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경수 혐의가 풀렸다는 얘기야?” 팀장 특유의 넘겨짚는 말투였다. 남형사가 이경수 알리바이에 대한 보고를 막 끝낸 참이었다. 감자탕집 식사 도중 나와 김연경을 만났다는 이경수의 진술은 맞았다.
“박혜진 사망 시각에 잠실야구장 주차장에서 여배우를 만난 게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제 이경수는 용의선상에서 빼야 하는 것 아냐?”
“김연경을 만난 것은 맞지만 헤어져 식당으로 돌아가기까지 시간적인 차이가 납니다. 김연경 말로는 이경수가 1시 직전에 밴으로 와서 선물만 받고 금방 갔다고 했거든요.”
“선물? 둘이 선물 주고받고 하는 사이야? 그렇다 치고 이경수가 바로 돌아 갔다면 어떻게 되는 거야?”
“김연경과 헤어지고 바로 갔으면 식당에 1시 10분쯤 도착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 도착시간은 1시32분이니 20분 정도 공백이 생기는 셈입니다. 1시부터 1시20분 사이요.”
“20분이라, 예매한 시간이긴 하다. 박혜진 사망 시각이 몇 시라고 했지? 국과수 부검 결과 말이야.”
“새벽 1시경이라고 했습니다.” 말없이 듣고 있던 김형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이경수가 밴에서 1시에 나왔다고 했는데 순식간에 공간이동이라도 했다는 거야? 시간이 안 맞잖아. 박혜진 사망 시각에 이경수는 김연경과 막 헤어졌다는 건데, 이상할 게 뭐가 있어? 알리바이 공백이 있어도 사건하고 관계없는 시간대 아냐?”
“사망 시각은 추정이지 반드시 그 시각에 사망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잖습니까? 몇 십분 정도 오차는 생긴다고 들었고요.”
“물론 그렇지. 어차피 추정이니까 당연 오차가 없을 수 있나? 그래도 어떻게 20분만에 야구장 안으로 들어가서 살해를 하고 다시 나와?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는 건 아니죠. 1시쯤 야구장 청소원이 3루로 가는 복도에서 이경수를 목격했다고 합니다.”
“청소원은 떨어진 거리에서 이경수 비슷한 남자를 봤다고 했는데요.” 김형사가 이의를 제기했다.
“이경수와 같은 체격에 피닉스 후드티를 입었고 같은 번호가 박혔다 했잖아. 새벽 1시에 인적이 드문 야구장 복도에서 봤다면 당연히 이경수가 맞는 거지.” 남형사가 되려 책망하듯 말을 했다.
“청소원이 봤다는 사람이 이경수라는 것은 남형사의 주관적 판단 아냐? 바로 앞에서 목격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이경수라고 단정지을 수 있어?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말해야지. 이경수라는 정황보다 이경수가 아니라는 근거가 훨씬 더 많을 것 같은데? 정황 증거는 나중에 법정에 가더라도 인정받기 쉽지 않아.”
“그건 CCTV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이경수로 보이는 남자가 찍혔어요. 청소원이 말한 것과 똑같이 후드티에 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요. 김형사 안 그래?”
“CCTV속 남자도 같은 복장이긴 했습니다. 근데 화질이 안 좋아서 이경수가 확실하다고 단정짓기는 좀 그렇습니다.”
“CCTV 화면 나도 봤잖아. 그렇게 흐린 화질로 어떻게 증거라고 들이 미나? 화질이 선명해도 각도에 따라 인정하니 못하니 하는 판국인데, 그건 증거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보충 자료인 거야.”
남형사가 입을 다물자 팀장은 화제를 바꿨다. “과학수사팀에 성분 검사 맡겼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어떻게 됐어?”
“배팅 장갑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현장에서 발견된 장갑과 이경수의 장갑은 동일하다고 합니다. 잠시만요.” 김형사가 과학수사팀 회신 결과를 보면서 계속했다.
“여깄네요. 재질이 똑같고 장갑 겉면의 무늬 패턴이 동일하다고 나왔습니다. 자수로 박은 숫자 32번의 크기, 모양, 실 성분도 일치하고요. 두 장갑 모두에서 동일한 성분의 나무가루가 채취되었습니다. 손바닥 표면 무늬 틈에서 발견했는데 캐나다산 단풍나무라고 합니다. 단풍나무는 요즘 프로선수들이 많이 사용하는 배트 재질입니다.”
“야구 장갑이니 당연히 배트의 나무성분이 묻어 있겠지. 선수들이 많이 쓰는 단풍 나무라는데 이상한 게 있나?”
“예전에는 물푸레나무를 많이 썼는데 메이저리그 배리 본즈가 사용하면서부터 단풍나무가 대세가 되었죠. 장타가 많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산 단풍나무…”
“그러니까 국내 선수들은 대부분 미국산 단풍나무 배트를 사용한다. 근데, 이경수 장갑에서 검출된 것은 캐나다산이다?” 길어지려는 김형사의 말을 남형사가 끊었다.
“맞습니다. 배트 제조업체 사장 말이 캐나다산 단풍나무 배트를 사용하는 선수는 드물답니다. 그리고, 나무가루에서 화학약품 반응이 나왔는데 도료 성분입니다. 습기방지를 위해 배트 표면에 도색을 하는데 국산 도료로 확인됐습니다. 캐나다에서 원목만 수입하고 제조는 국내에서 했다는 거죠. 이런 식으로 오더내는 선수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장갑 두 짝이 동일한 성분이니 현장에서 발견된 장갑이 이경수 것이라는 말인데, 같은 성분의 장갑이라고 주인이 같다고 말할 수 있나? 같은 장갑을 수백, 수천 개 만들어 낼 텐데 말이야. 그리고 배트도 마찬가지야. 국산 도료를 칠한 캐나다산 단풍나무 배트를 이경수만 사용할까? 모든 야구선수 전수 조사를 하지 않는 이상 단언하기 어려워.”
팀장의 단호한 말투에 김형사는 주춤했다. 맞는 말이었다. 가능성이 높아진 것뿐이지 확실히 이경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김형사는 성분분석에 함몰되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놓쳐버린 것이었다. 문제를 풀었지만 왜 그 문제를 풀게 되었는지 이유를 망각하듯이.
“김형사, 지문감식 결과 말씀드려야지.” 김형사가 말을 잇지 못하자 남형사가 화제를 바꿨다.
“아 맞다. 장갑 손가락이 들어가는 부분 안쪽 표면에서 지문을 떠서 분석했더라고요. 희미하긴 했지만 두 짝 모두에서 검출된 지문은 동일인의 가능성이 아주 높답니다.”
“장갑 성분분석 뿐만 아니라 지문감식 결과까지도 이경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현장에 떨어진 장갑은 이경수 것이 틀림없다고 봐야 합니다. 이경수가 사건현장에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요.” 남형사가 확신에 찬 말로 김형사의 기세를 이어갔다.
“장갑 안쪽이라면 표면이 거칠어 지문의 정확도가 떨어지지 않아? 남형사 말은 현장에서 발견된 장갑이 이경수 것이니까 이경수가 범인이라는 거야? 이경수가 박혜진을 살해하고 나오다가 흘린 장갑이란 말이고. 맞아?”
“네, 저는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장갑이 발견된 장소가 정확하게 어디야?”
“김형사가 찾았는데 덕아웃 근처에서 발견했답니다.”
김형사의 보충 설명이 이어졌다. “덕아웃에서 실내로 이어지는 복도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덕아웃 뒤쪽에요. 복도 벽 쪽 구석에 덩그렇게 놓여 있었어요.”
“덕아웃 뒤쪽이면 길목 같은데, 그 날 경기가 있었다면서? 선수, 코치, 구단 관계자들이 수시로 들락날락 했을 거 아냐?”
“저도 그게 좀 이상했습니다. 경기 끝나면 선수들이 짐 챙겨서 한꺼번에 우르르 나가잖아요. 그 와중에 흘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김형사가 동조를 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물이 모두 사건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테고. 이것도 그래. 유일하지도 않은 장갑이 사람들 왕래가 빈번한 곳에서 발견됐다는 것 아냐? 복도에 떨어진 장갑이 이경수 것이라고 쳐. 그렇더라도 이경수가 경기 끝나고 나가다가 복도에 흘릴 수 있는 것 아냐?”
남형사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다시 말을 했다. “제가 무슨 딴 마음이 있어서 아무 근거도 없는 의심을 하겠습니까? 부검결과를 뺀 나머지 증거들이 이경수와 연결이 되니 그런 거죠. 장갑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선수들이 다 돌아간 후 청소원이 덕아웃 주변 정리할 때 복도에 장갑은 못 봤답니다. 경기 끝난 후 나가다 흘린 게 아니라는 거죠. 청소원이 다녀간 밤 12시쯤부터 새벽 시신이 발견되기 전 사이에 누군가 흘렸다는 말이 됩니다. 장갑 주인이 누구냐가 매우 중요 해졌다는 것입니다.”남형사의 말이 끝나자 잠시 침묵이 방을 가로질렀다. 팀장은 턱 근육을 잡아 끌어 올리고 남형사를 바라만 보았다. 김형사도 덩달아 고개를 숙이며 무거운 분위기를 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