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포수 미트에 묵직하게 공이 꽂히며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팡! 팡!” 레슨장이 실내라서 그런지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공이 미트에 꽂히는 소리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쳤고 덩달아 힘이 들어가며 투구 동작은 커졌다. 토요일이었지만 오전 출근해서 간단한 사건 공소장 마무리 짓고 오후 늦게 나왔다. 출근하는 주말은 레슨 빠지고 쉬라는 미나의 성화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야구는 일주일을 버티는 에너지원이기에 건너뛸 수 없었다. 주말 운동 후유증으로 주초에는 온 몸이 쑤셔왔다. 근육이 풀어질 즈음에 주말 격한 운동으로 다시 근육이 뭉치고. 이런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중독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어깨가 욱신거리고 허벅지 근육이 뭉쳐 절룩거리면서도 묘한 희열을 느꼈다. 온몸이 뻐근한 상태에서 월요일 아침 동부지검 현관에 들어설 때는 뿌듯함에 미소가 나오기까지 했다.
땀을 말린 후 신발을 갈아 신고 가방을 챙겨서 나섰다. 나가는 길에 사무실 문이 반쯤 열려 있길래 고개를 들이 밀었다.
“뭐 그리 뚫어지게 보고 계세요? 야구 중계 보고 있어요?” 홍코치는 집중해서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회원들 레슨 영상 편집 끝내고 메이저리그 경기영상 보고 있었어. 이리 좀 와 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투수 너클볼 영상인데 볼만해. 어떤 메커니즘으로 던지는 지 해설을 잘 붙여 놨더라”
코치는 화면 정지와 되돌리기를 반복하며 투수의 투구동작을 설명했다. 또 다른 영상을 열려다 멈추고 핸드폰을 들더니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급히 전화할 데가 있는데 깜빡했네. 혼자 보고 있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여기서 해도 되는데, 누구 전화 길래 저럴까?’ 혼자 말 하듯이 생각하며 코치의 자리로 옮겼다. 특이한 투구 동작으로 너클볼을 구사하는 투수의 영상이었다. 화면을 구분 동작으로 잘라서 투수의 동작과 공의 궤적을 하나씩 따라갔다. 공을 잡은 그립과 팔 스윙 각도에 따라 너클볼이 어떤 궤적을 그리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가만 있어봐. 이날 경기장 날씨는 어땠지?’ 당일 온도, 습도, 풍향, 풍속 등이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홈 구장에서 열린 오클랜드와 경기였다. 메이저리그 홈페이지에 가서 경기 정보를 검색해보기로 했다. 윈도우 화면 하단에 자리잡은 브라우저 아이콘을 클릭했다. 포탈 같은 홈 화면이 열릴 줄 알았는데 사진과 글로 이루어진 신문기사 페이지가 떴다. 코치가 보고 있었던 기사인 듯했다.
‘뭐야 이거? 잘못 눌렀잖아.’ 새 창을 열기 위한 아이콘을 누르려다 동작을 멈췄다. 자극적인 문구의 커다란 기사 헤드라인이 눈에 띄었다.
<충격! 잠실야구장 덕아웃, 여자 시신 발견>
자연스럽게 사진 밑의 기사를 따라 내려가며 읽기 시작했다. 시신 발견 현장에 대한 설명과 사망자의 간단한 신상정보, 최초 발견자 증언이 이어졌다. 프로야구 시즌 중에 젊은 여자가 잠실야구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것도 경기가 끝나고 몇시간 뒤에 덕아웃에서 목을 매달았던 것이었다. 사건 장소가 주는 충격에 비례해 사연도 간단치가 않을 것이다 라며 기사는 마무리되었다. 기사를 다 읽고 난 뒤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실야구장에서 여자가 목을 매달았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어디였지?’ 기사 날짜를 보니 9년전에 일어난 오래된 사건이었다.
‘9년 전이면, 야구를 처음 시작했던 해 아냐? 아, 잠시만 기억이 날 듯 말 듯한데?’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시선을 천장 쪽으로 돌려 골똘히 생각했다.
“아 맞다, 그때였어. 어쩐지.” 9년 전은 준혁에게 각별했다. 야구를 시작해서 미나를 만났고 로스쿨에 합격한 해였다. 미나와 첫번째 데이트를 잠실야구장에서 했는데 시신이 발견된 바로 그 날이었다. 3루측 덕아웃에서 여자가 목매달고 죽었다는 말을 미나한테 들은 기억이 났다. 너무 놀라 소름 돋았던 느낌까지 생생히 떠올랐다. 미나와 사랑이 시작되는 날 같은 공간에서 다른 한 여자가 죽었던 것이었다.
검사라는 직업의식 때문인지, 기억 속 사건이라 그런지 관련 기사를 더 검색해 봤다. 사건발생 초기 몇일 동안은 기사가 많아 정신이 없었다. 모든 언론의 주목과 관심을 다 받은 듯했다. 초반 몇일 동안은 추측성 기사로 넘쳐나다가 이주일쯤 후 자살로 내사 종결했다는 기사가 떴다. 이후 가십성 기사가 일부에서 다뤄지다 일주일 후에는 기사가 자취를 감추었다. 준혁은 검사의 시각에서 사건을 되짚어 봤다.
‘20대 후반의 여자가 잠실야구장 덕아웃에 목을 매달아 죽었다. 부검 결과 타살의 흔적이 없었다. 살인을 저지를 만큼 깊은 원한관계가 있었던 사람도 없었다. 유족들은 자살할 만한 동기나 이유가 없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했다. 야구장만 아니었다면 일반적인 자살 사건인데, 자살로 보기엔 죽은 장소가 의아하긴 하다. 근데 코치는 왜 이렇게 오래된 기사를 보고 있는 거지?’
“미안, 좀 늦었네. 잘 보고 있어?” 길어지려는 생각의 꼬리를 자르려는 듯 코치가 들어왔다. “다음 주에 고등학교 야구부 동기 모임이 있는데 장소를 급히 변경해야 해서. 내가 올해 총무 맡았거든.”
“동일고등학교요? 제가 2년 후배니까 혹시 아는 선배 있으려나.”
“야구부는 맨날 운동만 해서 학교 안에서 마주칠 일이 있었겠어? 모임에 나오는 친구들 중 유명한 선수는 거의 없어. 잘 나가는 애들은 프로에서 노느라 모임에 나오지도 않아.”
“근데 영상을 보다가 마우스를 잘못 눌러 코치님이 보던 페이지를 보게 되었네요. 본의 아니게 죄송합니다.”
“뭐 죄송까지야. 내가 아까 뭐 보고 있었지?”
“신문 기산데요. 잠실야구장 덕아웃에서 20대 여자가 목매달아 죽은 사건.”
“맞아, 그거 예전 아주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사건이었어. 그 사건 알고 있지?” 자연스럽게 준혁을 사건속으로 끌어 들였다.
“처음엔 뭐지?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건 발생한 날 저녁때 잠실야구장에 갔더라고요. 미나와 첫 데이트하던 날요. 그때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기사를 더 검색해봤는데 자살로 결론 났던데요. 떠들썩했던 사건 치고는 단순 자살로 끝이 나서 조금 허탈했습니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이상한 사건이었던 것 같아. 유족들은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했지만 경찰은 서둘러 자살로 발표해버렸지. 사건 초기 그렇게 날뛰던 언론도 어느 순간 잠잠해지는 게 뒤에 뭐가 있는 것 같았어.”
“사망자는 그냥 평범한 회사원 인 것 같았는데, 뒤라면?”
“거창한 배후가 있다고 단정지을 수 없지만,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작용했다는 생각이 들어. 이경수 선수 알아?”
“이경수요? 당연히 알죠. 지금 호크스 4번타자 아닙니까? 근데 이경수가 이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어요?”
“직접적인 관련성은 조사를 안 해봐서 모르는 거고. 확실한 건 죽은 박혜진과 이경수는 고등학교 동창사이라는 사실이야.” 코치의 말투에는 확신이 묻어났다.
“죽은 사람이 박혜진이었군요. 둘이 동창이라는 게 무슨 의미죠?”
“박혜진 사망 몇 시간 전 바로 그 잠실야구장에서 피닉스 경기가 있었어. 당시 이경수는 피닉스 소속이었고. 박혜진 사망과 이경수는 충분히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야. 그런데도 경찰은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성급하게 자살로 결론짓고 만 것 아냐.”
“박혜진이 죽던 날 공교롭게도 같은 장소에서 동창인 이경수의 시합이 있었다는 말인데?”
“검사 입장에서 봐도 이경수가 관련되어 있을 것 같지 않아?”
“갑자기 물어보니 답하기가 좀 그렇지만 의아한 점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동창이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의심을 하는 것 무리가 아닐까요? 같은 기수 동창이라고 해도 몇 백명은 될 것 아닙니까? 잠실야구장은 삼 만명 가까이 들어가는 넓은 곳이고 내부도 복잡하잖아요. 그런 장소에 같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엮는 것은 좀 무리인 것 같은데요.”
듣고 싶은 말이 나오지 않았는지 코치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면 억지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경수에 대한 수사를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어. 용의선상에 올랐는데 피닉스 구단에서 압박을 가했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거든. 그때 이경수가 피닉스 주축 선수로 활약이 대단했어.” 이경수 개인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코치의 말은 길어졌다.
“이경수는 몇 달 후 중견 재벌그룹 딸하고 결혼을 했는데, 이후에도 이기주의와 튀는 성격때문에 동료와 자주 불화를 일으켰어. 또 결혼한지 몇 달 만에 여배우와 스캔들이 터져 버려. 성적은 급격한 하향 곡선을 그리게 되고, 이번엔 코치와 갈등을 겪게 돼. 가을엔 음주운전 하다가 걸리면서 사면초가에 빠지게 되었지.”
연말에 지방 하위 팀으로 트레이드 되면서 몰락이 시작되었다. 거기서도 성적이 오르지 않자 2군으로 좌천되었다. 2군에서도 안하무인으로 생활하다 선수들과 불화를 야기하며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늦여름쯤 이경수의 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이었던 사람이 2군 감독으로 오면서 재기를 노리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신뢰관계가 있었고 이경수가 잘 따르는 지도자였다.
2군 감독 지도 아래 절치부심 노력을 해서 다음 해에 1군으로 올라갔다. 1군에서 엄청난 기록을 거두며 화려하게 복귀를 했다. 한마디로 타자로서 기록이란 기록은 다 갈아치웠다. 역대 선수 중 한 해에 이경수만큼 기록을 세웠던 선수는 없을 정도였다. 연말에 이경수는 피닉스와 역대 최고 금액으로 4년 FA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FA 기간 동안 성적은 꾸준했지만 크고 작은 스캔들이 이어졌어. 동료 선수나 코치진과 갈등과 불화는 다반사였고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어. 그나마 야구 성적은 꾸준해서 올해 말에 세번째 FA 계약도 무난히 할 것 같아.”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계세요? 이경수가 걸어온 길을 다 꿰뚫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코치는 당황한 듯 멈칫했다. “뭐 그거야. 너무 쇼킹했던 죽음이라 개인적인 호기심이 강했다고 해야 되나? 야구장에서 벌어진 사건이라 더 그런 것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저도 그때 엄청 충격을 받았습니다. 야구장 안에서 목을 매단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잖아요.”“말이 안 되는 거 하나 더 있어. 확실한 건 아니지만 당시 박혜진이 임신중이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