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 답이 제이 셰티의 수도자처럼 생각하기란 책에 잘 나와 있다.
1902년에 사회학자 찰스 호턴 쿨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가 아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나’도 아니다. 나는 ‘당신이 날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라고 나 스스로 생각하는 ‘나’다.”
우리의 정체성은 ‘남들이 생각하는 나’에 온통 파묻혀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남들이 생각하는 나라고 ‘내가 생각하는’ 내용에 파묻혀 있다.
우리의 자아상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본다고 생각하는지와 밀접히 관련된다. 나를 개선하려는 노력의 대부분은 그렇게 ‘상상된 이상형’에 부응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나는 나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했고 내 삶을 살지 못했다. 타인의 시선에 중심을 둔 가짜 나와 껍데기 삶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고 내 삶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다. 이제 나는 남에게 둔 내 삶의 중심을 나 자신에게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멀리 떨어진 호접몽가를 오가는 길은 훌륭한 작업실이 돼 주었다. 이에 대해 제이 셰티는 이렇게 말한다.
“관찰과 평가는 수도자처럼 생각하기 위한 핵심 열쇠고, 그 시작은 공간과 고요다.”
여기서 수도자처럼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로 중심을 옮기는 작업이다. 호접몽가를 오가는 나만의 공간과 고요 속에서 내 것과 아닌 것을 면밀히 관찰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나’로 존재하면, 거기에는 여백이 존재하여 다른 ‘나’들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나’들과 공존할 수 있습니다.”
최진석 교수님의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에 내가 왜 사회성이 떨어지는지 그 이유가 나와 있다. 내가 나로 존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이 참여할 공간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내가 나로 존재하는 것은 내가 진정한 인간이 되어 다른 인간들과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