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지 Oct 30. 2022

중심잡기

 선생님이란 호칭과 거리를 두는 학교로 옮겼다. 이곳에서는 개인마다 다른 선생님들의 별명을 부른다. (예를 들어 별명이 동백인 선생님은 동백! 이렇게 부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선생님들을 길별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통칭한다. 어색한 호칭과 익숙지 않은 문화에 적응하는 것부터 배움에 시작이었다. 내 예상보다 너무도 자유로운 학교의 분위기에 넋이 나가 멀뚱히 자리를 지키기 일쑤였다. 특별히 울리는 종도 없을 뿐 아니라 30~40분씩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여 수업을 듣고 학교로 돌아왔다. 이동할 때는 같이 이동하는 선생님도, 제약도 없었다. 배가 너무 고프면 편의점에서 초코바를 사 먹어도 눈총을 주거나 뭐라 할 사람 하나 없었다. 제시간 안에 안전하게만 돌아오면 되는 당연하지만 어색한 규칙만 잘 지키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버스에서 보내야 했다. 피곤에 찌들어 운이 좋으면 버스 창문에 기대고 잠을 자기도 하고, 혹은 꼿꼿이 서서 손잡이를 잡은 손을 베개 삼아 기대어 자기도 했다. 과제가 너무 많이 밀려있을 때는 노란 채팅어플에서 나와의 채팅에 들어가 글을 써 내려갔다. 폐쇄적인 공간과 한 손으로만 자판을 쳐야 하니 불편한 건 말할 것도 없었고, 작은 화면과 늘어나는 오타에 짜증이 솟구쳤다. 

 집에 도착할 때 하늘은 열이면 열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목욕을 마치면 녹초가 되어 쓰러졌고, 다 읽지 못한 책을 쥐고 잠에 드는 시간도 길어졌다. 이런 나의 바쁨에 신체적인 변화도 생겼다. 조금씩 가벼워지는 몸이 나의 일상에 고단함을 어느 정도 대변해 주었다. 중학교에서 아무리 야구, 농구를 하여도 일정하게 유지되던 체중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체질이 워낙 더위를 많이 타며 땀 또한 많이 흘리기에 여름철에는 아침저녁으로 몸무게의 크게 변하였다. 몸에서 수분이 자주 그리고 많이 빠지니 등교하자마자 기가 다 빨린 사람처럼 앉아있곤 했다. 사람들로 꽉 찬 버스가 답답하여 미칠 것 같을 때는 지각을 해도 좋으니 중간 정류장에서 내려 잠시 쉬다 갔다. 불과 몇 분 전에 입었던 티셔츠는 온몸에서 나온 물로 축축해져 방금 막 빨래를 마친 빨랫감 같았다. 주말이 되어 조금 여유로운 아침을 맞으면 사람에 치여 목 뒤 땀을 훔쳤던 내 모습을 엄마 영에게 그대로 설명한다.

“엄마, 이 학교는 가는 거하고 오는 게 진짜 빡세네요. 제 생각으로는 이것만 잘해도 반은 성공한 것 같아요”

“그래, 바로 집 앞 학교 다니다가 그렇게 다니니까 당연히 힘들겠지. 그래도 다닐만하지?”

“모르겠어요 그냥 별생각 없이 다녀요… 근데 가기 싫다는 생각은 잘 안 들어요. 너무 피곤한 날만 빼면”     

 몸을 쓰는 수업도 많았다. 학교에서 하던 체육과는 많이 다른 신체 활동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용접과 납땜을 직접 해보았다. 공사장을 지나갈 때 멀리서 지커 봤던 불똥들이 내 눈앞에서 마구 튀겼다. 막연하게 ‘저 불똥은 안뜨꺼울까?’라고 생각했던 질문에 답을 몸소 깨닫는다. 무서운 속도로 도는 그라인더를 가지고 철제를 자른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잘려나가는 철제를 보며 무서움과 짜릿함을 동시에 느낀다. 학교에 필요한 행거를 친구들과 함께 만든다. 열다섯 벌은 족히 걸 수 있는 대형 행거를 곧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여 손수 만든다. 철제를 이어 붙이고 바퀴를 달아 완성된 행거를 용달 트럭에 실어 이동시킨다. 교실 한편에 놓여서 옷이 걸려있는 행거를 보며 무언가 어색함을 느낀다. 분명 무언가를 완성했지만, 점수도 평가도 없이 그냥 사용하면 되는 이 상황이 낯설게 느껴진다.     

 농사도 지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해보는 일이 너무도 많은 학교였지만, 그중에 꽃은 농사였다. 간단히 심고 물 주고 햇빛 쬐어주면 자라는 줄 알았던 그동안의 무지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농사에서 부지런함은 기본이고, 생명을 돌보아야 하는 일이기에 몸과 마음을 계속 써야 했다. 더운 여름날에 삽질도 고되었지만 무엇보다 힘든 것은 언제 어디서든 비상이 걸릴 수 있는 것이었다. 농사 수업이 끝났다 해서 작물을 꽁꽁 얼리는 겨울 날씨와 타들어가는 햇빛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기에 일 년 내내 집중해야 했다. 여름에는 더운 날씨를 잘 버티고 있는지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옥상으로 올라가 확인했고, 겨울에는 냉해를 입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방학기간에도 농사 수업은 지속되었다. 식물에 물을 주기 위해 평소보다 이른 아침에 나와 1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학교로 향한다. 농사일이 힘들다고는 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는 말이 입에서 쉼 없이 나온다. 심지어 어느 정도의 창의성도 필요하다. 계속해서 내가 나에게 숙제를 줘야 했다. 몸이 많이 움직이고 마음을 많이 쓰는 만큼 건강하게 자라는 게 눈에 보이기에 어떻게 하면 더 잘 자랄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해야 했다. 식물이 똑바로 자라지 않는 것 같으면 지주대를 세워 적당히 묶어주고, 지주대를 세우기에는 너무 연약한 상태라면 근처에서 나뭇가지로 대신하는 재치가 필요했다. 계속해서 내 단순함과 유연하지 못한 생각에 맞서야 했다.       

 처음에는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만만했는데 다니면 다닐수록 벅차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주는 질문거리만으로 충분히 머리가 아팠다. 수업에 들어가면 친구들과 선배들은 질문이 넘쳐날 때 나는 구석에 앉아 이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모르는 내용을 말할 때면 눈은 뜨고 있지만 정신은 이미 저 멀리 나가 있었다. 젠더, 소수자 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항상 말을 하기 꺼려했다. 수업 첫날 뭣도 모르고 했던 말에 친구들에게 질문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분명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단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다. 혼자 되새겨보아도 앞뒤가 맞지 않는 내 생각과 말에 답답함이 커져갔다. 

 한 번은 혼전순결이라는 단어를 꺼내 놓았다가 열개도 넘는 질문과 마주해야 했다. 선배들과 친구들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올랐고 이는 꼭 나를 발가 벗기는 것 같았다. 나의 생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내가 얘기하는 순결의 무엇이고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종교적인 이유이면 왜 그런 것인지. 차마 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다채로운 질문들이 쏟아졌다. 당연히 나는 이 모든 질문에 성실히 답하지 못했고, 과열된 열기는 선생님의 중재와 도움으로 겨우 사그라들었다. 질문이란 것을 한 기억이 까마득한 나에게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으라 함은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옛 습관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학교가 재미있다는 생각보다 적응이 어렵다는 생각이 더 커지니 ‘혼자서도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이와 비슷하게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공연이나 예술활동을 찾아 관람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엄마 영을 찾는다.

“엄마, 요즘 자퇴 생각하는 애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혼자 공부해보면 어떨까 하는데…”

엄마 영이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고 이유를 묻는다.

“그냥… 학교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았으니까, 저는 영화하고 싶기도 해서 여기서 하는 방법처럼 비슷하게 제가 계획 짜고, 그리고 영화하는 대학교 준비할까 해서요. 그리고 학교가 좀 비싸잖아요.”

“그래? 누나하고도 한 번 얘기해봐. 근데 엄마 생각에는 끝까지 다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솔직히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핑계일 뿐이었다. 학비는 부모님이 내주신다고 했으니 그냥 생각하지 않고 다닐 수도 있었지만, 예상보다 힘들고 어렵다는 마음이 커지니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부분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재미있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다니고 싶어을 것인데, 적절한 타협점을 찾고 있는 내 모습 속에서 혼란스러움이 커져간다. 

    

 많은 과제와 정신없는 일정, 그리고 학교를 도망갈 구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독일 여행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떠나기 석 달 전부터 총 10권이 넘는 책을 읽으며 동기 그리고 선배들과 토론 그리고 강의를 들으며 공부를 해 나아갔다. 책을 읽고 리뷰를 쓰고, 강의를 듣고 소감문을 작성하고, 여행 계획을 짜고, 영상을 찍을 준비를 하니 그동안의 바쁨은 예행연습 수준이었다.

 독일은 난민, 통일, 그리고 환경(미세 플라스틱, 기후위기 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행을 떠났다. 여행이라 한들 강의를 듣고 박물관을 관람하고 밥을 사 먹고 잠시 자유시간을 갖는 단순하지만 고된 일정이었다. 매일 저녁에는 오늘 하루를 정리하는 의미로 친구들 그리고 길별(선생님)과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20~30명이 모두 한 번씩 이야기하니 밤 10시에 끝나면 빨리 끝나는 것이었고, 새벽을 넘기는 시간까지 계속해서 대화가 이뤄졌다. 너무 피곤한 날에는 슬쩍 졸기도 하고 필기하던 공책에 혼잣말을 써 내려가기도 했다. 대부분 약간의 비속어가 섞여있었다. 그중에 그나마 남에게 보여줄 만한 글은 “벌써 11시야 미치겠네.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XX 살려줘” 같은 문구들이 공책에 줄을 이루었다. 

 여행을 갔다 오고 나서도 여유는 없었다. 오후 열 시, 열한 시까지 학교에 남아 영상을 만들고 과제를 했다. 집에 가기 너무 늦어진 시간이면 24시간 카페에 들어가 쪽잠을 자며 과제를 했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도무지 내년 계획을 세울 힘이 나지 않았다. 당장 주어진 과제만 하는 것도 너무 빠듯하여 자퇴해서 멋지게 계획을 세워 자기 주도적으로 살겠다는 생각은 쓸데없이 시간 잡아먹는 망상이 되었다.

 그렇게 2019년을 맞이했다. 괜찮은 포부만 늘어놓았던 내가 막상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으니 불안했다. 무엇보다 독일 여행 이후에 조금 더 편해지고 재밌어진 학교생활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갔다. 혼자서는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고 이런 내가 찾아갈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이전 07화 조금이라도 더 자신 있는 쪽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