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의 시작은 모세의 죽음으로 말미암았다. 한 인생의 사명이 끝나면 다른 인생의 사명이 시작된다. 여호수아는 이전에도 그 믿음으로 이미 이스라엘에 등장했다. 그러나 모세의 죽음으로 모세의 시대가 끝났을 때에야 그는 자신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자신의 용맹으로 믿음을 증명했다. 모세와 아론조차 그 믿음을 저버린 상태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켰다. 또한 여호수아의 동료, 갈렙도 그 믿음을 지켰다. 앞에 갈렙의 믿음에 관한 언급을 하였는데 모세오경과 여호수아서에 공통적으로 사용된 표현들이 있는데 그 표현이 네가 밟는 모든 땅을 너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에게 우리(하나님)가 준 언약의 표현이다. 그런데 이 언약을 받은 자들이 창세기와 여호수아서에 등장을 한다. 처음 사용된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이었다. 또 다른 두 약속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주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의 그 선지자로 사람들에게 추앙되는 모세는 이 언약을 받지 못하였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이 장성하여 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된 자였다. 그 당대에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듯했지만 믿음으로 그는 미래에 올 모든 약속들을 이미 취하였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리에까지 나왔다. 바로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칠 때에 증명된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이 여호수아와 갈렙도 온전히 우리를 따랐다. 아브라함은 유목민 세계에서 자신의 친족을 떠남으로 매일 살해 위협에 놓이게 되는 삶을 살았다. 그 유일한 이유는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결국 그 삶의 결실로 죽음을 이기는 믿음을 가졌다. 또한 여호수아와 갈렙도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우리를 따라왔다. 온전히 순종했다. 죽기까지 순종한 나 예수의 길을 저들도 따랐다. 왜냐하면 저들의 안에 있었던 영 즉 성령이 나 예수의 안에 있던 영과 동일한 영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졌던 이들이 바로 가나안을 취한 것이다. 처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나안으로 왔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두 번째 가나안에 진입을 한 것이다. 처음 진입한 자는 그곳에서 죽음을 이기고 믿음을 지켰으나 그가 얻음 것은 미래의 약속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미래를 얻었고 두 번째 진입한 자들은 그 결실을 얻어 가나안의 모든 것을 정복하여 얻었다. 첫 번째 침노한 자는 믿음으로 그곳을 얻을 약속을 받았고 두 번째 침노한 자들은 동일한 믿음으로 그곳을 얻었다. 이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이러하였는데 네가 밟는 모든 땅을 네 기업으로 주겠다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기업이 없었다. 기업을 무를 자도 없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가나안에 머물렀고 겨우 한 아들을 얻었다. 또한 막베다 굴의 매장지를 얻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것 같던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얻었다. 겨우 백세에 아들을 하나 얻었지만 그는 우리(하나님)를 믿음으로 우리를 기업으로 얻었다. 지나던 어떤 유목민의 무리에게 어느 날 어느 시에 죽임을 당할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브라함은 내가 지시한 땅 가나안을 떠나지 않았다. 어떤 자들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여동생이라 속이고 그 아내를 빼앗기고도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그를 비난한다. 그러나 너희가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한 적이 있는가? 너희는 지나다 연약한 무리를 보면 침노하여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강간하여 아이를 낳는 도구로 사용하고 아이는 종으로 삼는 유목민의 무자비한 전통을 이해하고 있는가? 약탈과 침략이 일상이 된 저들의 삶에서 단신으로 그곳을 다니는 자는 자신의 아내가 아니더라도 양 떼나 소 떼로 인해 언제 죽음에 처할지 알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원수들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힘인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 모든 선택은 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우리(하나님)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브라함에게 책망의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그가 그러한 비굴한 상황에 처하게 된 이유가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과연 아브라함과 같은 상황에 놓이는 선택을 우리를 위하여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 이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 세상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은 죽음인데 그 죽음을 이긴 자들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 믿음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약속을 취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밟는 모든 땅, 즉 아브라함이 밟았던 모든 땅을 유업으로 얻었다. 오늘날 나는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명을 수행하여 의를 이루고 또 육신을 벗고도 하늘나라를 얻을 자들을 볼 수 있겠는가? 저들은 살아서도 나의 나라에 속하여 우리의 의를 이루고 죽어서도 우리의 나라에 들 것이다. 이제 믿음의 용사들이여! 앞으로 다가 올 어둠의 시대에 그 용맹을 발하라.
여호수아는 그 믿음이 말하여 그 믿음이 스스로 증명하였다. 그는 믿음으로 가나안을 정복하였다. 약속의 땅의 이름을 가나안이라 부르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가나안이라는 이름은 함의 아들의 족속들로 타락하여 멸함을 받은 악인들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가나안이 아니라 새 이름 이스라엘로 불러야 한다. 여호수아서의 전반부는 여호수아가 직접 이끄는 국가규모의 침략 정복전이었다. 이 전쟁으로 국가규모의 승리를 확정하였다. 더 이상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이스라엘을 그 땅에서 쫓아낼 수 있는 자들은 없었다. 그렇게 정복을 하고 후반부(수 13장 이후)에는 기업을 분배하여 각 지파들이 자신들의 믿음으로 남은 지역들을 정복하도록 했다. 전반부는 여호수아가 직접 수행한 것이고 후반부는 여호수아가 명하여 각 지파들이 수행한 것이다. 그 수행의 과정에서 갈렙의 믿음이 여호수아 14-15장에 등장한다. 이러한 분배가 끝나고 여호수아는 여호수아 1장에서 요단 동편에 이미 기업을 얻었으나 전체 이스라엘을 위하여 정복전을 펼쳤던 두 지파 반을 자신들의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바로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였다. 저들은 지금까지 취하였던 전리품들을 들고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언약의 성취다. 모든 지파의 기업이 분배됨으로 언약이 성취된 것이다. 믿음으로 이스라엘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농경지를 유지하기 위해 남겨 둔 잔당들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아직 적들이 남아 있었으나 이미 정복은 끝이 난 것으로 보고 저들을 돌려보냈다.
여호수아는 여러 프레임의 양괄 대칭 구조를 가진다. 여호수아 자체 내에서는 여호수아의 등장과 여호수아의 죽음이 양괄 대칭 구조를 가진다. 또 위에 언급한 두 지파 반의 참전과 귀향이 양괄 대칭 구조를 가진다. 또한 전반부의 정복과 후반부의 지파별 정복 명령이 서로 마주 보며 대칭 구조를 가진다. 또한 모세의 소명 장면과 여호수아의 소명 장면이 그리고 모세가 신을 벗었던 것과 여호수아가 신을 벗은 장면이 모세와 아론의 죽음과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의 죽음이 대칭을 이룬다. 또한 요셉이 세겜에서 애굽으로 잡혀감과 다시 요셉의 유골이 세겜으로 돌아옴이 대칭을 이룬다.
이 모든 대칭들은 언약의 단계적 성취와 약속과 그 약속의 성취로서 의미를 가진다. 이에 관해 언급할 것이 있어 또 이 긴 여호수아의 연대기를 마치지 못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우리가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준 후 오랜 세월을 살았다(수 23:1). 그런데 여호수아서에는 정복 이후 여호수아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리더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조차 없다. 단지 오랜 세월을 살았다는 단 한마디가 기록되어 있다. 여호수아서의 마지막은 다른 기록이 없다. 성경은 한 사람의 인생이나 그 인물의 고난과 역경 그리고 승리를 그리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니다. 여호수아서의 목적은 약속된 구원이 이루어져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땅에 정착하여 안식을 누리게 되었음을 이스라엘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정복 전에 참전한 세대와 그 후대들에게 어떻게 그 땅을 우리 여호와가 그들에게 주었는가에 대해 영원히 기록으로 남겨 알리고 그들이 또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그 안식을 누리기를 바라는 우리의 당부를 담았다.
여호수아의 마지막 말은 간단했다. 사실 여호수아가 길게 말한 것은 지파별 땅의 분배에 관한 것이었다. 그 이후 오랜 세월을 보낸 후 자신의 마지막이 이르자 백성의 리더들을 먼저 불렀다. 그 말을 요약하면 애굽에서부터 수많은 은혜를 베풀고 이스라엘을 구원한 우리(하나님)를 자신이 죽은 후에도 따르라는 말이었다. 그것을 어기면 다른 죄악의 족속과 같이 멸함을 받을 것이니 그리하지 말고 자신이 여호와를 다른 것처럼 백성들도 따르라고 명했다. 그 이후 다시 백성 전체를 세겜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동일한 말을 했다. 앞의 리더들에게 한 말은 여호수아 자신이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뒤에 백성 전체에게 말한 것은 우리의 말은 전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뒤에 우리의 말을 전달하였다고 기록된 문장이나 앞의 장로들에게 여호수아 자신이 한 말이라고 기록된 문장이나 그 내용이 같다. 강 건너편의 신들과 가나안의 신들을 따라 타락하여 멸망당하지 말고 오직 아버지인 우리를 성실히 따를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호수아 자신과 자신의 집은 여호와 우리를 따를 것인데 너희는 어찌하기를 원하느냐고 묻고 있다. 이는 간절함을 담은 표현이다. 그 당시 세겜에 있었던 성소의 옆에 돌을 세워 증거를 삼은 것도 그 간절함의 표현이다. 이러한 모습은 죽음을 앞둔 아비가 자식을 두고 가야 하는 심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의 간절한 기대대로 이스라엘이 우리와 함께 하고 우리가 지시하는 길을 따라 순종하였는가? 그렇다. 여호수아 세대의 장로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저들이 경험한 우리를 기억하고 우리와 함께 하고 우리의 길을 따랐다. 우리가 리더를 훈련시키고 그 리더를 통해 무리를 이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사람의 믿음으로 시작하여 그 믿음이 전파되어 그 세대에는 우리가 땅에 우리의 나라의 침노를 본다. 그리고 그 침노의 결과는 평안과 안식이며 생명이다. 오늘도 우리는 이 땅의 갈렙을 찾고 있다. 나 여호수아(=예슈아=예수)는 오늘 나를 따를 충성된 믿음의 개 갈렙을 찾는다. 나와 함께 이 세대를 이끌고 이 세상을 침노할 자 누구인가?
신명기의 끝은 아론과 모세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여호수아서의 끝은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신명기는 모세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게 한 당부다. 출애굽의 여정을 돌아보고 그 가운데서 얻어야 할 교훈을 말했다. 그 교훈은 이스라엘의 생명인 우리와 함께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생명이다. 보호자와 함께 해야 이 험악한 세상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호시탐탐 노리는 유괴법의 손아귀에 언제 떨어질지 알 수 없다. 원래 내 백성은 애굽에 노예가 되어 있었다. 세상의 왕에 의해 노예가 된 것은 무력으로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마음으로 이 세상 임금, 마귀에게 종이 되면 빼어내기가 어렵다. 내 백성들이 약속된 땅에서 다시 마귀의 종이 된다면 심각한 문제다. 약속의 땅에서 원수에게 유괴되어 노예가 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래서 우리(하나님)는 모세를 통해 우리의 백성들에게 자신들에게 임했던 우리의 은혜를 기억하게 했고 또한 앞으로 우리의 은혜가 어떻게 임할 것인 지에 대해 말했다. 이렇게 마지막 당부를 마치고 모세는 느보산에 올라 죽음을 맞았다. 광야에서의 사명을 끝낸 모세의 마지막은 새로운 시작을 예고했다. 바로 광야를 지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다. 이로서 모든 광야의 세대가 죽음을 맞이했다. 또한 그 죽음을 마지막으로 이제 새 세대의 정복이 시작된다. 하나는 몽학선생인 율법 아래서의 삶을 상징하고 또 하나는 믿음 안에서 천국을 침노하는 삶을 상징한다. 또 모세와 여호수아는 그러한 삶의 예표일 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도 그러한 삶을 살았다. 이는 믿음을 따라 인생이 동일한 이 땅을 살아가지만 전혀 다른 나라에 속하여 살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모세는 죽기 직전에도 타인을 원망하는 삶을 살았지만[^1] 여호수아는 평생을 타인들을 위하여 전쟁을 하고도 한마디 자랑도 없이 오직 그들을 사랑하고 염려함으로 그들도 자신의 삶을 보고 여호와 우리를 따를 것을 명하였다. 하나는 원망하는 이스라엘과 같이 원망하며 광야를 헤매었지만 하나는 불가능의 상황에서 난공불락과 거대한 거인들과 철병거들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하나는 율법에 속한 자요 하나는 오직 믿음의 의에 속한 자다. 이를 통해 천국의 정복자 왕의 모습을 그렸다. 그래서 나 예수는 세상 왔을 때에 세상을 구할 왕의 이름을 따라 나의 이름을 지었다. 여호수아 그의 이름은 나의 삶의 어떠함을 예표하는 이름이었다. 나는 구원자다. 나의 백성을 자신들의 죄에서 구원할 왕이다. 나 예수가 침노하는 영토는 사람들의 마음 밭이다. 오늘도 나의 침노는 계속되고 그 침노 앞에 믿음으로 나올 자들을 찾고 있다. 여호수아가 리더가 되고 갈렙(히 개, dog)이 따랐던 것과 같이 오늘도 나 예수를 개와 같이 충성 되게 따를 자를 우리(하나님)가 볼 수 있겠는가? 이제 누가 우리와 함께 하겠는가?
[^1]: 모세는 자신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다고 반복적으로 원망한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죄를 숨기고 또 심지어 깨닫지도 못하는 전형적인 죄인의 모습이다. 자신도 백성들과 함께 가데스 바네아에서 원수들로 인해 엎드러져 밤새 통곡을 하고서도 자신의 믿음 없음으로 받은 광야의 40년 형벌에 대해 백성들을 원망하고 있다. 이는 태초의 완전한 인간 아담도 타락 후에 보인 모습으로 어쩔 수 없는 핑계 하는 인간의 화인 맞은 양심의 결과다. 사람들이 위대하다 하여 또 그가 이 땅에서 일으킨 기적이 크다 하여 그가 하나님 앞에서 큰 자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