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너 참 예쁘다-22
겨울은 소리 없이 움직이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는 거침없다. 나뭇가지는 풍성한 잎사귀에 가려 보이지 않던 뼈다. 휘어짐도 비틀림도 당당하게 드러내는 나무는, 퍼런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는 자유롭다. 선명해진 냉기가 온몸을 감싸지만 추운 채로 머물고 싶지 않았다. 무심한 바람만 가득한 산책로에는 얼마 남지 않은 꽃잎만이 꽃의 자리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만나지 않아도 있던 사람
만나도 없던 사람
볕은 이토록 따사로운데
너에겐 빛줄기조차 가시였을까
빚처럼 쌓인 빛이
허공을 뚫고 지나가면
저무는 하늘가엔
붉은 무덤만 무성하다
너는 없고
나는 남았고
세상은 눈부시고
침묵으로 채색된 겨울숲은 눈뜨지 않아도 그려진다. 눈감아도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모과나무, 단풍나무가 나누는 조곤조곤한 귓속말, 사락사락 책장 넘기는 감나무. 누적된 계절만큼 두터워진 소리는 홀로 서본 잎사귀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다.
겨울을 걸을 때면
밟는 연습을 한다
지금은
귀가 깨어나는 계절
눈은 감고
소리는 담으라며
비
운
다
한동안 대꾸도 없더니
허공을 울리는 메아리
겨울을 깨우는 건
잘 익은 음성메시지 하나
떨어진 잎의 목소리를
얼른 주머니에 넣었다
이끌리듯 닿은 책은 시인의 에세이집이다. 어떤 글은 길쭉하고 어떤 글은 둥글게 맴돈다. 어디서 시작되든 시라는 물줄기에서 다시 고인다. 시인의 언어는 어디를 항해하더라도 시에 닿을 수밖에 없나 보다. 그들 숨소리가 생생해질 때마다 심장이 뛴다.
여기,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
지금, 얼어붙은 창가에는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12월
설핏, 기운 마음은 키도 없이 항해한다.
이곳은 생이 피고 지는 계절의 끝자락이다.
쓰는 일은 뼈를 드러내는 일. 나를 벼려 하늘 아래 온전히 드러내는 일. 나무는 외피를 벗고 겨울 위에 알몸으로 섰다. 더 이상 감출 게 없는 나무만이 진실하다.
시를 쓰는 건 손이 아니고 발이었어. 땅의 소리, 나뭇잎 소리, 흙의 감각은 오롯이 발을 통해 전해진다. 침묵에도 소리가 있다며 속삭인다. 꽁꽁 언 손으로 전해지는 겨울 감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