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1차 소환조사 이후에도 언론의 관심은 줄지 않았다. 소환 특종 보도로 재미 봤던 스포츠서울이 발빠르게 움직였다. 스포츠서울에서 먼저 기사를 올리면 다른 언론사에서 인용하여 살을 보태는 식이었다. 초반에는 과거 사건을 재조명하는 기사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다 검찰로부터 추가적인 정보가 흘러나오지 않자 몸이 달았다. 먹이가 줄어들자 언론은 스스로 사냥에 나섰다.
박혜진과 이경수가 고등학교 동창 사이였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어느덧 언론의 관심은 둘 사이 관계로 넘어갔다. 첫사랑 이야기로 확대되었고 혜진과 친했다고 주장하는 동창생이 등장했다.
“둘은 몰래 사귀었기 때문에 주위에서 잘 몰랐을 겁니다. 저도 졸업 후에야 알았을 정도니까요. 혜진이가 술 취해서 지나가는 말로 했는데 눈치를 챘던 거죠. 그때 되게 놀랐어요. 혜진이는 독서량이 엄청났고 인문학적인 감성이 대단했습니다. 또래 남학생들은 대화 안된다고 쳐다도 안 봤거든요. 그런 혜진이 평소 이미지와 안 어울리게 야구선수와 사귀었다는 게 정말 의외였습니다.”
사건 발생직전까지 둘의 관계가 이어졌을 것이라는 말로 인터뷰는 끝을 맺었다. 이어 갖가지 추론이 뒤따르며 등장인물은 늘어났고 스토리의 외연은 확장되었다. 주변 정황을 교묘하게 풀어 헤쳐 이경수가 박혜진을 죽였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사망 당시 박혜진이 임신중이었다는 기사가 올라오면서 의혹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여자 뱃속에 애가 있었대. 정말 충격적이지 않아?”
“둘이 사귀었다며? 보나마나 이경수 아이겠지. 진짜 무서운 놈이야. 어떻게 자기 애까지 가진 여자를 그렇게 죽이냐?”
“이경수가 죽였대?”
“보면 몰라? 뻔한 스토리지. 여자가 성가시니까 덜꺽 겁은 나고 자기 앞길에 방해될까 봐 죽인 거겠지. 자살로 위장해서.”
“자살로 위장하기에 야구장은 좀 그렇지 않아? 본인이 의심받기 딱 좋은 장손데? 몇시간 전까지 경기를 했던 곳이래잖아.”
“그럼 야구장 덕아웃 벤치에서 자살한다는 건 말은 되고? 급하게 자살로 위장하려다 보니 그랬을 수도 있지.”
박혜진은 9년전에 죽어 사라진 게 아니라 아직도 이경수 곁을 맴돌고 있었던 것이었다. 말은 퍼지며 각색되었다. 각색된 말은 가속도가 붙어 더 빠르게 전파되었다. 언론은 이경수의 사생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과거 아이돌 가수와 스캔들이 재등장했고 여배우, 아나운서 등과 교제설 등이 쏟아졌다. 메이저 신문, 공중파뿐만 아니라 유튜브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자극적으로 기사를 뽑아냈다.
기자들 등쌀로 이경수는 경기장에 출입할 때 다른 선수들과 같이 다닐 수가 없었다. 시선을 피해 혼자만 몰래 구단전용 출입구로 드나 들었다. 타석에 서면 관중들의 손가락질과 수군거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경기 집중이 잘 안되어 삼진을 당하기 일쑤였고 수비에서도 실책을 저질렀다.
이경수의 과거를 폭로하는 새로운 기사가 뜨면서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예전 피닉스 구단 직원과 후배 선수가 갑질, 폭언, 폭행을 당했다고 증언을 했다. 기사는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여 적나라하게 묘사를 했고,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모든 언론에서 비판과 우려를 쏟아냈고 팬들도 동참했다. 비난이 사그라들지 않자 소속 구단은 언론사에 사죄문을 배포했다.
사죄문으로 비판이 잦아들 즈음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서서히 꺼져가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유명 여배우 남편, 프로야구 선수에게 손해배상 청구>, <현직 프로야구 선수 불륜설에 휘말려>
여배우 남편의 주장이었는데, 프로야구 선수가 자기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했다. 불륜으로 가정파탄이 났고 이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는 기사였다. 여배우는 익명으로 숨었지만 연예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영화 <유흥>에 출현했던 배우라는 걸.
프로야구 선수의 실명은 금방 SNS를 통해 퍼졌다. 호크스 구단 홈페이지는 이경수에 대한 비난 글로 도배되었다. 지금까지 논란이 된 기사는 추정 아니면 과거 사건이었다. 하지만, 불륜 사건은 진행형이었기 때문에 반응은 뜨거웠다. 10년전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각자 결혼 후에도 만남은 계속되었다고 한 유튜버가 주장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도 같이 제시되었다.
“갑질, 폭언, 폭행에 이제는 불륜까지. 정말 가지가지 한다.” “아무리 야구 잘하면 뭐해? 인성이 저 모양인데.” “구단에서는 뭐하지? 저런 인간 안 자르고.”
이경수의 파렴치하고 부도덕함에 팬들은 분노했고, 비난은 쇄도했다. 구단 홈페이지뿐만 아니라 KBO 홈페이지까지 가서 이경수를 욕했다. 당장 야구계에서 퇴출시키라는 댓글이 쏟아졌다. KBO는 잔여 경기 출장금지라는 징계를 내림으로써 여론에 답했다.
호크스 구장 내 위치한 구단 사장실 회의용 테이블에 사장과 이경수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요즘 소송 준비 때문에 바쁘다며? 재판 시작도 안 했는데 왜 그렇게 말이 많은지.” 사장은 여배우 남편이 제기한 손해배상 건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남편이라는 작자가 근거도 없는 말을 자꾸 언론에 흘리니까 그런 겁니다.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대응은 변호사가 하고 있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출장정지 당한 지 한달 정도 됐지? 당진 생활은 어때?” 이경수는 KBO의 출장금지 조치 후 2군 구장이 있는 당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할 만합니다.”
“오늘 보자고 한 것은 FA 재계약 때문이야. 작년에 2년 계약했으니 올해 재협상 해야되잖아. 시즌 마치고 연말에 해도 되지만 빨리 결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게 서로를 위해 좋을 듯해. 2년 동안 우리 호크스를 위해 열심히 뛰어준 것 고맙게 생각해. 작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10년만에 최고의 성적을 거둔 것도 경수 공이 컸어,”
사장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했고, 이경수는 예상한 듯 담담히 들었다.
“재수사건은 잘 지나갔지만 다른 사건들이 줄줄이 터져 막아보려 했지만 불가항력이었어. 워낙 여론에 민감한 사건이다 보니 시간이 지나도 상황이 좋아지질 않으니 참 안타까워. 우리와 인연은 여기까지 인 것 같네. 놔줄 테니 다른 팀 알아봐. 나이는 있지만 올해 성적 좋았으니 갈 만한 팀 없겠어?”
이경수는 사장과 어색한 악수로 2년 동안의 호크스 생활을 마감했다. 다음 날 기다렸다는 듯 FA 계약 해지됐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사적인 문제로 골치를 앓았던 구단이 조기에 결별 선언했다는 논평이 따랐다. 이경수를 잘 내보냈다는 댓글이 넘쳐났고, 일부 남은 호크스 열성 팬들도 등을 돌렸다.
한달 뒤 박혜진 재수사 건이 불기소 처분됐다는 기사가 조용히 올라왔다.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였다.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도 있었으나 비난의 대상이 무대에서 사라진 뒤라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FA 계약 해지 후 도피처가 되었던 당진에서 나와 고립된 생활을 시작했다. 평소 선후배 관계가 안 좋았던 데다가 불미스러운 일로 주위에 사람들이 뜸했다. 집에 주로 있다 보니 사소한 일로 아내와 다투기 시작했다. 여배우 소송 관련 진실공방이 가속화되면서 아내와 갈등은 깊어졌다. 싸움의 횟수와 강도는 커져 갔고 유치원 다니는 아들의 울음소리도 잦아졌다. 나중에는 부부간 대화조차 나누지 않게 되었다.
시즌이 끝난 후에도 이경수와 협상에 나서는 팀은 없었다. 연말이 가까웠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로야구 시장에서 더 이상 상품가치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미련을 접고 은퇴하기로 결정했다. 몇일 후 저녁에 아내가 대화를 요청했다.
“우리 여기서 헤어져. 그게 서로를 위해서 좋지 않을 까 해. 당신의 실체를 알고 난 뒤에도 참고 지내보려 했는데 도저히 안되겠어. 내가 못살 것 같아. 그만 정리하자.”
아내는 결심이 확고한 듯했고 거침없이 말을 이어 갔다.
“애는 내가 키울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양육비는 필요 없고 재산문제는 당신이 하자는 데로 할 테니 정리해서 말해줘.” 잠시 후 아내는 가방을 챙겨 들고 애와 함께 집을 나갔다.
우울한 밤에 혼자 남은 이경수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알코올이 누적되면서 닥쳐온 오늘이나 그려갈 내일보다 지나온 어제가 생각났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갈수록 안타까움이 원망으로 바뀌면서 자책대신 분노가 끓어올랐다.
‘민검사, 너 때문에 내 인생 완전히 망가졌다. 야구도, 결혼생활도 모두 끝나 버리고 말았어. 기자들 떼거지로 몰려오게 해서 망신 준 거 절대 잊지 않을 거야. 그것만 아니었으면 예전 사건들도 터지지 않았을 거야.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길래.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만 두지 않을 테니까.’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남 탓을 하며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쏟아 냈다.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후회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근본 원인을 철저히 외부로부터 찾았다. 눈을 감고 자신을 돌아볼 줄을 몰랐다. 이경수의 12월 마지막 밤은 분노와 저주로 물들었다.
비슷한 시각 동부지검 근처 해물찜집. 준혁은 부장검사와 소주잔을 들고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처음 자리에 앉을 때는 간단히 반주만 할 생각이었으나 자리가 길어졌다. 박혜진 재수사 관련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소주잔 비워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옛날 박혜진 수사를 담당했던 양재준 검사가 지금 중앙지검에 있잖아. 그것도 반부패 담당 차장이니 얼마나 파워 있겠어. 유력 대선 후보 라인이라는 소문도 있고. 그렇다고 우리 차장이 양재준 차장 보호하려고 한 건 아니었던 것 같아. 다른 루트에서 강하고 노골적인 외압이 들어온 느낌이었어. 순전히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준혁이 소주잔을 한 번에 비우면서 되물었다. “다른 루트요?”
“검찰 조직 밖에서 치고 들어온 게 아닐까 해. 우리 검사장하고 평소 막역하게 지내는 중견 재벌그룹 오너인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냄새가 난다는 거야.”
외부 기업 쪽에서 압력을 넣을 만한 곳은 이경수 쪽 말고는 있을 리 없었다. 이경수 장인이 중견 그룹 오너라고 했으니 맞을 듯했다. 씁쓸한 기분으로 몇 잔을 더 비우고 난 뒤 부장의 격려와 내년도 다짐으로 술자리는 끝이 났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부장의 외압 이야기가 떠올랐다. 차장이 왜 태도를 바꿔 불기소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는지 이해되었다. 이경수 장인의 압력으로 사건이 꼬꾸라졌다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술이 취해서 그런지 감정이 격해지며 씩씩거렸다. 답답해 창문을 열자 찬 바람이 파도처럼 얼굴에 부딪혔다.
‘결백한 척 별의별 억지는 다 부려 놓고선, 비겁하게 장인한테 기대기나 하고. 정말 비열하고 치졸한 놈.’
소환조사 때부터 이경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협조적이기도 했지만 인간성 자체가 싫었다. 뼈속까지 자기 중심적인 데다가 여자를 수단으로 여겨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졌다. 이익을 쫓아 인간관계를 맺어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 약한 전형적인 속물이었다.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박혜진 죽음을 대했던 뻔뻔한 태도가 생각나 욕지기가 올라왔다. 자기 애를 가진 여자의 목숨을 앗아 갔으면서도 몇 개월 뒤 결혼을 한 인간이었다.
‘두 번이나 법망을 피해 다니고 대단해. 지금은 내가 물러서지만, 내 앞에 다시 나타나는 날 너는 영원히 파멸할 줄 알아! 이 세상에 참다운 정의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마.’
12월 마지막 밤, 준혁의 가슴엔 분노와 강철같은 결기가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