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눈꽃 05화

은방울꽃

언젠가 맞이할 행복

by 서율

***

설하라는 여자아이는 밤이 깊어서 다시 버스정류장에 돌아왔다. 거리에 상가들은 진작에 문을 닫았다.

-울었나 봐.
외로워 보였다. 슬프고, 또 힘들어 보였다.


그녀의 내면을 잠시 들여다봤다. 내면엔 좁은 새장 갇힌 그녀가 보였다. 너무 좁아서 숨쉬기도 힘들다. 조금 더 편안하게 있고 싶을 뿐인 어린 소녀였다. 숨도 쉬지 못한 채로 힘듦을 앓고 있는 모습, 순수함이 그을려버린 소녀의 모습들, 웃는 모습조차도 쓸쓸해 보이는 얼굴이다.


그녀는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끔찍해.
보는 나조차도 괴롭게 하는 기억이었다. 낮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이 버스정류장에 앉은 그녀가 가엾게 느껴질 정도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처참한 모습이다.


그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요동쳤지만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땅히 새겨줄 따스한 추억이 없어 보였기에 무엇인가 알아내야만 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단 1초라도 웃는 날이 있어. 당연하게 추억이라 부를 것이 있을 거야. 다만, 다른 짐들에 깔려 묻혀버린 것뿐이지.
고민에 빠진 나에게 작은 눈송이는 작은 힌트를 던져주었다.
그녀를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어디 있을까….
새장의 멀리에 희미하게 보이는 풍경, 새장에서 빠져나온 새가 자유롭게 날아오르며 살아갈 만한 곳이다. 투명한 방울 같은 꽃잎을 가진 꽃 한 송이와 함께 펼쳐진 들판이었다. 드넓은 들판을 아직 찾지 못하고 소녀는 여전히 갇혀있다.
들판에 담긴 그녀의 모습은 가족들과 함께 들판과 비슷한 모습의 공원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행복한 설하가 분명했다.
화목하게 가족들과 함께하는 순간.
-찾았어, 행복한 추억.


곧바로 그녀의 추억을 담은 눈꽃의 향기를 퍼뜨렸다. 어릴 적의 추억과 함께 현재의 설하에게 위로하는 부모님의 모습도 함께 담았다. 그리고 내가 설하에게 전하는 한마디 자연스레 담았다. 가까이에 있는 그녀는 눈꽃의 향기를 가장 먼저 느낄 수 있었다.
흔한 위로들이 와닿지 않을 걸 아니까 그런 말은 전하고 싶지 않다. 그냥 한마디 해준다면 “오늘도 수고했어”라고 전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정류장에 앉아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있었다. 추억이 되새겨진 직후 그녀는 조금 울먹이다가 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조용히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거센 숨소리를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사정을 다 아는 나는 그녀가 그저 어린아이로 느껴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이해한다고 자부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녀가 안쓰럽게 느껴지는 마음은 확실했다. 토닥여주고 싶었다. 힘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잠시 힘차게 달려오고 나서 쉬어가는 것뿐이라고 뻔한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저 여린 아이는 푸른 새벽에 젖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허무하고 애달픈 꽃망울과 같은 소녀는 모질게 내린 눈물에 잠겨 아직 피지 못했을 뿐이다.
들판에 핀 은방울꽃, 투명하게 비치는 방울이 ‘틀림없이 찾아올 행복’을 전해주는 꽃이다. 분명히 그녀에게도 그 은방울꽃이 피어나 언젠가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되새겨준 추억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녀에게 되새겨진 추억은 그녀가 추락할 절벽이 아닌 날아오를 새파란 하늘을 보도록 해줄 거야. 분명히 혼자가 아니었고 지금도 주변에 위로를 건네줄 누군가가 남아있다는 걸 알려 줄 거야.


작은 눈송이는 추억이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될 거란 말을 건넸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
최근 몇 년간 끝나지 않는 겨울을 그녀는 힘겹게 버텼던 거고, 불안정한 시간 속에 일말의 따스함마저 잊혀져서 이제서야 받는 위로가 달갑지 않았던 거고, 그녀는 실은 위로를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어린 소녀다.
-마음껏 울고, 다 털어내고, 쉴 만큼 쉬다가 또 힘내줘.

***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는 설하는 문득 어릴 적에 추억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설하는 가족들과 나들이 겸 공원에 놀러 갔다. 걸리는 것도 없이 마음껏 뛰어놀았다. 그날 근처에 있던 뒷산에 오르며 처음 보는 꽃을 발견한 설하가 무슨 꽃인지 물었더니 아빠가 “은방울꽃”이라고 답해주었다. 둥글게 펼쳐진 꽃들과 달리 올망졸망 피어있는 은방울꽃이 당시에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나는 호기심 많은 활발한 아이였을 때가 있었구나, 설하는 생각했다.


그 이후엔 가족들이 늘 건네던 위로와 응원이 와닿았다. 설하가 일상에 지쳐있을 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위로해 주었던 사람은 가족이었다. 왜 그 따스한 말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실은 가족들과 사이가 나쁜 것도 의지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주변의 응원이 스스로를 해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에 가둬 홀로 괴로워했을 뿐이었다.
애초에 자신은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저 설하를 위해 모두가 한 발자국 뒤에서 지켜봐 주던 것뿐이었다. 안도감에 터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혹사했던 것도, 주변에서 건네준 위로와 응원을 뒤틀린 생각으로 받아들인 것 모두 너무나 미안할 뿐이었다. 이제라도 의존할 곳이 있다는 걸 알았기에 그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다.

설하가 한참 울고 집에 들어가자 그녀의 부모님이 그녀를 기다리고 계셨다. 설하는 폰의 전원을 꺼놓았기에 연락이 닿지 않아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 듯했다. 설하는 부모님을 보자마자 또다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이렇게 자신을 기다리고 위해주는 부모님을 힘들게 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미안했다.
그녀는 이제야 어린아이처럼 부모님의 품에 안겼다. 설하는 포근함을 은연중에 쭉 그리워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설하의 엄마는 “괜찮아”라는 한마디 후에 그녀를 토닥여주었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 괜찮아. 수고했어. 할 수 있어. 화이팅. 늘 설하만을 생각하던 사람은 가족이었다. 설하가 얼마나 수능을 위해 애썼는지 그리고 얼마나 슬플지 가장 잘 헤아려줄 수 있었다. 고생한 그녀에게 남은 결과가 좋지 않아도 설하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했다.


지금까지 열심히 올라왔던 그녀가 마주한 절벽은 떨어질 일만 남았음을 암시하는 게 아니었다. 이제 날개를 달고 날아올라 자신의 길로 나아갈 때라는 것이다. 눈부신 햇살이 비추는 넓은 하늘을 누빌 때라는 것이다. 하늘에는 정해진 길이 있지 않으니 말이다. 힘들게 산을 오른 까닭은 그녀가 더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보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설하는 방에 들어가 보이는 거울 속 자신에게 작은 안부를 건네보았다. 나쁘고 모난 말의 대상이었던 자신이 너무나 힘들었던 걸 알기에 “이제는 괜찮아”라고 자신에게도 위로를 건네보았다. 설하가 설하에게. 설하는 그동안 자신을 가둔 새장의 문을 열었다. 이젠 자유롭게 날아오를 때니까.
언젠가는 은방울꽃의 꽃말대로 행복이 찾아올 것이다. 그 행복이 거창할 필요는 없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그 결실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실이 내면의 꽃을 피워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 행복과 결실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때론 막연한 미래를 두려워하기보단 행복했던 과거를 상기하는 게 미래에 길을 밝혀주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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