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의 기억 속 아빠는 엄하고 자식들에게 직접적인 애정 표현을 많이 하시는 분은 아니셨다. 요즘처럼 다정한 아빠들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였다. 자식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알려주는 교육프로그램도 책들도 없던 시절이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엄격한 아빠였지만 나름대로 자식들에게 애정을 표현하려고 노력하셨던 것 같다. 지금도 기억 속에 아빠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들 몇 개가 강하게 남아있다.
어릴 적 나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였다. 그 시절 나에게 책은 재미없는 공부 중 하나였다. 그런 날 위해서 어린 시절 아빠는 자기 전에 책을 읽어주시는 노력을 기울이셨다. 잠들기 전 독서 습관을 만들어주신 것이였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동네에 있는 책방에 데려가서 읽고 싶어하는 책들을 대부분 사주셨었다. 나중에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한 편 쓰면 500원씩 용돈을 주시는 노력도 기울이셨다. 어린 시절 그런 아빠의 노력 덕분인지 몰라도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때 같은 반 남자친구와 장난을 서로 쳤었다. 그때 나는 친구들과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처음에는 놀이에서 시작한 장난이 나중에는 서로 감정이 상하면서 내가 그 친구의 실내화를 학교 바깥 창문 끝 손이 닿기 힘든 곳에 두었었다. 그 친구는 그런 행동을 한 나에게 화가 나서 주먹으로 날 때렸고 한 쪽 코에서 피가 흘렀었다. 나는 울음을 터트렸고 선생님이 오셨다.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선생님께 불려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우리는 서로 혼이 났고 날 때린 그 친구는 사과를 했다. 그것으로 이 사건은 끝났었다. 그때는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싸운다고 부모님에게 선생님이 알리는 경우도 거의 없었고 부모님이 학교에 오는 경우도 많지 않았다. 대부분 친구들끼리 싸움은 그냥 선생님 선에서 넘어가던 시절이였다. 하교 후 나는 집에 가서 오늘 친구가 날때려서 코피가 나서 속상했다며 이야기를 했다. 아빠는 그 친구가 다음 번에 날 또 때리면 아빠가 학교 앞에 찾아 가서 혼내주겠다고 하셨다.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빠가 그렇게 말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린 내 마음이 든든해졌다. 영원한 내 편이 있다는 사실에 행복한 마음도 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 반 친구 중에 소위 일진 같은 A라는 친구가 있었다. 내면은 착한 친구였는데 다른 반 일진 친구들과 어쩌다보니 친해져서 함께 어울려서 노는 친구였다. 나와 A친구, B친구 이렇게 3명이서 반에서 친하게 지냈었다. 2학기의 어느 날 A친구가 다른 반 친구들과 담배를 피워봤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 얼마전에 담배 피워봤어. 혹시 다음 번에 담배 구하게 되면 같이 피워볼래?"
"그래 다음번에 구하면 같이 펴보자."
B친구는 살짝 고민하는 듯 했지만 다음 번에 담배를 피워보겠다며 약속했다.
"난 담배는 안 피고 싶어."
나는 친구의 제안을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한참 사춘기로 일탈을 하고 싶었던 건 맞았지만 담배는 내가 피고 싶은 대상이 아니였다. 호기심으로 피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았었다.
우리 아빠는 체질적으로 술이 맞지 않아서 술을 드시지 않는 분이셨다. 대신 힘든 일이 있으시거나 스트레스를 받으시면 담배를 피우셨다. 우리를 혼내시고 나서도 항상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셨다. 어린 나에게 아빠가 담배 피우는 모습은 항상 무섭게 다가왔고 나는 아빠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너무 싫었었다. 나에게 담배는 항상 부정적인 대상이였다.
일주일 후 학교가 뒤집어졌다. 다른 반 친구들이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걸린 것이였다. 그래서 학교 선생님들은 담배 피운 학생들을 모두 다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셨었다. 담배를 피우다 걸렸던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동안 같이 담배를 펴본 친구들을 적어내라고 했다는데 그 중 어떤 친구가 내 이름을 적어서 냈다고 한다.(내 추측으로는 그냥 자기 잘못을 무마하기 위해서 생각나는 친구들은 적어낸게 아닌가 싶다.) 우리 반 담임선생님은 정작 다음 번에 담배를 피우기로 약속을 했었던 B친구는 의심하지 않으셨고 나와 A친구만 수업이 끝난 후 남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담배를 핀 사실에 대해서 모두 사실대로 적으라고 하셨다. 난 정말로 한 번도 담배를 핀 적이 없다고 선생님께 설명했고 반성문에도 핀 적이 없다고 적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혹시나 이 일로 엄마아빠에게 혼이 날까 염려가 되었다. 선생님이 집에 알리는 것보다 내가 이야기를 하는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빠가 퇴근해서 집에 오셨고 용기를 내서 아빠에게 말을 꺼내보았다.
"아빠, 이번에 학교에서 담배를 핀 친구들이 있는데 선생님이 내가 담배를 피웠다고 생각하셔요. 하지만 난 정말 핀 적이 없어요."
"너가 정말로 피지 않았다고 하면 선생님이 그렇게 생각해도 아빠는 너가 담배를 안 폈다고 생각할께."
계속 고민하고 마음 졸이다 힘들게 꺼낸 말이였는데...평소 엄하셨던 아버지가 날 이렇게 바로 믿어주실지 몰랐다. 학교에서부터 혼날까 걱정했던 마음이 한 순간 녹아내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빠가 내 편이여서 마음이 든든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든다. 내 아이에게 비슷한 순간이 오면 나는 바로 아이의 말을 믿어줄 수 있을까? 평소에는 엄하고 애정표현도 하지 않으셨지만 이런 몇몇 사건들에서 보여주었던 아빠의 굳건한 믿음이 내가 커가면서 삶에 흔들릴때마다 나를 지켜주었던 것 같다. 나도 아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