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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경선 Sep 26. 2024

나비처럼 날아서 -23

23.

민준혁 검사실은 오전부터 분주했다. 오후에 있을 이경수에 대한 구속영장 실질심사 준비 때문이었다. 두 차례 소환조사에서 부인으로 일관하는 이경수 태도로 봐서 추가 소환은 의미 없다고 봤다. 구속수사로 전환해 DNA 검사를 통해 압박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이경수 측에서 언론이나 검찰 상부를 통해 장난을 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일주일 넘게 거의 밤 12시 넘어 퇴근하며 구속영장 준비에 몰두했다. 집중력을 가지고 끈질기게 파고드는 모습이 다른 사건 처리할 때와 확연히 달랐다. 검사로서 사명감이나 성취 욕구 이런 거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에 검사로서 가지지 말아야 할 사적인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박혜진 죽음을 사건으로 봐야 하는데, 숨겨진 슬픈 그림자에 더 시선이 갔다.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이경수를 사랑하게 되면서 죽음을 맞게 되는 박혜진. 자신에게 미치는 하찮은 피해를 회피하려고 두 명의 죽음을 한 순간에 지워버렸던 이경수. 

박혜진이 죽고 난 뒤 몇 개월 후 이경수는 아무일 없듯이 결혼을 했다. 달콤한 신혼 생활을 즐겼을 것이고,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야구실력을 뽐냈을 것이었다. 그런 이경수에게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긴 세월 교도소에서 자유를 억압당한 채 저지른 죄의 무게와 깊이를 자각하도록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고 억누르며 구속영장을 써 내려갔다. 건조한 문장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경수의 죄를 적시해 나갔다. 불필요한 문장, 부연 설명, 감정적인 형용사를 버리고 또 버렸다. 군더더기를 버리고 남은 문장을 엮어 다시 살을 붙이는 과정을 계속해 나갔다. 완성된 구속영장 신청서는 어느 문장, 문구 하나 흠잡을 데 없었다. 그 어떤 판사도 구속영장을 발부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어제 구속영장 청구를 위해 부장검사에게 결재 받으러 갔을 때 지적 사항도 거의 없었다.



영장청구 사유에 대한 논리를 복기하며 가다듬고 있는데 전부장의 호출이 왔다. 가라앉은 목소리여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서둘러 갔다. 부장검사실안에는 전부장만 있는 줄 알았는데 상석에 차장검사가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눅눅한 두 사람의 표정으로 방안 분위기도 무거웠다. 

“차장님이 궁금해하시니 박혜진 사건 간략히 말씀드려.” 

일반 형사사건으로 평검사가 차장한테 직접 보고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게다가 영장 청구할 때 이미 차장 결재까지 났는데 다시 보고한다는 것도 찜찜했다. 의아한 마음을 접고 사건 인지부터 이경수 소환까지 경과를 간단히 이야기했다. 이어 9년전 사건수사결과와 재수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을 말했다. 마지막으로 구속영장에 명시된 이경수의 범죄사실 및 영장청구 사유를 정리했다.

“이경수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직접적이고 확실한 물증이 안 보여. 유죄를 뒷받침하는 것은 증언이나 정황 증거뿐 아냐? 피의자가 자백도 안하고 강하게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고.”

차장의 뜻밖의 반응에 준혁은 당황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증언이나 여러 정황들이 모두 이경수를 가리키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구속 후 영장 받아 DNA 채취해서 압박할 생각입니다. 국과수 DNA 감식 결과만큼 확실한 물증이 어딨겠습니까? 지금은 잡아 떼고 있지만 바로 무너질 겁니다.”

지원사격을 바라며 부장을 쳐다보았지만, 부장은 애써 외면했다. 도와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DNA 감식을 어떻게 한다는 말이야?” 지원사격 대신 차장의 질문이 이어졌다. 

“순차적으로 DNA 분석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먼저 태아의 것과 박혜진 상의에 묻은 머리카락 DNA와 비교할 겁니다. 그러면 심한 몸싸움 끝에 박혜진 옷에 머리카락을 묻힌 사람이 태아의 아빠라는 게 증명이 됩니다. 그 다음에 이경수 DNA를 채취해서 이 두개의 DNA와 비교하면 태아의 아빠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을까 합니다.”

“피의자 인권 강화 추세때문에 DNA 채취 승인이 점점 더 까다로워. DNA가 일치하더라도 그게 확실하고 결정적인 증거라고 단언할 수 있어? 기소하면 오히려 피고측 방어 논리에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전부장.” 

“뭐, 법정에 가면 항상 우리 검찰 측 시나리오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전혀 다르게 결론이 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죠. 모발 DNA 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피의자를 꼼짝 못하게 할 정도의 유력한 증거라고 하기에는 약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경수가 태아의 아빠이고, 이경수 모발이 박혜진 옷에 묻었다는 것만으로 유죄를 선고받기 힘들 것 같은데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떨어져 오히려 이경수 측의 강한 반발이 예상됩니다.”

부장은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쓰며 차장의 뜻에 호응을 했다. 준혁은 부장의 답변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몇일 전 구속영장청구 보고하러 갔을 때와 너무 달라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영장 나오면 단도리 잘해서 기소까지 문제 없이 잘 끌고 가야 된다는 당부까지 했던 부장이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당혹스러웠다. 

“DNA 감식결과만 봐서는 그렇죠. 증거물, 목격자 증언을 연결해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차장이 중간에 끊고 들어왔다. “아무리 그래도 이거는 재수사야. 확실하고 직접적인 증거는 확보 해놨어야지. 누가 봐도 인정할 만한 증거 없이 법정에 가서 엮어 보겠다 생각하면 어떡하나? 재수사, 특히 살인사건 재수사는 판사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거 몰라? 

피고측하고만 다툰다고 생각하면 안 돼. 판사도 사법체계 테두리안에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어. 기존 사법체제가 내린 결정을 뒤집기란 쉽지 않아. 한마디로 재수사는 훨씬 더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거야. 

경찰 내사종결 건이긴 하지만 재수사를 착수한 건 우리 검찰이잖아. 재수사 착수 의도부터 의심받을 수 있어. 빼도 박도 못하는 확실한 직접증거 없으면서 유리한 상황을 기대하는 건 과욕이야. 차라리 그 길을 안가는 게 맞지.”

차장과 부장의 은근하면서도 집요한 압박은 1시간 넘게 이어졌다. 차장이 부정적인 의견을 말하면 부장이 동조하고 준혁은 반발했다. 물러서지 않고 반박하고 반박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논리에 힘을 잃어갔다. 기소하면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이 뻔하다는 차장의 반복된 주장에 준혁은 입을 닫았다. 무거운 정적이 방안을 감싸 돌았다. 잠시 뒤 부장이 정적을 깼다. 

“그냥 불기소로 갔으면 좋겠어. 섣부르게 기소했다가 자칫하면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어. 차장님 의견도 그렇고. 이게 언론에 알려지는 바람에 일이 더 커져 버렸어. 검사장님뿐만 아니라 총장님 귀에까지 들어갔어. 

영장 기각이라도 돼 봐. 안 그래도 유명 야구선수가 연루되어 있어 언론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가만 안 있을 거야. 검찰이 스스로 재수사했다가 망신당했다고, 기획수사라고 난리 칠 게 뻔해. 저번 달에 피의자가 검찰 조사 받고나서 귀가해 투신자살 했어. 무리한 수사 때문이라고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잘 알잖아. 이번에 또 그러면 우리 검찰 얼마나 피 흘리겠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부장이 톤을 낮추려는 지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구속영장 청구한 것 거둬들이는 게 맞는 거 같아. 판사한테는 내가 따로 해명할 테니.”

부장이 노골적으로 체념을 강요했고 준혁의 침묵은 더 깊어졌다.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손으로 지긋이 눌러 댔다.

“영장 기각될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도 들려. 유족 측에서 재수사 요청했더라면 그나마 나을 텐데 이 사건은 우리 검찰이 시작한 거야. 경찰 단계에서 내사 종결된 사건이라 해도 당시 수사 주임검사도 입에 오르내리게 돼. 그러다 보면 까이고 다쳐 흠집 날 수밖에 없어. 다 우리 식구잖아. 구속영장 취소하고 불기소로 마무리하는 게 맞을 것 같아.”

차장의 표정은 온화했지만 말속에는 시린 냉기가 박혀 있었다. 준혁의 입은 얼어버렸다. 사건을 조용히 덮고 싶어하는 이유가 검찰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릎이 꺾이면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져 버렸다. 외압이 실체적으로 다가오면서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차장은 곧 일어서 나가면서 어깨를 두드리며 힘내라고 했다. 준혁은 고개를 떨구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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