구원자의 필요성이 점진적으로 증폭된다.

그리고 이 절박함은 다윗을 출현하게 하였다. 그리고 결국 다윗이 예표하는 나 예수로 이어지게 된다.

사랑하는 자여 내가 원하는 것은 네 영혼이 잘 됨과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는 것이다. 사랑은 결코 상대의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가 스스로 죄악과 패역을 길을 가며 악인으로 살아 그 결과적 고통을 맛본다면 사랑하는 자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과연 누가 그것을 원하겠는가? 심지어 그 사랑하는 자가 재판관이나 왕이어서 상대에게 공의의 심판을 내려야 한다면 그 마음이 기쁠 것인가? 그러한데 상대가 그 지경이 되고서도 깨닫지 못하고 그 형벌을 내려야 하는 사랑하는 자를 원망한다면 그 사랑하는 자는 어찌해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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