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통원치료 3일째였다. 전역 후 첫 시즌이라 의욕이 앞섰는지 연습 중 손목을 다쳤다. 인대가 늘어나 타격할 때 고통이 심해 부상선수로 빠져 치료 중이었다. 시즌 초반이라 걱정했는데 의사가 한두 달 뒤면 복귀할 수 있다고 했다.
1층에서 접수를 마치고 4층 물리치료실로 가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땡’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오는 사람들을 옆으로 흘리며 엘리베이터에 다가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경수를 불렀다.
“혹시 저, 이경수?”
돌아보니 단아하게 웨이브진 머리에 옅은 하늘색 투피스 정장을 한 20대 중반 여자였다.
‘어디서 봤지? 팬인가?’ 아, 짧은 순간 경수 머리 한쪽에 저장되어 있던 추억의 편린 한 조각이 튀어나왔다.
“너 혜진이 맞지? 박혜진, 진짜 오랜만이다. 얼굴은 하나도 안 변했네. 여긴 웬일이야?”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아쉬움을 남겨 두고 헤어졌다. 경수는 병원으로 다시 들어가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혜진과의 추억을 떠 올렸다.
처음 혜진을 알게 된 학교 운동장, 수원 야구장 밖에서 기다리던 혜진이, 건국대 호숫가에서 잊지 못할 첫 키스. 지나간 추억이었지만 가장 순수했던 시절이었다. 하루라도 못 보면 죽을 것만 같았고 만나면 더 없이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졸업 후에도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프로야구 신인 선수 시절은 누군가를 그리워할 여유를 갖기 힘들었다. 선수로서 어느 정도 입지를 굳혀 갈 즈음에는 유혹이 많아졌다. 주위를 맴도는 여자들로 인해 혜진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동물적 유희와 쾌락을 끊임없이 갈구했다. 눈에 보이는 본능을 자극하여 서로의 것을 끊임없이 탐하다가 상처만 입고 돌아서는 전쟁이었다. 그 전쟁에서 승자는 없었고, 진실도 정의도 없었다. 물론 사랑도 없었다.
7년여 만에 보는 혜진이는 지금껏 봐왔던 여자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지적인 세련미와 인간적 따스함, 감춰진 섹시함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예전엔 보이지 않았던 완숙한 아름다움이 온 몸을 적시고 있었다.
수평선처럼 공간을 삼켜버리는 하얀 이마, 수줍은 듯 빛나는 청아한 눈동자, 오뚝하면서도 날카롭지 않은 코, 도톰하지 않지만 부드러워 보이는 옅은 빨간 입술, 날씬한 몸매를 은근히 자랑하고 있는 하늘색 정장 실루엣. 자신감 넘치면서도 건조하지 않은 목소리에는 지적인 화려함이 묻어 났고, 가식 없는 환한 미소에는 포근한 정이 흘러 넘쳤다.
치료가 끝나자 혜진에게 감정을 담은 긴 카톡을 보냈다.
<오늘 만나서 너무 좋아. 자리가 편안하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 예전 느꼈던 감정이 살아나는 것 같아. 그때 미처 못했던 사랑 다시 이어 갔으면 좋겠어>
<예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물론 나도 한때는 널 좋아했지만 그 사이에 세월이 흘렀고. 예전의 애틋하고 순수했던 감정이 다시 생길지 모르겠어. 그래도 만나니까 편하고 좋긴 하더라>
7년 동안의 간극을 일시에 메우려는 듯 내내 서로에게 몰입했다. 첫 만났던 이야기에서부터 졸업 후의 일까지 서로에 대해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끊어졌던 긴 세월을 잇기는 부족했지만 점점 서로에게 다가서는 걸 느꼈다.
경수가 부상으로 재활 중이라 시간 내기가 쉬워 수시로 만났다. 몇 천년 동안 봉인된 피라미드가 열리듯 잠복했던 사랑이 봇물 터지듯 되살아 났다. 강촌, 양평 등 근교를 돌아다니며 연인의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어릴 적 풋풋했던 사랑과 달리 표현하고 소유하길 원하는 치열한 사랑이었다.
경수는 재활치료 및 2군에서 적응기간을 끝내고 1군으로 복귀했다. 경수의 카톡이 뜸해지는 가 싶더니 야구장 VIP 입장권을 보내왔다.
“카톡 봤어? 야구장 티켓인데, ‘스카이박스’ 석이야. 영화 보면 전면 유리로 된 룸에서 유명인들이 와인 마시면서 야구 보는 것 봤지? 친구들도 데리고 와서 같이 즐거운 시간 보내.”
며칠 뒤 혜진은 입사 동기인 주연과 함께 인천 문학 야구장에 도착했다. 전용 출입구를 통해 스카이박스 L7 룸을 찾아서 들어갔다. 아담한 검정 소파와 구석 테이블엔 샐러드, 꼬치 등 간단한 요기 거리와 음료수가 있었다. 정면에는 커다란 유리를 통해 야구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혜진은 유리로 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테라스처럼 되어 있는 곳에 좌석이 10개쯤 놓여 있었다. 야구장 전경을 둘러보는데 룸이 3루 위쪽에 있어 3루 벤치의 피닉스 선수들은 볼 수 없었다. 룸 안으로 들어가자 주연은 이리저리 둘러보며 좋다고 난리였다.
“이경수가 직접 예약해준 거 맞아? 너 혹시 사귀는 것 아냐?”
“아니라니까, 저번에 얘기했잖아. 그냥 친한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괜히 이름 오르내리는 게 싫어 회사안에서는 경수와의 관계를 숨겼다. 주연한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똑똑 하는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남자가 들어왔다. 손에는 직사각형 선물박스가 들려 있었다. “이경수 선수가 갖다 주라고 한 겁니다.”
박스를 풀자 와인 한 병과 쌍안경 케이스가 들어 있었다.
“고급 와인 같은데, 이경수 멋있다. 야구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센스 있네. 이제부터 이경수 팬해야겠다. 근데 쌍안경은 또 뭐지? 본인만 자세히 보라는 애긴가?”
경기가 시작되어 둘은 테라스 쪽으로 나갔다. 경수는 선발 출전을 하지 않았다. 부상에서 복귀한지 얼마 안 되어 그러는 듯했다. 와인을 마시면서 수다를 떨고 있는데 이경수를 호칭하는 장내 아나운서 목소리가 들렸다. 대타로 타석에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혜진은 쌍안경을 들고 운동장으로 급히 시선을 돌렸다. 타석에 들어서는 경수의 늠름한 모습이 선명히 들어왔다.
“경수 나왔네. 볼래?” 쌍안경을 건네자 주연이 낚아 채듯 얼른 집어 들었다.
긴장하며 경기장을 응시하는 가운데 벌써 투 스트라이크 노 볼이 되었다. 스트라이크 하나만 더 들어오면 아웃이었다. 순간 갑자기 “와 !!!” 하는 함성이 들렸다. 홈런이었다. 혜진은 쌍안경을 뺐어 그라운드를 돌고 있는 경수에 초점을 맞춰 줌인 해서 당겼다.
경수가 2루 베이스를 지나면서 검지 손가락으로 혜진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멀리 있는 경수가 마치 코 앞에 있는 듯 느껴져 혜진은 멈칫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감동이 울컥 올라왔다.
경기 후반으로 향하는 7회, 혜진의 핸드폰이 울렸다. 복도에 나가 통화를 끝내고 돌아온 혜진은 급한 일이 생겨 먼저 가야겠다고 했다.
“엄마가 집 앞에서 넘어져 지금 응급실에 있나 봐. 몇 달 전엔 오빠가 교통사고, 이번엔 엄마까지.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 넌 남아서 와인마저 마시며 경기 다 보고 가. 경수가 경기 끝나고 이리로 온다고 했으니 네가 말 잘해줘. 따로 경수한테 말은 해 둘게.”
혜진은 경수 얼굴을 다시 못 보고 나온 게 못내 아쉬웠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는데 경수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홈런 친 후 그라운드를 돌면서 자신을 가리키며 우쭐하는 모습이 듬직하고 귀여웠다. 무엇보다도 진심이 느껴졌다.
이날 이후 혜진은 경수에 대한 사랑이 좀 더 성숙되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경수의 진심이 가슴에 와 닿았기에 예전보다 더 뜨겁게 사랑을 이어 갔다. 한 달 뒤 둘은 부산에서 만나게 되었다. 혜진의 출장지와 경수의 시합장소가 겹쳤던 것이었다.
혜진은 금요일 부산에 내려가서 고객사 미팅과 저녁 회식으로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 커피를 마시며 회식을 마무리한 뒤 9시 넘어 서면에서 택시를 탔다.
황령터널과 광안대교를 지나 동백섬을 오른쪽에 두고 직진해서 노보텔 앰배서더 호텔에 도착했다. 택시 문을 열고 나가자 바다 특유의 끈적하면서도 시원한 공기가 덮쳐 왔다. 체크인을 한 뒤 16층으로 올라갔다. 푹신한 복도 카펫을 느끼며 1617호 문을 열었다. 달려가듯이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치니 전면 유리에 해운대의 바다가 다 들어왔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좋은 풍경을 선물한 경수가 고마웠다. 빨리 경수와 같이 바다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해변에 다가서다 물러나기를 반복하는 파도를 멍하니 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30분 후 경수와 혜진은 호텔 1층 카페 테라스에서 마주 앉았다. 혜진은 쌉싸름한 벨기에 맥주 필스너 우르켈을, 경수는 목 넘김이 좋은 코로나를 시켰다. 혜진이 호텔 전망이 너무 좋다고 연신 감탄을 했다.
“지금 올라가서 밤 바다 좀 보여줘.” “지금?” 혜진이 머뭇거리자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가 16층으로 올라 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면 유리 너머로 까만 배경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방안으로 해운대 바다가 까맣게 들어차 있었다. 경수는 혜진의 어깨를 감싸고 정면 유리창 쪽으로 걸어 갔다. 유리창에 다가서자 가로등 때문에 해변 도로만 밝았고, 백사장 너머로는 짙은 어둠뿐이었다. 먼 바다로 갈수록 어둠과 바다가 구별되지 않아 바다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경수야. 이렇게 까만 바다는 처음 봐. 예전 시골의 칠흑같이 어두웠던 밤 길 같아.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아?”
경수는 뒤에서 살포시 안고는 얼굴을 돌려 혜진의 입술을 찾았다. 혜진은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입술을 받아들였고 눈을 감았다. 사랑하는 소리가 파도속으로 들어가 먼 바다로, 먼 바다로 뻗어 나갔다. 혜진은 경수의 팔베개에 누워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어둠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바다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보다 바다의 농도가 더 짙어서 바다와 어둠의 경계가 뚜렷하게 보였다. 사랑한다는 속삭임이 파도같이 다가왔고 바다보다 깊은 사랑에 빠졌음을 느꼈다.
경수는 팀 숙소인 온천장 농심 호텔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혜진은 호텔방을 나서기 전 창가 쪽으로 갔다. 밤 바다와 달리 아침 바다는 모든 풍경을 다 허락했다. 창 밖의 모든 풍경은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파도소리는 계속 해변에 머물렀다. 닫힌 창에서는 들리지 않고 보이기만 하는 파도소리가 왠지 쓸쓸해 보였다. 수첩을 꺼내 바다 풍경을 스케치하고 짧은 시를 적었다.
유리창 안으로 바다가 들어왔지만,
파도소리는 아직도 바깥에 머무르고 있다.
혜진은 예전보다 더 경수에게 집중했다. 잠실 경기가 있는 날은 거의 빠짐없이 야구장으로 퇴근해서 경수를 만났다. 경기 후 경수 차로 혜진의 집인 성수동까지 가는 길에 데이트를 즐겼다.
8월 말이 되면서 경수의 타격은 불붙기 시작했다.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어 맹타를 휘둘렀는데 특히 찬스에 강했다. 하루에 2개의 홈런을 치는 날도 있었고 만루 홈런도 쳐 팬들을 열광케 했다. 피닉스의 새로운 4번 타자가 나타났다고 떠들썩했고 언론사 인터뷰도 이어졌다. 경수의 성적과 인기와 반비례하여 혜진과의 만남은 점점 줄어 들었다. 팬들 이목으로 경기 후 혜진을 바래다주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그냥 혼자 집에 가야 할 듯. 팬들이 구장 앞에 진을 치고 있어서. 미안해>
저녁 바람이 쌀쌀하게 느껴지는 10월. 피닉스는 포스트 시즌에 진출해서 준플레이오프부터 시작, 한국 시리즈까지 올라갔다. 한국 시리즈에서 부산 시걸즈팀에 패했고 프로야구 시즌은 끝났다. 11말까지 일본 오키나와에서 팀 마무리 훈련이 끝난 후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프로야구 선수에게 유일한 오프 시즌 휴가로 한달 정도되는 기간이었다.
작년에는 개인 트레이너를 통해 몸을 만들었으나 올해는 쉬고 싶었다. 혜진과 여행도 다니면서 추억을 만들려고 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았다. 혜진은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 수주 건 때문에 연말까지 쉴 틈이 없었다. 경수가 불평을 쏟아 냈다.
“바쁜 건 이해하지만 너무 한 것 아냐? 난 일년에 겨우 몇 주 쉬는 건데 같이 여행도 못 가고. 삼, 사일 휴가도 못내?”
직장 생활을 한 번도 안 해 본 경수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경수는 체념하고 일주일 뒤 혼자 사이판으로 떠났다. 무료하게 시간 때우고 있을 바에는 따뜻한 곳에서 몸 만드는 것이 나을 듯했다.
숙소는 공항에서 차로 2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마리아나 리조트였다. 입단동기 희문이 장기 예약한 독채형 빌라가 방도 많고 넓어 같이 지내기로 했다. 오전에는 리조트 앞 도로와 해변가에서 러닝을 했다. 점심 후에는 남쪽으로 내려가 피트니스 클럽에서 웨이트를 했다. 오후 늦게 리조트 야구장으로 와서 캐치볼, 타격훈련으로 마무리했다.
1주일 후 희문의 여자친구 지혜가 친구와 함께 사이판으로 놀러 와서 리조트로 왔다. 친구인 윤희는 서구적인 미인형의 얼굴로 성격이 시원시원했다. 아버지가 중견기업 오너로 상당한 재력가라고 희문이 귀띔을 해줬다. 윤희와 지혜는 4일동안 사이판에서 머물렀는데 이틀은 경수, 희문과 보냈다. 경수는 윤희와 사이판 곳곳을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3주간의 사이판 훈련을 마치고 연말에 귀국했고, 1월초에는 잠실야구장에서 팀 훈련을 이어갔다.
1월부터 혜진이 여유를 찾으면서 만나기 시작했으나 뜨겁지는 않았다. 벌써 오래된 연인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경수는 느끼고 있었다. 여자에게 빨리 싫증을 느끼는 경수는 본인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요즘 부쩍 만나는 횟수가 늘어난 주연 때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혜진과 만남이 거듭될수록 시간 감각이 뒤틀려 멀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혜진을 만날수록 과거 고등학교 시절의 자신을 만나는 것 같았다. 현재의 경수가 7년전의 경수를 만나는 느낌이 들어 갈수록 불편했다. 이것이 혜진과 멀어지는 이유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경수는 이런 감정을 혜진한테 굳이 말하려 하지 않았다.
1월말엔 해외 전지훈련을 나갔다. 1차는 미국 애리조나, 2차는 일본 가고시마였다. 두차례에 걸친 긴 훈련이 끝나고 귀국한 다음 날 혜진을 만났다. 저녁식사 후 논현동 경수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가자 마자 옷도 벗지도 않은 채 서로의 몸을 탐닉했다. 침대는 암컷과 수컷이 뱉어내는 거친 호흡과 신음으로 가득 찼다.
며칠 뒤, 3월 중순부터 프로야구는 시범경기가 시작되었다. 곧이어 개막전과 함께 정규 시즌이 시작되면서 경수는 더 바빠졌다. 4월이 넘어가면서 카톡도 뜸해지기 시작했다.
미혜는 경수와 혜진의 재회. 그리고 둘이 다시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을 담담히 말했다. 관계가 소원해지며 갈등을 빚고 다툼이 있었다고 말할 때는 미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경수가 자기를 멀리하는 것 같다며 많이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다 혜진이 갑자기 임신을 하게 됐어요. 당연히 경수 아이였는데 경수가 아무 생각이 없다고 엄청 속상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둘이 많이 다퉜습니다.”
“박혜진씨 뱃속에 있던 아기의 아빠가 이경수라고요?”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바로 저한테 말한 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본인에 대해 일일이 말하는 성격은 아니거든요. 혼자 고민하고, 혼자 해결하고, 혼자 삭히는 스타일이었어요. 혜진이 죽기 전 5월 중순쯤 울면서 털어 놓더라고요. 혼자 더 이상 감당이 안되니 그랬겠죠. 애를 낳을까 지울까 고민이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정작 경수는 연락이 안되고. 미쳐버리는 거죠. 경수 이 자식은 알면서 자꾸 피했던 거죠. 오죽했으면 그 차분한 애가 그날 잠실야구장까지 찾아 갔겠습니까?”
“당시 경찰한테 왜 말씀을 안 하셨어요? 그때 했으면 또 다른 진실이 밝혀질 수도 있었을 텐데요.”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이라 충격이 너무 컸고 경황도 없었습니다. 부검 때문에 장례식도 지체되는 바람에. 더군다나 제가 그때 구청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정신없을 때였거든요. 경찰도 안 찾아왔고요. 장례 다 치르고 몇일 뒤 그제서야 생각나 경찰한테 갈려고 했습니다. 근데 자살로 수사 종결됐다고 뉴스에 나오더라고요. 아차 늦었구나 하고 체념하고는 일상으로 돌아가버렸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