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주말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월요일 오전 검사실은 차분하고 조용해서 절간 같았다. 준혁도 분위기에 편승해서 컴퓨터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검찰내부 그룹웨어 이프로스 시스템을 띄어 놓긴 했지만 생각은 딴 데 빠져 있었다. 레슨장에서 홍코치와 나눴던 이야기가 머리에 맴돌았다. 드넓은 잠실야구장 덕아웃에서 임신한 여자가 목매달아 자살했다는 것이 너무 의아했다. 과연 가능할까 싶었다. 지금까지 직, 간접적으로 접했던 자살 사건과는 너무나 달랐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죽음은 병적 과시욕이나 깊은 분노에 의한 타살이 대부분이었다. 한창 시즌 중인 야구장에서 자살이라니! 뜨거운 경기장 열기와 대비되는 싸늘한 죽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두개의 상황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에 죽음의 진실이 있을 것 같았다. 미간에 힘을 주며 골몰하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왜 이러지? 이미 지나간 사건에 왜 이리 집착을 할까? 참 나도.’
다시 마우스를 움직여 이프로스 시스템으로 들어갔다. 부서 공지사항을 둘러보고 메일함을 클릭하려다 화면 하단의 ‘KICS’라는 아이콘이 눈에 들어왔다. 형사사법 정보시스템, 킥스였다. 경찰 수사단계부터 검찰 기소, 공판 등 형사 사건 처리 진행이력조회 시스템이었다.
‘사건기록이나 한번 보자’ 빨려가듯 박혜진 사건으로 다시 돌아갔다. 킥스로 들어가 피해자명으로 검색했는데 관련 사건이 없다고 나왔다. 사건발생 연도, 관할서로 조회기준을 바꿔 검색해도 마찬가지였다.
“전 수사관님. 킥스 말인데요. 오래된 사건도 조회 가능하죠? 9년전 건데”
“가능합니다. 9년전이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요. 올해 초 15년 가까이 지난 사건도 조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80년대 후반 이후 검찰로 송치된 형사사건은 다 수록되었다고 했거든요.”
한 번 더 차근차근 검색해봤으나 마찬가지였다. 왜 사건기록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하다 기사가 떠올랐다. 박혜진 사건은 경찰수사 단계에서 내사 종결되었다고 했다. 검찰로 넘어오지 않은 사건이라 조회가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건기록을 빠르게 훑어보고 일상 업무로 돌아가려 했으나 실패했다. 잔상이 남아 있으면 다른 일에 집중을 못하는 준혁의 성격이 나타났다. 박혜진 사건이 머리속에서 계속 자극을 주었고, 이를 무시하지 못했다.
“전수사관님. 부탁 하나 합시다. 몇 년 전 사건 볼 일이 있는데 킥스에서 조회가 안돼요. 경찰단계에서 내사 종결된 사건이라 그런 듯합니다. 어떤 사건이냐면.” 전수사관에게 사건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했다. 당시 관할서인 송파경찰서에 연락해서 내사종결 보고서를 구해 달라고 했다.
“우리 이번 주에 처리해야할 사건 많잖아요. 그게 우선이고요, 방금 말한 내사기록은 시간 날 때 구해주시면 됩니다. 시급한 일은 아니거든요.”
사흘 뒤, 외부 미팅 후 돌아오니 책상위에 복사물 두 뭉치가 더블 클립으로 묶여 포개져 있었다.
“아까 점심 먹고 송파서 다녀왔습니다. 그저께 미리 말해 놓고 갔는데도 찾는데 시간이 꽤 걸리더라고요. 내사종결 건은 시스템으로 잘 관리가 안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쪽 형사와 같이 일일이 복사해서 가져온 겁니다.” 전수사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면서 말을 했다.
“찾는데 시간 걸렸다는 거 보니 담당 형사는 이미 다른 서로 옮겼나 보네요.”
“네 그런 것 같더라고요.”
노란색 더블 클립의 내사종결 보고서부터 들었다. 다른 더블 클립은 증거물 목록, 부검결과, 참고인 조사 내용, 녹취 등 별첨 문서들이었다. 보고서에는 박혜진이 임신 상태였다고 나와 있었다. ‘진짜였구나. 임신 3개월의 여자가 어떤 이유로 야구장에서 목을 매달아 죽었지?’
코치의 말은 대체로 맞았다. 박혜진과 이경수는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사망 전 마지막 통화자가 이경수였다. 둘 사이 관계로 보면 야구장이라는 죽음의 장소가 어느 정도 개연성을 얻는 듯했다.
그날 저녁 이경수와 소속팀은 잠실야구장 3루 덕아웃에서 경기를 치뤘다. 경기 후 몇 시간 뒤 3루 덕아웃에서 박혜진은 목을 매달았다. 현장에서 이경수 배팅 장갑 한 짝이 발견되었고 이경수의 알리바이에 일부 공백이 있었다. 야구장 청소원이 사망 시각 전후 이경수인 듯한 남자를 목격했다는 진술도 있었다.
이경수를 향하던 화살은 국과수 부검결과 앞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자살로 보인다는 1차 부검결과를 앞세워 내사종결 처리되었다. 보강 수사나 추가 소환조사 없이 성급한 마무리를 지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내사종결 보고서에 기재된 당시 수사 담당자를 검색해보니 모두 현 근무지가 달랐다.
이중 수사 실무 책임자로 보이는 남성열 형사를 주목했다. 현재 경기남부경찰서에 있는데 수사실적이 꽤 좋은 편이었고 감찰기록도 깨끗했다. 망설임 없이 시스템에 떠 있는 남형사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했다. 9년전 송파서에서 근무할 때 담당했던 박혜진 자살 사건에 대해 물어볼 게 있다고 말했다.
“이미 오래전에 종결된 사건인데 왜 그러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님 재수사라도 하는 겁니까?”
“재수사는 아니고, 우연히 사건을 접하게 됐는데 몇 가지 의문점이 있어서 그럽니다. 괜한 오해는 말아 주세요.”
당시 담당 형사에게 전화하는 것 자체가 오해를 살만 한 것이었지만 말은 그렇게 했다. 반발을 예상했지만 남형사는 오히려 본인이 할말이 많다고 했다. 동부지검 근처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무슨 할말이 많길래 굳이 만나자고 할까? 하여간 이 사건, 이상하게 끌려 들어가는 것 같네’
사건을 알게 되면 될수록 깊이 엮여 들어가는 것을 느꼈지만 그만 둘 수 없었다. 나중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지만 자신의 감을 믿고 끝까지 한번 가보기로 했다.
지하철 문정역 앞 스타벅스 1층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바닐라 라뗴를 들고 3층으로 올라갔다. 오는 도중 남형사와 통화해서 원하는 메뉴를 물어봤던 차였다. 붐비는 점심시간은 지났지만 창가 리는 차서 기둥 앞 원탁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곧 남형사인 듯한 사람이 다가왔다. 키는 173,4 cm 되어 보였고 보통 체격에 머리는 길었다. 긴 팔 버튼다운 셔츠, 린넨 면바지에 스니커즈화를 신고 있었다.
“제가 지검으로 가도 되는데 이렇게 밖에서 보네요. 검사님이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공식 수사가 아니고 해서 편하게 보자고 했습니다, 남형사님한테 직접 듣고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전달해서 들으면 중간에 유실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꽤 지난 사건인데 기억나실 지 모르겠습니다.”
“주말에 집에서 사건기록을 찾아서 봤습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은 따로 복사해서 집에 보관하고 있거든요.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지만. 대신 궁금하신 거 바로 답을 해드릴 수 있습니다.”
“수사 담당자로서 아쉬웠던 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남형사는 수사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토로했다. 정황 증거나 목격자 진술로 피의사실이 확인되었지만, 결정적 증거를 못 찾았다. DNA 채취 등 수사에 비협조적이어서 보강 수사를 요청했지만 묵살당했다. 윗선의 재촉과 압박 때문에 빨리 종결 지을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준혁은 윗선이라는 말에 예민한 반응을 하며 누구를 말하는지 되물었다.
“팀장은 언론과 서장 핑계를 댔지만 서장 또한 윗선의 압박을 받았던 것 같았습니다. 수사 빨리 끝내라고요. 시간을 더 달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검찰에서도 압박이 들어왔어요.”
“동부지검에서요? 형사님이 직접 압박을 받았다는 겁니까?”
“직접 받은 건 아니고, 팀장이 동부지검에서 전화 왔다고 했습니다. 검사장이 관심 많은 사건이니 빨리 마무리하라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수사의지가 완전히 꺾였던 거 같아요.”
“그 때 주임검사가 누구였어요? 기억납니까?”
“양재준 검사였을 겁니다. 당시 송파서에서 발생한 강력사건은 양검사님이 다 지휘하셨거든요. 지금은 중앙지검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남형사는 뭔가 생각이 났는지 바로 말을 이었다. “내사 보고서 보셨다 했죠? 혹시 최종 부검결과도 들어 있던가요? 수사결과 발표 후 제가 인천으로 급히 발령받아 떠나는 바람에 확인 못했거든요. 어떻게 결과가 나왔는지 궁금합니다.”
“저희가 수사 관련 서류 다 확보했는데 부검결과는 하나만 있었습니다. 1차 부검결과요. 최종 부검결과가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해 봐야겠네요. 보고서에 이경수와 박혜진이 동창 이상의 관계일 수 있다고 나오던데, 그거 형사님 추정이죠?”
“추정이긴 하지만 확실하다고 봐야 합니다. 이경수와 박혜진은 사건발생 전 자주 만나던 사이가 분명했습니다. 연인 관계인 거까지는 파악은 못했지만 단순 동창은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게 확신하는 근거는 있으세요? 수사기록 상에는 사건 당일 둘 사이 통화기록 빼고는 증거가 없던데요.”
“공식 기록엔 없지만 둘 사이 관계를 말해줄 증거가 있었거든요. 사망당시 박혜진의 옷에 묻은 머리카락이 이경수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국과수 DNA 분석 결과니까 틀림이 없는 거죠.”
“DNA 분석을 했다고요? 보고서에나 첨부 서류엔 그런 언급이 없었는데요.”
“공식적으로 한 게 아니라서 보고서에 넣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환 조사 때 휴지에 묻은 이경수 콧물을 별도로 채취해서 국과수에 맡겼었거든요.”
“영장도 없는 상황에서 동의 없이 하면 당연 안되죠. 어쨌거나 머리카락이 옷에 묻을 정도로 둘은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는 건데요. 그것도 박혜진이 사망한 날과 그리 멀지 않은 날에. 아니, 사건 발생 바로 직전에도 묻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사건 전날에는 둘의 동선이 달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경수도 최근 몇 개월 동안 박혜진을 안 만났다고 했고요. 결국은 사건 발생 시각 전후로 머리카락이 묻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거죠.”
“근데, 거기서 왜 수사가 멈춰버렸던 겁니까?”
“더 파고 들고 싶었는데 팀장이 그만 하자고 했죠. 불법 채집한 증거로 밀어붙이면 나중에 우리가 다친다고요. 사망한 태아의 유전자와 DNA 감식 들어가면 더 확실했는데.”
“DNA 감식결과는 어디에 있습니까? 봤으면 좋겠는데요.”
“첨부 서류 중에는 없다고 했죠? 집에 보관한 사건기록 파일에도 없었던 것 같아요. 맞아, 제가 그때 급히 인천으로 전출가면서 후배 형사한테 맡겼던 것 같습니다. 전화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자리를 마무리하고 사무실로 들어오니 남형사한테 전화가 왔다. “후배 형사한테 전화해봤는데 DNA 감식 결과는 힘들 듯합니다. 캐비닛에 따로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해 겨울에 강력팀이 다른 층으로 이사하면서 폐기했을 거라고 합니다. 후배 형사와 통화하면서 기억났는데요. 그때 제가 태아로부터 DNA를 채취해놨더라고요. 나중에 쓸 일이 있을까 봐 의뢰를 했었던 거 같아요. 아마 국과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어 있을 겁니다. 태아 아빠 DNA만 확보하면 될 것 같은데요.”
준혁은 전수사관을 불러 남형사와 만났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말해줬다.
“그래서 말인데요, 국과수를 통해 박혜진 최종 부검결과 보관하고 있는지 확인해 주셔야겠습니다. 박혜진 옷에 묻은 머리카락과 이경수 유전자 DNA 분석결과도 있는지 알아봐 주고요. 태아 DNA도 보관하고 있는지 봐 주세요.”
“아마 보관하고 있을 겁니다. 빨리 알아보겠습니다.”
“이제 박혜진과 이경수 관계를 입체적으로 파악해봐야 할 것 같아요. 과거 둘 사이의 동선이 얼마나 어떻게 겹치는지 봤으면 합니다. 사건 발생 전 1년 정도 SNS를 비교해보면 되지 않을까요? 이경수 같은 경우 팀 경기 일정이나 팀 훈련 일정하고 맞춰 본다 던지요.”
“당시도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트위터 이런 거 사용을 했었나요?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제대하고 과외 하던 시절이었는데, 학생들과 페이스북으로 소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개인 블로그도 꽤 활성화되었을 걸요. 어디 여행가면 블로그에 글 남기는 친구도 많았거든요. 미니 홈피도 유행했고요. 박혜진이 광고회사 다녔었다고 하니 아마 그런 쪽에도 밝았을 것 같아요.”
“말만 들어도 꽤 방대한 작업일 거 같은데요.” 전수사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혼자 하지 마시고 이실무관과 같이 하세요. SNS는 아무래도 사용을 많이 하는 젊은 사람이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이지연 실무관은 검사실 내에서 서류작성, 행정 등 지원업무를 주로 하는 젊은 여직원이었다.
“그럼 좋죠. 저번주부터 이 사건 신경을 많이 쓰시는 것 같은데요. 혹시 재수사하는 겁니까?”
“좀 더 봐야 돼요. 방금 부탁드린 거 결과를 봐야 판단이 설 듯합니다. 아마 당시엔 사건의 한쪽 면만 보고 서둘러 결론을 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사건도 많은데 시간 끌 수도 없고, 이번 주 안으로 결정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