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너 참 예쁘다-20
가을을 찾다가 겨울 발자국만 확인했다. 걸음이 느린 탓일까. 한 계절을 만끽하기도 전에 늘 다음 계절에게 덜미를 잡히고 만다. 지난 계절 더듬다가 만난 겨울. 추위에는 취약하지만 한 걸음씩 그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사소한 온기에도 마음이 기울어서, 우연히 앉은 벤치가 따뜻해서 선뜻 일어설 수도 없다. 쉽게 흔들리는 사람은 자꾸 믿고 싶어진다. 무모한 온기와 선함을. 아직은 살만하다고 믿고 싶어진다.
손 위에 손을 포개다가
마른 손 위에 걸린
붉은 손은
차가운 겨울 속에
뛰어든 가을인가
무모한 젊음인가
그때 붉은 손을
잡아줬더라면
푸른 불 속으로
뛰어들지 않았을까
포개진 손 위로
소리 없이 내린 계절
겨울은 돌아오고
기억은 돌아앉고
흰꽃이 먼저 변색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빨강, 분홍꽃이 먼저 색을 잃었다. 본연의 생기를 머금고 있는 건 흰색이다. 세상사는 마음도 그러할까. 오색찬란한 요란한 마음보다는 하나를 향한 열망과 순정이 오래갈까. 하늘은 맑고 갈색으로 물든 나무는 가을과 겨울 사이에 섰다. 추위 속에서도 꿋꿋하게 핀 꽃은 아직도 그대로다. 떨고 있는 여린 손을 살포시 잡았다. 아직도 피어날 힘이 남은 걸까. 마지막 힘을 쏟는 걸까. 바르르 떨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와닿았다.
저무는 계절 속에도 여전히 빛나는 초록손이 있다. 계절 위에 우두커니 서있는 사람도, 다음 계절로 나아가는 사람도,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팔 벌려 환영한다. 거리마다 쌓인 햇살이 발걸음을 붙든다. 소소한 온기마저 소중한 계절이 왔다.
여름은 열기를 피하느라
겨울은 작은 온기라도 붙드느라
엇갈렸다
극과 극에 머물며
끝과 끝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닿을 수 없어도 끌리는 것처럼
언젠가 만나면
꼭 끌어안을 것처럼
겨울햇살 속에 숨은 너는
그리워하다 보면 언젠가는
또렷하게 열릴
하늘 위에
땅 아래에
그려질 수많은 얼굴
제목 없이 시작한 삶에도 흐릿한 형체가 생기기 시작했다. 평생 이름 없이 살다가 끝에 다다라서야 떠오를 제목. 삶에 제목을 정한다면, 이름을 붙인다면 어떤 문장이 될까. 그리운걸 마음껏 그리워하고 잊으며 또 그리워하며 이야기는 계속되지 않을까.
날씨는 쌀쌀하지만 새벽 공기는 바닥까지 내려간 기분을 끌어올린다. 아침공기는 무한한 긍정과 응원이 담겨 있다. 축 처진 어깨도 귓불까지 끌어올린다. 오늘 하루라는 선물은 또 얼마나 근사한가. 언어로 표현하기 전까지 알지 못했던 신비로움을 이제야 하나씩 깨우쳐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