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어렸을 때 남들에게 그렇게 했으니까!
무릇 모든 생물은 살아있을 때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었을 때 시커멓고 딱딱하다. 나도 그렇다. 살아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었을 때는 시커멓고 딱딱하다.
나는 이른 봄날 추위를 견디며 무리 지어 꽃을 피운다. 비록 작아 고개 숙여야 하지만, 멀리서 잘 보이도록 무리 지어 핀다. 꽃은 보여야 사니까.
벌레들이 나를 성가시게 할까 봐 이른 봄에 꽃을 피우지만, 그 대가도 만만찮다. 간간이 밀려드는 추위는 어떻고 또 예기치 않은 비바람으로 떨어지는 수모도 당한다. 그래도 꿋꿋하게 버틴다.
내 친구인 벌 나비가 이른 아침부터 찾아왔다. 나도 올해 처음으로 친구을 맞이했고, 벌 나비도 나를 처음으로 맞이했다. 달콤하다. 친구는 이리저리 요리조리 나를 탐하면서 파고들었다. 나는 친구지만 내 몸을 온전히 맡기고 꿀과 향을 그에게 주었다. 그 친구도 나에게 보답이라도 하듯이 내 수술을 암술에 전해 준다.
나는 요행(徼幸)으로 벌 나비의 친구가 되었다.
세찬 비바람이 분다. 와르르 몸을 떠니 꽃이 수두룩 떨어진다. 물결 따라 흘러가는 내 모습조차 아름답다. 하지만 애처롭게도 매달려 있는 친구도 있다.
아직 사랑을 나주지 못한 친구들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내 친구가 곧 찾아올 거예요.”한다. 그는 그제사 수명을 다하고 떨어졌지만, 그렇지 못하고 날것으로 떨어진 친구도 많다. 오호라, 이 슬픔이여.
“꽃이 지기로 소니 바람을 탓하랴” 그렇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그러하다.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내 또한 그러하다.
인간은 꽃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만 나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다. 꽃이 바닥으로 떨어진 날 나는 기쁨의 눈물로 작은 씨방을 만든다. 천둥과 번개, 태풍과 비바람이 시기하여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만, 나는 꿋꿋이 견딘 끝에 탐스럽게 자란다.
나는 요행(徼幸)으로 땅에 떨어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늦가을이 되자 북풍이 불었다. 나는 금세 푸른 내 옷을 붉은색으로 갈아입고 땅으로 떨어진다. 새들이 나를 알아보고 먹기 시작한다. 아아, 나는 이제 품 안의 자식이 떠날 때라는 것을 알았다.
첫째는 바위틈에 자리 잡았고, 둘째는 숲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고, 셋째는 냇가에 자리 잡았다. 그것은 어미인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새가 한 일이라 나도 어쩔 수 없다.
봄이 되자 자식들 몸에서 여린 싹이 돋기 시작한다. 여리고 연약하기 이를 데 없다. 작은 벌레에도 몸살을 앓고 혹 노루라도 뜯어 먹을까 봐 숨죽여 기다려야 했다. 아무리 어리고 연약해도 햇볕은 쬐고 물은 마셔야 한다.
내 자식 가운데 첫째는 바위틈에서 말라 죽고, 셋째는 냇가에서 물에 빠져 죽고, 둘째만 살아 남았다.
둘째는 성큼성큼 자랐다. 겨울이 되어 얼어 죽지 않았고, 봄이 되어 말라 죽지 않았고, 여름이 되어 부러지지 않았으며, 가을이 되어 땔감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나는 알았다. 나는 남들보다 볕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키가 더 커야 하고, 남들보다 물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뿌리를 더 깊숙이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내가 아무리 강하고 단단해도 곧 고목이 된다는 사실을. 썩은 둥치에 벌레가 집을 짓게 내버려 둬야 하고, 썩은 뿌리에 다른 친구가 싹을 틔우게 내버려 둬야 한다는 사실을.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피할 생각이 없다. 나도 어렸을 때 남들에게 그렇게 했으니까!”
어느 날 둘째로부터 온 편지다. 이제 다 컸구나. 나도 내 할아버지 아버지처럼 그렇게 자연으로 돌아갈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안다. “强大處下, 柔弱處上”, 단단하고 강한 것은 부드럽고 연약한 것 아래에 와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단하고 강한 것이 부드럽고 연약한 것 위에 머물면 죽는다.
어찌 나만 그러할까? 인간세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며,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탄생의 무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