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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ma hong Jul 03. 2020

이 이야기는 10개월간의 사랑 이야기- 두 번째

나의 이야기와 소설의 경계선

 그는 변태였다. 확실히 변태였다. 사장은 내가 서빙을 하러 테이블을 돌아다닐 때면 자꾸 내 엉덩이를 주시했다. 그리곤 늙은 지인들과의 티 나는 귓속말로 나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유일한 취미인 듯 보였다. 그는 내가 아르바이트를 관두면 갈 곳이 없다는 것과 사장의 권위를 이용해 조금 가지고 논 다한들 나는 그만둘 배포도 없는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아일랜드에도 그런 저질스런 사람은 있었다. 오늘 주급 받는 날인데 언제쯤 주실 수 있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네 표정이 마음에 안 들어 라고 짧게 끊어 말했다. 희한하게 다른 영어는 안 들려도 저런 류의 영어는 참 잘 들린다. 무시, 거절, 욕, 인종차별. 언제나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주급을 미루는 태도에 신고를 할 까하다가 한 주만 더 버텨보자라는 마음으로 피곤해서 표정관리가 안됐나 봐요 죄송해요 라고 대충 말하곤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지윤아, 오늘 좀 만나. 마이크.. 아니 마이크라고도 부르기 싫다. 그 새끼가 오늘 또.."

 

친구에게 토시 하나 빼먹지 않고 얘기하려다 보니 집으로 가는 길을 잘못 든 거 같았다. 여기가 어디지 싶은 순간 저 멀리 카페가 보였다.


 "어..?"


 한 번은 퀴빈이 일하는 카페에 가고 싶어 반나절 동안 리피강 근처를 돈 적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분명 강 앞에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강을 낀 오른쪽, 왼쪽 거리를 모두 다 돌아봐도 그가 일하는 카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앞만 보고 걸어가면 될 일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혹시나 앞머리가 망가질까 봐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퀴빈이 일하는 카페 문 앞에는 여전히 STAFF WANTED라 쓰여 있는 낡은 공고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짙게 쓰인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옵튼. '지윤아, 옵튼으로 와.' 나는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고등학교 시절, 문득 연기학원을 다닐 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났다. 배우는 단어를 잘근잘근 씹어 먹을 줄 알아야 해. 알았지? 나는 이제 배우 지망생도 아니고, 그때는 이런 상황에 써먹을 줄 모르고 배웠던 거였지만 당장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게 생겼으니 힘껏 발음해 본다. 옵튼. 퀴빈은 지난날의 고결한 태를 박제해 논 듯, 누군가의 메뉴를 여유롭게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됐다. 그는 똑같았다.      


 “Hi.”

 “Hi, Do you have ice latte?”

 “Well, we don’t.... hold on.”      


밖에서 볼 땐 그저 고급스럽게만 느껴졌던 옵튼에 들어서니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비 오는 5월의 더블린과 옵튼은 꽤 잘 어울리는구나. 나는 이내 기분이 이상해져 버렸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온 건지 모를 심한 이질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와 나 사이에는 지극히 평범한 음료 주문 대화가 이어질 뿐이었지만, 나는 오늘 겪은 일의 잔상 때문인지 어딘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더블린에는 아이스 라떼가 없다. 특히 개인 카페는 늘 그랬다.


 ‘또라이는 있어도 아이스 라떼는 없구나. 그래, 어떤 건 한국에서 당연하고 여기서는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지.’      


나는 파란색인지 초록색인지 도통 헷갈리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Then, Can I get a flat white?”

 “Sure.”     


 퀴빈은 친절했지만 동시에 그렇게 친절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마 내가 이 곳에 며칠 머물다 떠나는 아시안 여행객쯤으로 생각했으리라. 적어도 앞으로 내가 이곳의 단골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겠지. 그를 정식으로 처음 마주한 지금, 나는 조금 더 서글서글하게 굴지 못하는 내 성격이 싫었다. 이제 보니 그는 하얀색 니트를 입고 나에게 줄 플랫 화이트를 만들고 있다. 나는 저렇게 하얀 옷을 입고 일하면 에스프레소는 안 튀려나 쓸데없는 걱정에 꼬리를 물어본다. 고데기는 절대 먹을 것 같지도 않은 저 곱슬머리가 그의 삶에 어떤 에피소드를 가져다줬을까. 퀴빈은 나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물음표인 사나이가 돼버렸다. 파란 눈을 가진 아이리쉬. 그리고 타고 난 듯한 성의 없는 걸음걸이와 미성의 목소리. 내가 가까이서 본 퀴빈은 그랬다.


 “It’s your flat white.”

 “아, Than.. Thank you.”     


우리의 두 번째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건 지난날의 나의 수고와 머릿속을 꽉꽉 채웠던 상상들이 채 현실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아... 멍청이.’      


 저 멀리 브릿지 한가운데서부터 헐레벌떡 달려오는 지윤이가 보였다. 그녀는 나의 구세주가 되어 줄 수 있을까. 나는 보이지도 않을 그녀에게 어색한 손 인사를 하곤 따뜻해 보이는 플랫 화이트를 한 모금 마셨다. 옵튼을 외우느라 경직되었던 입술 주변이 풀리고 마음도 편안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시선에 시간이 잠시 멈춰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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