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몇일 뒤 전수사관은 이경수와 다시 마주 앉았다. 2차 소환조사였다. 이번에는 보안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소환시간을 아침 9시로 당겼고 소환 통보도 전날 했으며 홍코치에게도 함구했다. 들어올 때도 지하 주차장을 통하도록 안내했다.
조사실 유리벽 바깥쪽에는 준혁이 이어폰을 낀 채 심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수사관은 1차 조사 때 확인된 알리바이를 확인하는 것으로 심문을 시작했다. 진술의 일관성을 체크하면서 허점이 발견되면 파고들 작정이었다. 이경수가 답을 하면 전수사관이 바로 단문으로 되물었다. 진술의 앞뒤가 안 맞는다 치면 다시 처음부터 묻기를 반복했다.
서서히 이경수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했던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하게 하냐고 불평을 했다. 알리바이 공백이 생기는 구간인 새벽 1시 시간대로 접어 들었다.
“잠실야구장 주차장에 있던 김연경 밴으로 들어갔다 나온 시간이 새벽 1십니다. 거기서 바로 출발했다면 감자탕집 도착 시간은 1시10분 전후여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 감자탕집으로 돌아갔을 때 시간은 1시32분. 20분 정도 늦게 식당에 도착했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연경이와 헤어지고 바로 감자탕집으로 돌아 갔던 것 같은데요.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 9년전 상황을 말하라고 하니 저도 답답합니다.”
“기억이 안 난다고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이 시간대는 박혜진 사망 시각과 맞닿아 있어서 정확하게 말을 해주셔야죠. 김연경 밴에서 나와 바로 감자탕집에 간 거 맞아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제 차 안에서 쉬다가 간 것 같기도 하고요. 아 맞다. 그날 피곤해서 차안에서 잠시 음악 듣다가 간 걸 겁니다.”
“식사 도중 잠시 나온 사람이 일 끝났으면 바로 돌아가는 게 맞지. 차안에서 음악 듣고 갔다고요? 그것도 20분씩이나. 동료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게 말이 됩니까?”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죠. 뭐.”
자신도 억지스럽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뭉툭하게 말을 흐렸다. 전수사관도 거기서 더 이상 들어가지 않고 멈췄다. 더 파고 들어가 궁지에 몰아넣어도 자백을 할 것 같지 않았다.
주제를 바꿔 박혜진 직장동료 김주연이 증언한 내용에 대해 확인에 들어갔다. 처음엔 거짓 진술을 했다. 박혜진과 함께 야구장에 왔길래 잠시 인사만 나눴다는 것이었다. 1년 가까이 사귀었다는 김주연의 진술을 확인해주자 고개를 숙였다. 스카이박스석에서 처음 만난이후 김주연한테 먼저 연락이 와서 사귀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으로 시인을 한 셈이었다. 김주연이 증언한 내용 중 핵심 사안으로 들어갔다. 박혜진이 사랑한다는 카톡을 이경수에게 보낸 걸 봤다고 했다.
“김주연말로는 이경수씨가 자신과 박혜진 둘 다 사귀었다고, 양다리 걸친 거라고 하던데요”
“뭐라고요? 양다리라뇨? 주연이는 맞지만 혜진이는 친구 사이라니까 왜 그러십니까? 주연이 걔도 웃기는 애네요. 왜 그런 거짓말을 하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건 법정가서 증인으로 불러 따지던지 하시고요. 요즘도 단풍나무 배트 쓰나요?”
“배트요? 물론 단풍나무 배트 사용하죠. 그런데 뭐 때문에 그러세요?” 갑자기 배트 이야기로 넘어가자 의도를 몰라 당황했다.
“단풍나무 배트를 사용하는 선수들의 대부분은 미국산 단풍나무를 사용할 겁니다. 캐나다산 단풍나무를 사용하는 선수는 드물다고 하던데요. 그 드문 선수가 이경수씨 맞죠?”
이경수는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대개 캐나다산은 퀘벡 산 단풍나무를 많이 쓴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 이경수씨는 온타리오주 수세인트마리 단풍나무만 고집한다면서요?”
“어떻게 그걸 잘 아시죠? 근데 그게 왜요?”
결과를 알면서 하나씩 풀어 나가는 듯한 전수관의 페이스에 말려 이경수는 초조해졌다.
“사건현장인 3루 덕아웃 부근에서 배팅 장갑 한 짝이 발견됩니다. 당시 수사팀이 성분분석한 결과 이경수씨 장갑과 동일하다고 나왔습니다. 장갑 손바닥에서 미세 증거물이 검출되었는데 단풍나무 가루였어요. 타격 시 배트를 꽉 쥐게 되는데 그때 묻어 나온 것이겠죠. 그 나무가루가 캐나다 수세인트마리 지방의 단풍나무 성분이었습니다.”
과거 경찰의 미세 증거물 성분분석 결과를 캐나다 산림청에 메일로 보냈고 그저께 결과를 받았다.
“수세인트마리 단풍나무 배트를 저만 사용한다는 법이 있습니까?”
“당시부터 지금까지 온타리오 주에서 한국으로 단풍나무 수출을 승인해준 곳은 1곳뿐이었습니다. HM사. HM 잘 알죠? 이경수씨가 단풍나무 배트 구입하는 곳 아닙니까? 그쪽 대표가 그러던데요. 수세인트마리 지방 단풍나무 배트는 오직 이경수씨만 쓴다고”
이경수는 침묵을 지키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빠르게 말문을 열었다. “장갑이 제 거라고 해도 시합 끝나고 나가다 흘릴 수도 있잖아요. 경기 끝나면 선수들이 동시에 몰려 나가기 때문에 분실물이 종종 생깁니다.”
“경기 후 12시쯤 덕아웃 청소할 때 장갑은 없었고 경찰이 아침에 발견하게 됩니다. 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12시부터 시신이 발견된 새벽 5시 사이에 누군가 떨어뜨렸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경수씨 장갑을요.” 전수사관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왜 다시 야구장으로 돌아온 겁니까? 박혜진 사망 시간대에 사망 장소인 덕아웃에 와서 왜 장갑을 흘린 겁니까? 이제 털어 놓으시죠. 빨리 시인하고 인정해야 정상참작이라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경수는 고개를 숙이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말이 튀어나왔는데 뜬금없었고 억지스러웠다. “예전에 부검결과가 자살로 나왔던 것 같은데, 부검보다 더 확실한 건 없지 않나요.”
최종 부검결과는 1차 부검결과와 다르게 나왔다고 전수사관이 말을 해줬다. “최종 부검결과는 타살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고 나왔습니다. 이제 부검결과만 가지고 자살이라고 주장할 수가 없어요. 이경수씨”
“전 진짜 아닙니다. 혜진이는 혼자 죽은 겁니다. 장갑 하나 흘렸다고 왜 그러는 겁니까? 장갑 흘린 게 죕니까?”
하소연 같은 이경수의 억지 주장으로 2차 소환조사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