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적 주체가 되는 일은 육체성을 확인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육체를 통해서만 인간은 타인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구별되니까요. 글쓰기, 낭송, 운동을 주체의 자각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방식으로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글쓰기, 낭송, 그리고 운동은 모두 육체성을 발휘하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를 하고 자주 시간을 내어 낭송을 하며 항상 운동으로 자신을 단련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듣기만 해도 얼마나 윤기 나는 사람입니까?”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한 단락이다. 교수님은 항상 운동을 강조하셨다. 지식을 운용할 수 있는 힘을 지력이라고 하는데, 지력은 운동을 통해 길러지기 때문이다. 책만 보고 있으면 지식이 많은 바보가 될 수 있다. 몸을 단련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 식물이 아닌 동물인 이유다.
도덕경에는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이나 귀하게 여긴다면 천하를 줄 수 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한 대학에는 ‘천자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모두 몸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근본이 흐트러져 있는데 말단이 다스려지는 일은 없다’라는 부분이 있다. ‘몸을 천하만큼 귀하게 여기는 것’, ‘몸을 닦는 것’,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혼자 살지 않는다. 남들과 섞여서 같이 살아간다. 그러려면 서로가 서로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몸뿐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통한다. 몸을 잊고 마음에만 초점을 두면 스스로에게 속을 수 있다. 다이어트에 관한 생각만 열심히 해놓고는 몸이 그대로라고 투덜대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몸이 중요하다.
그럼 몸을 귀하게 여기고 몸을 닦는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이 있을까? 행동, 외모, 표정 정도가 직접적으로 떠오른다. 조금 더 생각해보니 몸매, 자세, 복장도 편입된다. 그러더니 더 확장된다. 처하는 장소, 어울리는 사람, 보고 듣고 느끼는 것까지 몸과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말과 글이 생각났다.
이렇게 보니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운동하는 것 말고는 몸을 귀하게 여기거나 몸을 닦는 것과 관련지어 생각하지 못했다. 역시 인식이 중요하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몸을 근본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