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긍(盧兢, 1738~1790년)은 이가환, 심익운과 더불어 조선 후기 3대 불운한 천재다. 아버지가 홍봉한의 개인 스승이었다는 미움에 과거 시험장에서 과문을 팔았다는 죄목으로 덮어 씌어 평안북도 위안군에 6년 동안 귀양을 보낸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충직한 노비가 있었다. 막돌이다. 그는 제문을 지으면서 “네 배를 갈라보면 필시 불덩이같이 붉은 것이 지상 위로 튀어 오를 것이며, 그것이 평생토록 주인을 향한 핏빛 정성인 줄 알겠노라." 한다. 몰락한 양반을 위해 두 눈을 허여멀겋게 뜨고서 닭보다 먼저 일어나 늦도록 일하면서 머리를 흔들흔들 흥얼흥얼 즐거워하는 모습에 노긍은 부끄러움 느겼다.
배를 가르면 불덩이 같은 붉은 덩어리 그것은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 그것은 모란이다.
까마득한 옛날에 신령들이 사는 나라가 있었다. 하루는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이 무엇이냐??” 하는 경연이 있었는데 ‘장미’가 일등이 된 것에 화가 나서 그만 꽃으로 변하여 모란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장미는 꽃의 여왕이 되고 자신은 꽃의 왕, 화왕(花王)이 되었다고 한다.
어디 예쁘지 않은 꽃이 있으련만 진달래가 피면 김소월을 생각하고, 모란이 피면 김영랑을 생각하게 되고 라일락이 피며 마리아 릴케가 생각나는 것이 우리 세대의 봄날 낭만이다.
꽃의 여왕인 장미는 영국을 상징하며, 꽃의 왕인 모란(牡丹)은 중국을 상징한다. 모두 붉은색이 가장 화려하며, 붉은 장미는 사랑을 뜻하며, 모란은 부귀를 상징한다.
그래서일까? 모란에는 남성의 향기도 난다. 모두 정치화된 꽃이기 때문이다. 신라시대 당 태종이 보낸 그림을 보고 “모란에는 향기가 없구나”를 간파한 선덕여왕의 전략이 대표적이며, 근래에 중국과 수교를 극비로 진행한 외교부의 비밀문서 제목에 ‘모란’을 쓴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하지만, 역시 꽃은 사랑이다. 조선 역사에 왕과 사랑의 단골 주인공인 장희빈, 권력자의 여인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 베일만큼 조심스러운 일이나 그들의 첫 만남의 달콤함은 여느 연인 못지않았다.
숙종은 꽃이 만발한 어느 봄날 창덕궁 비원으로 여러 대신과 후궁들을 불러 모아 <백화연(白花宴>을 열었다. 조선 역사에서 풍류를 무척이나 즐겼던 왕이기에 꽃도 피었겠다 술도 얼큰했겠다 어디 꽃을 주제로 문답이 없을 소나?
“오늘의 연회는 꽃구경이니 누구 꽃 이야기를 하되 특히 짐과 관련된 꽃이 무슨 꽃인지 말하거라. 알아맞힌 사람에게는 후한 상을 주겠노라.”
어떤 후궁은 임금은 만인의 은택이라 옷과 같은 존재이니 목화꽃에 비유하고, 어떤 후궁은 임금은 달처럼 만인을 비추어 주니 달에 있는 계수나무꽃이라 하고, 어떤 후궁은 임금은 만수무강하여 오래오래 성덕을 베풀어야 하니 무궁화라고 하고, 어떤 후궁은 임금은 태평성대 풍류를 이르게 하였으니 됴화(桃花)라 답한다.
모두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데 한 궁녀만 아무 말이 없자, 왕이 가까이 부르자 방년 열일곱에 천하의 절색이라, 그만 홀황(惚恍)하여 “너도 한마디 하거라” 하니 “임금께서는 사람 중에 으뜸이라 꽃 중에 왕인 모란과 같습니다.” 이미 답정너! 홀황한 숙종에게 다른 답이 들어올 리 만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