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DNA 감식 결과도 나왔습니다.” 강력팀 회의실 안 침묵이 늘어질 즈음 남형사의 말이 공기를 가로질렀다.
“무슨 DNA 검사를 했다는 거야? 따로 보고했었나? 난 기억이 없는데?”
“이경수 소환조사 때 시료 채취해서 의뢰했던 겁니다. 급히 보내느라 미처 팀장님께 보고 못 드린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무슨 일을 왜 그렇게 해? 국과수든 뭐든 외부로 나가는 것은 반드시 사전 보고하는 거 몰라?”
“...”
“앞으로 주의해. 국과수에는 뭘 맡긴 거야?”
“이경수 콧물과 박혜진 상의에 묻은 모발의 DNA가 같은 지 봐 달라고 했습니다. 소환조사 때 재채기를 하며 휴지에 대고 계속 코를 풀더라고요. 그걸 수거해 국과수에 보냈던 거였죠.”
“이경수 허락도 없이 임의로 채집했다는 말이잖아. 본인이 동의하지 않은 DNA 채취는 법적인 효력이 없는 것 몰라? 일을 순리대로 해야지. 그건 그렇고, 결과는 어떻게 나왔는데?”
“모발과 콧물의 DNA 염기서열이 일치한다고 나왔습니다. 박혜진 옷에 묻은 머리카락이 이경수 것이라는 거죠. 뿐만 아니라 머리 염색한 것도 똑 같았습니다. 당시 이경수가 염색을 했는데 옷에 묻은 모발도 염색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박혜진 옷에 이경수의 머리카락이 묻었다고 사건현장에서 둘이 만났다고 볼 수 있을까? 그날 낮에 만났거나 며칠 전에 만나서 묻을 수도 있고 말이야.”
“사건 당일 낮에 이경수와 박혜진은 동선이 달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이경수는 최근에 박혜진과 만난 적이 없었다고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고요.”
“좋아, 남형사 말 대로 둘이 사건 당일 야구장에서 만났어. 그렇다고 해서 박혜진이 자살했다는 국과수의 의견이 달라지나?”
“국과수가 자살이라고 한 것은 1차 부검결과고요. 최종 부검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잖습니까?”
“또 고집 피운다. 국과수 최종 결과가 뒤집힌 케이스가 얼마나 될 것 같아? 거의 없어. 남형사는 이경수가 야구장에서 박혜진을 만나 살해했다고 보는 거지? 자살로 위장해서.”
“그럴 가능성이 많다고 보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면 동기가 있을 것 아냐. 이경수가 살인을 저지를 만한 이유가 있어? 감정의 골이 깊다 거나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거나 하는 그런 게 있어야지. 둘이 친구이상의 특별한 관계였다고 밝혀낸 것도 아니잖아. 그런 상황에서 막연한 의심만 하면 어떡해?”
“박혜진 주변 사람들은 둘이 친한 고등학교 동창 사이라고 했습니다. 이경수도 그렇고요. 가까운 직장 동료도 마찬가지라고 한 것 같은데요. 남형사님 맞죠? 박혜진 직장 동료 만나셨잖아요.” 김형사가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당사자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게 남녀 관계야. 이경수 같이 유명인이 관련되어 있으면 더 그렇고. 이럴 때 핸드폰만 보면 딱인데, 핸드폰을 도무지 찾을 길이 없으니 답답해. 이상하기도 하고.” 남형사는 아쉬워하는 말로 주제를 바꿨다.
“맞습니다. 카톡만 열면 누구를 언제 만났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텐데요. 자살이라면 핸드폰은 다른 소지품과 함께 현장에 남아 있어야 하잖아요. 근데,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게 이해가 안 갑니다.” 김형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남형사가 호응했다. “사망 전까지 통화한 기록이 있었고 자살이라고 한다면 현장에 핸드폰이 발견되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
“그건 좀 이상하다. 하지만 둘은 평소에 거의 통화도 안 했다며? 친구 사이 이상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맞아?” 팀장의 반박이었다.
“최근 6개월 동안 통화기록을 보면 거의 통화를 안 한 것은 맞습니다. 근데 요즘 젊은 또래끼리 전화하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웬만하면 카톡이나 문자, SNS로 다 해 버리잖아요. 통화 기록만으로 단정짓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김형사가 차분한 톤으로 말을 했다.
“박혜진의 임신 사실도 걸립니다. 주변 사람 모두 사귀는 남자가 없었다고 하는데 애기를 가진 것 아닙니까? 태아 유전자 감식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남형사의 말에 바로 팀장의 말이 이어졌다. “또 유전자 감식을 하겠다고?”
“이경수 조사 녹화 영상 돌려 봤는데, 박혜진 임신 사실 말했을 때 엄청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땀이 나는지 바지에 손도 문질렀고요. 태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태아 유전자와 이경수 유전자를 비교했으면 합니다. 이경수 콧물에서 나온 DNA 한 번 더 사용하면 되잖습니까?”
“아 그러네요. 그것만 확인되면 이경수에 대한 의혹이 상당부분 밝혀질 것 같은데요.”
“동의 없이 임의로 하는 DNA 감식은 절대 안돼. 증거 능력도 없지만 인권 침해니, 불법 수사니 해서 문제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아예 생각도 하지 말아. 혹여 태아의 아빠가 이경수라고 해도 박혜진 사망과 무슨 관련 있어? 이경수가 단순 친구 사이라고 말한 게 거짓말로 확인된다고 뭐가 달라지나?”
“단순 동창 사이라는 말이 거짓으로 밝혀지면 왜 그랬는지 그 의도를 봐야 합니다. 둘 사이 관계 속에 숨기고 싶은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건 당일 이경수가 박혜진을 못 만났다는 말도 거짓말일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박혜진의 죽음에 이경수가 깊이 관여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거죠.”
“좋아 그럼 그 가정을 따라 하나씩 가보자. 둘은 연인 관계인데 박혜진이 임신하자 다툼 끝에 이경수가 살해했다. 이런 말이 되는 거지? 요즘 세상에 여자가 임신했다고 살해한다는 게 말이 돼? 물론 그것 때문에 심하게 싸울 수는 있지만 살인까지 갈 만한 것은 아니잖아. 바로 몇 시간 전까지 경기를 했던 야구장에서 살인을 했다는 것 아냐. 이게 말이 되냐고? 살인 동기도, 장소도 전혀 납득이 안돼.”
행위의 결과에 가려진 심리적 인과관계를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팀장의 시각이 드러났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 판단하고자 했다. 팀장의 반박에 굴하지 않았던 남형사도 결론을 짓는 듯한 말투에 적잖이 당황했다. 팀장의 내면에 제3의 시각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프로선수 입장에서는 결혼도 안 했는데 임신 소식이 알려지면 난처해질 수 있잖아요. 둘이 깊은 관계였다면 임신 말고도 다른 갈등 요인도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요. 바람을 피거나 해서 깊은 상처와 함께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끼게 했을 수도 있고요.
사건 장소 말인데요. 처음엔 야구장에서 살인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야구장이라 하더라도 순간 돌아버리면 충분히 살인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대로변에서도 싸우다 살인나는 경우도 있잖아요. 우발적 살인 가능성도 고려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후우. 남형사는 이경수가 죽였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는 것 같네.” 팀장은 길게 날숨을 뱉았다.
“남형사 말대로 이경수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했어. 그 다음에 보란 듯이 시신을 야구장에 걸어 놓고 갔다는 말 아냐? 아침 되면 바로 발각될 텐데 말이야. 은폐는커녕 내가 죽였네 하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야?”
“시신을 덕아웃에 걸어 놓은 사람이 이경수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제3의 인물이...”
“그 상황에서 무슨 제3의 인물이야. 아님 말고 식으로 여기 저기 찔러 보지 마. 사건에 몰입하는 건 좋은데 주위도 좀 둘러보고 지나온 길도 돌아봐야 하지 않겠어?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왜 가고 있는지 잊어버려. 그렇게 복잡한 사건도 아닌 것 같은데, 드러나고 밝혀진 사실만 갖고 판단해. 지금 이것 말고도 우리를 기다리는 사건이 좀 많아.”
남형사는 눈동자를 아래로 깔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보통 사망사건은 국과수 부검결과에 따라 수사방향을 잡아 가는 게 정석이잖아. 국과수에서는 자살이라고 하는데 자꾸 딴 쪽을 쳐다보면 어떡해. 확실한 증거도 없이 정황만으로 타살로 몰고 가는 건 더 이상 안돼. 괜히 곁가지 흔들었다가 우리만 다쳐. 그리고, 이 사건, 발생한지 이주일 가까이 돼. 서장님한테 전화 자주 와. 수사 빨리 마무리 지으라고. 추측성 기사 때문에 서장님도 윗선 전화 받느라 힘드시나 봐. 아주 높은 윗선.”
팀장이 잠시 쉬었다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제는 동부지검에서 전화 왔었어. 부검결과 말고 다른 증거 나온 게 있냐고 묻고는 시간 끌지 말래. 빨리 결론내라고 하더라. 검사장도 관심이 많나 보던데?”
선을 긋는 듯한 말투와 윗선 언급에 두 형사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남형사는 윗선은 ‘위선’이라는 선배 형사의 말 장난이 생각났다.
“남형사, 자살이라는 부검결과를 뒤집는 확실한 증거를 내 손에 쥐어 줘. 서장이건, 검사장이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정황이나 추정, 이런 거 말고 누가 봐도 타살이라는 분명한 증거 말이야. 지금까지 부검결과를 넘어서는 실질적인 결과물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해. 다시 말하면 박혜진이 자살했다는 것이 현재 사건의 본질인 것이야.”
“시간을 조금만 더...” 남형사의 자신 없는 말 허리는 끊어졌다. 끊어진 자리에는 팀장의 말이 덧씌워졌다.
“오늘이 벌써 사건발생 12일째야. 국과수에서 자살이라 했고 우리는 이것을 뒤집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어. 사회적 이목을 끄는 사건을 확실한 증거도 없이 붙잡고 있으면 나중에 힘들어져. 남형사 말도 일리는 있지만, 수사를 더 진행한다고 해서 별반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아. 자칫하면 결론도 못 뒤집으면서 시간은 시간대로 지체되는 수가 있어.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감찰팀에서 가만히 안 있어. 그쪽이 나서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오늘은 결론을 내야 돼.”
팀장은 거침없이 결론을 향해 나아 갔다. “남형사. 국과수 부검결과 못 믿어?”
“그건 아니지만.”
“그럼 딴 생각 말고 그렇게 정리하자. 수사하다 보면 아쉽고 그럴 때가 많아. 수사는 객관적이고 실체적인 증거로 말하는 거다 보니 어쩔 수 없을 때가 가끔 생겨.”
남형사는 어쩔 수 없을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하니 울컥했지만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내사 종결 보고서는 오늘까지 올리면 되겠습니까?”
상황에 맞지 않는 김형사의 말은 남형사의 귀까지 닿지 못하고 흩어져 버렸다.
다음날 오후 박혜진 사건이 자살로 종결되었다는 짤막한 기사가 올라왔다. 받아쓰기를 한 듯 기사들은 비슷했다. 자살 이유는 석연치 않았지만 국과수의 부검결과에 따라 자살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것이었다. 기사 그 어디에도 이경수 관련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누가 어떻게 개입했는지 몰라도 이경수는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다.
일부 언론에서 수사결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자살 이유에 대한 가십성 추측 기사가 인터넷 전문 매체에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주인 없는 추측성 기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일주일도 안 되어 박혜진 기사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겨울에 접어들면서 남형사는 이경수의 이름을 뉴스를 통해 듣게 되었다. 새 근무지인 인천 계양경찰서 앞에서 점심을 먹다가 TV 앵커의 목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올해 타격 삼관왕을 차지한 피닉스 이경수 선수가 결혼한다는 소식입니다. 상대는 국내 중견 그룹 오너 2세로서 디자인을 전공한 미모의 재원이라고 합니다. 둘은 작년 겨울 이경수 선수 개인 전지훈련지인 사이판에서 우연히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