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전정규 부장검사실 앞에서 짧은 호흡으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두 번 노크를 한 뒤 안에서 호응도 하기 전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널찍한 부장 책상 앞에 직사각형 테이블과 까만 가죽을 두른 나무의자 6개가 있었다. 볼 때마다 나무의자인지 가죽의자인지 헷갈렸다. 테이블 끝 상석 의자는 같은 종륜데도 더 푹신하고 더 까맣게 보였다. 부장이 상석에 앉았고, 준혁은 부장 왼쪽 앞자리에 앉고는 서류철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은 어인 일로 아침부터 오셨나? 야구는 잘하고 있어?”
“부장님 배려로 주말에 꾸준히 연습도 하고 시합도 하고 있습니다.”
주중에 집중해서 하고 주말엔 가정에 충실하라는 전부장의 소신을 말하는 것이었다. 전부장은 허심탄회한 소통과 강한 추진력으로 평검사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다. 더 빨리, 더 높이 오르고자 하는 욕망은 다르지 않지만 잘 감추는 편이었다.
“제가 보낸 메일 보셨습니까?” 아침에 박혜진 사건 재수사 요청 메일을 보내고 찾아온 터였다.
“보긴 봤는데 검사장님 전화 때문에 자세히는 못 읽었어. 언뜻 보니 재수사를 하게 해달라는 것 같은데, 우리 지검에 온지 얼마나 됐다고 재수사냐? 어떤 사건인데?”
준혁은 과거 내사 결과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추가적으로 파악된 사실을 하나하나 짚었다. 홍코치를 통해 사건을 접하게 됐다는 것은 두리뭉실하게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남형사 만난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당시 형사 말로는 서둘러 수사가 종결된데 대해 외부 압박도 역할을 했답니다. 언론을 핑계로 서장도 빨리 종결하라고 했고, 검찰에서도 그랬다는데요.”
“우리 동부지검에서도 압박이 들어갔다고? 왜 그랬지? 당시 주임검사가 누구였더라?” 짧게 되묻기만 했던 부장은 검찰이란 말에 상체를 곧추 세웠다.
“양재준 검사였습니다. 지금은 중앙지검 4차장 검사로 반부패 맡고 있던데요.” 4차장은 정치인, 재벌 사건 등 사회적 파장이 큰 특수 사건을 다루는 핵심요직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주임검사가 현재 검찰권력의 정점에 있다는 사실에 부장은 당황한 듯 바로 말을 못했다.
“음, 양재준 차장이라. 보고 다 끝난 거야?”
“이경수는 지금도 유명 선수라 알려지면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될 겁니다. 최대한 조용히 물밑으로 조사해서 타살 혐의 밝혀 내도록 하겠습니다. 부장님이 언론 앞에서 사건의 진실과 함께 사법 정의의 엄중함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론의 관심이라는 말과 강한 자신감을 보이는 준혁의 태도에 부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경찰 내사종결 사건을 검찰이 인지해서 재수사하는 경우 잘 없잖아. 자칫하면 불필요한 오해 살 수도 있어. 당시 수사라인에 있던 경찰, 검찰 대부분 현직에 있을 거니까 신중하게 접근해야 돼.”
부장검사 방을 나온 준혁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전수사관을 불렀다.
“부장님도 말했지만 이번 건은 정말 조용히 진행되어야 합니다. 힘들더라도 경찰 수사지휘 하지 않고 직접 수사할 생각입니다. 필요하면 저도 수사에 참여할 테니 걱정마시고요.”
“경찰 내사종결 건이고 유명인이 연관되어 있으니 은밀하게 하는 게 맞겠네요. 어떤 방향으로 수사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이경수 직접 조사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먼저 주변부를 조사해서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고요. 어느 정도 증거가 모아지면 한 번에 중심부를 치는 전략으로 가시죠. 이경수와 동선이 비슷했던 당시 소속팀 선수나 직원부터 탐문했으면 합니다. 9년전 일이라 목격자 찾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맞겠는데요.”
“당시 이경수 소속팀 피닉스 구단 직원은 제가 접근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맡았던 사기 사건의 피해자가 인천 연고 야구팀 직원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통하면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동료 야구선수는 어떻게 다가설지 감이 안 오는데요.”
“거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이경수 작년에 호크스로 옮겼더라고요. FA 2년 계약해서요.”
전수사관에게 수사관련 서류철을 건네 주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홍코치에게 피닉스에서 오래 활동하고 있는 선수 중 아는 선수 있냐고 물었다.
“2루수로 뛰고 있는 후배가 있긴 한데, 무슨 일로 그래?”
“몇 주전 박혜진 사건 말씀하셨잖아요. 제가 보기에도 좀 이상해서 몇 가지 확인해보고 있는 중인데요. 그 후배를 통해 사건당일 이경수를 목격한 사람이 없나 알아봐 줬으면 해서요. 사망 시간이 새벽 1시니까 그 전후로 야구장 주변에서 목격한 사람요. 아니면 이경수가 평소와 다른 수상한 행동을 목격했던 거도 좋습니다.”
코치는 흔쾌히 알아보고 전화 주겠다고 했다. 전수사관은 피닉스 구단 직원과 금요일 오전에 만난다고 했다. 내일부터 잠실 3연전 때문에 목요일까지는 바쁘다고 해서 금요일로 잡았다고 했다.
“좀 늦어도 좋으니 지금처럼 무리하지 않고 조용히 진행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잘 하셨네요.”
전수사관은 당시 피닉스 구단 직원과 만난 결과를 보고했다. “중간에 통화를 해서 이경수를 목격한 직원이 있나 은밀히 알아봐 달라고 했습니다. 퇴사한 직원도 포함해서요. 오전에 잠실야구장에서 구단 직원 만났는데 목격자와 함께 나왔더라고요. 야구장 안에서 이경수를 확실히 봤다고 하는 직원이었습니다. 그것도 사망 시각 가까운 새벽 1시 좀 지나서요.”
당시 입사 2년차인 이 직원은 혼자 늦게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1시 넘어 사무실 불을 끄고 나오다가 3루 덕아웃 쪽 복도에서 나오는 이경수를 목격했다. 이경수는 넋이 잃은 표정으로 사무실 앞을 지나쳐 나갔다고 했다. 사무실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앞에서 지나가는 것을 봤기 때문에 이경수가 틀림없다고 했다.
“팀의 간판선수고 저와는 악연이 있어서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가 없죠. 피닉스 후드티를 입고 있었고 등뒤에 새겨진 본인 등번호도 분명히 봤습니다. 걸음걸이나 덩치도 똑같았고요.”
이경수는 본인만 아는 이기주의적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과 심심찮게 부딪쳤다. 박혜진 사건 1년 전쯤이었다. 부상으로 2군에 있을 때 트레이닝 기구를 빨리 교체 안 해준다고 다툼이 있었다. 그때 다툰 직원이 바로 목격자였다. 이경수는 직원이 말대꾸한다고 반말로 비아냥대며 폐부를 찌르는 폭언을 퍼부었다.
“선수가 말하는데 일개 직원이 어디서 그렇게 눈에 힘주고 대들고 있어? 내가 2군에 있다고 우습게 보여? 선수가 운동 제대로 해보겠다고 바꿔 달라면 바로 바꿔줘야 될 것 아냐? 뭐가 그리 말이 많아? 너 공채면 대학교 나왔겠다. 대학교에서 뭘 배웠길래 그 모양이야? 졸업은 제대로 한 거 맞아? 이 모양으로 직장생활 하는 거 너네 엄마, 아빠는 알고 있냐? 이걸 그냥.”
둘만 있었던 자리라 증인도, 증거도 없어서 구단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후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찾아왔고 이경수를 향한 적개심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러던 차에 박혜진 사건이 터졌던 것이었다.
“그때 뒷모습 사진도 찍었고 아직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경수에게 당했던 경험 때문에 항상 증적을 남기는 버릇이 생겼다고 했다. 전수사관은 구단 직원에게 받은 32번 후드티 남자의 뒷모습 사진을 보여주었다. 배경은 야구장 복도였다. 촬영 시간은 1시22분으로 나왔다.
“성과 있었네요. 좋습니다. 소속팀 선수는 만났습니까?” 준혁은 홍코치에게 당시 피닉스 선수 중 목격자가 있나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코치 후배 피닉스 선수가 9년전에 같이 뛰었던 선수 몇 명에게 수소문해봤다고 했다. 그중 한 명이 목격한 것 같은데 말하길 꺼린다고 했다.
“단둘이 만나야 털어놓을 것 같다고 그 선수를 직접 만나보는 게 어떠냐고 하더라고요. 야구장 근처 병원에서 무릎 부상으로 입원중인 선수를 따로 만나고 왔습니다. 직원과 마찬가지로 이경수를 목격한 게 맞다고 합니다.”
시합 후 주차장까지 갔다가 선물 받은 글러브를 라커룸에 두고 온 게 생각나 돌아가다 봤다고 했다. 라커룸 문을 여는데 반대쪽 실내 연습장 쪽에서 이경수가 나왔다.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 빠르게 걸어 나왔다. 경기 후 1시간쯤 지났으니 11시30에서 40분 사이였다고 했다.
실내 연습장은 홈팀 선수들이 경기 전 연습하는 100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경기 후에 가끔 하는 연습은 야외 그라운드에서 하지 실내에서는 하지 않았다. 그날 피닉스는 원정 팀이라 사용할 일이 없었는데 그곳에서 나오길래 의아했다. 이경수 같이 성적 좋은 주전 선수는 더더욱 경기 후 연습할 일은 없었다. 다음 날 언론에서 박혜진 사건을 접하고는 깜짝 놀랐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9년전 사건을 그리 선명하게 기억을 할 수가 있을까요? 이 선수도 구단직원처럼 이경수와 무슨 악연이 있었던 건 아니죠?”
“본인은 그런 것 없다고 하는데 찜찜해서 구단직원에게 전화해서 물어봤습니다. 이경수와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지 않았냐고요. 당시 이경수가 2군에 있을 때였는데, 선수들을 무시하고 깔보며 말도 막 했다고 합니다. 경기에서 동료 선수가 실수라도 하면 감독보다 더 힐난하며 짜증을 부렸고요. 경기 후에 실수한 선수를 따로 불러 머리를 쥐 박으며 욕설도 하고 그랬답니다.”
“그 양반 안될 사람이네요. 갑질에다 폭력과 폭언까지.”
“이경수를 목격한 그 선수도 2군에서 많이 당했을 거랍니다. 유격수였는데, 2군 유격수 수준이 떨어진다고 엄청 갈궜답니다. 1루수인 이경수 본인이 공을 못 받아 실책 했는데도 공을 던진 유격수 탓을 하며 난리도 아니었답니다.”
“한마디로 남을 해코지한 게 부메랑으로 돌아온 셈이네요. 선수도 직원도 이경수와 악연으로 오래전 상황을 정확히 기억한다는 것 아닙니까? 당시 경찰한테 이런 사실을 왜 말을 안 했답니까?”
“스타선수인 이경수에 대해 괜히 말했다가 잘못되면 뒷감당이 어렵다고 본 거죠. 경찰에서도 조사하러 오지 않았고, 구단에서도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고 단속까지 했답니다.”
“그리고, 박혜진 쪽도 더 봐야겠어요. 경찰 내사기록에 보면 가족과 직장동료만 제한적으로 조사한 걸로 나와요. 김주연 이외에 추가적으로 박혜진 주변 사람 증언을 확보해야 합니다. 당시 김주연은 경찰한테 이경수를 잘 모른다고 잡아 뗐잖아요. 이경수와 박혜진이 연인사이인 것도 알면서 말도 안 했고요. 이번에도 김주연 진술만 믿고 있을 수는 없어요. 박혜진 심리상태나 이경수와의 관계를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할 것 같아요.”
그때 이실무관이 슬며시 자리로 다가왔다. 프린터 출력물을 찾으러 왔다가 준혁의 말이 들렸던 모양이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저번에 박혜진 SNS 분석한 적 있었잖아요. 그때 보니까 고등학교 여자 동창하고 친하게 지냈던 것 같았습니다. 둘이 함께 자주 놀러 다니며 맛집도 찾아다니고 그랬거든요. 엄청 가까워 보였습니다. 박혜진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을 듯합니다. 같은 고등학교 친구라 박혜진과 이경수의 관계도 알 것 같은데요.”
준혁은 서울 중앙지방법원에 주차를 하고 약속 장소인 카페 ‘데일리디’로 갔다. 외벽이 빨간 벽돌로 되어있어 시원한 이미지를 주었다. 카페 내부도 벽돌이었고 테이블과 의자는 군더더기 없는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클래식한 편안함 가운데 실용적 모던함이 조화를 이뤘다. 자리에 앉았는데 5분 뒤에 30대 여자가 다가왔다. 옅은 베이지색 셔츠에 까만 정장바지 차림이었다. 수수하면서도 친근감 있는 이미지였다.
“혹시 동부지검?”
“네 민준혁 검삽니다. 전수사관 대신 제가 나오게 됐습니다.” 전수사관은 급하게 다른 압수수색 건 집행하느라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아, 검사님이 직접 오셨네요. 전 주미혜라고 합니다.” 검사라는 말에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준혁이 미혜의 주문을 받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왔다.
“오늘 만나자고 한 것은 9년전 사망한 박혜진씨 때문입니다. 박혜진씨 하고 친하게 지낸 걸로 알고 있는데요.”
“혜진이는 고등학교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단짝 친구였습니다. 졸업 후에도 대학교는 달랐지만 계속 만났어요. 직장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민거리 있으면 밤새 들어주고 기쁜 일 생기면 내 일처럼 축하해주고 그랬습니다. 그랬던 친구가 갑자기 죽어 버렸으니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분위기가 숙연해지려고 할 때 준혁의 말이 들어왔다.
“이경수 라고, 프로야구 선순데 혹시 아세요?”
“잘 알죠. 동창이었으니까요. 고등학교 때 혜진이와 같이 많이 어울려 다녔습니다. 혜진이와 경수는 서로 좋아했던 사이였어요. 학창시절의 스쳐가는 추억으로 끝났어야 했는데.”
“고등학교 졸업 후에 둘이 무슨 일이 있었나 봅니다.”
“인연이 그랬는지 다시 만나게 되었죠. 우연히 경수를 만났다고 혜진이한테 전화가 왔었습니다. 얼마나 좋아하던지. 그때가 혜진이 죽기 1년 전쯤이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