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0. 생에 첫 스쿨캠프 2

by 작은 브러시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미국의 심장 전문 의사인 로버트 엘리엇이 한 말이다. 개인적으로, 솔직히 말하자면 난 이 말에 동의하기 힘들다. 아니, 내가 피하고 싶은데 어떻게 억지로 즐기지? 난 못하겠는데? 내 생각이 어리숙한 걸 수도 있지만 어찌 됐든 아직도 그런 의문들이 남아있다. 만약 당신이 힘든 일도 즐겁게 이겨내는 사람이라면 정말이지 존경의 박수를 보내 드리고 싶다. 만약 그렇지 안다면, "우리 같이 힘내봅시다!"라고 외쳐드리고 싶다. 내 5학년 스쿨캠프를 이런 마음가짐으로 참여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럼 조금 더 씩씩하게 버텨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예상하시는 것처럼 난 그리 낙천적이지 못했다.


첫날은 그저 첫날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무시무시한 영화 한 편의 짧은 예고편 같은 거였다. 진짜 무시무시한 그 영화는 첫날이 지나면서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는 바로 스쿨버스를 타고 활동 장소로 향했다. 늘 푹푹 찌는 무더위 속에서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라가며 꼬박 반나절을 밖에서 보냈다.

음... 정말 별에 별 걸 다했다. 카약킹, 등산, 자전거 타기, 장애물 넘기 등등... 휴..

가장 좋았던 활동은 카약킹이다. 얕은 바다에서 카약을 타고 노를 저으며 가보는 것이었다. 운이 안 좋게도 짝꿍을 찾지 못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힘겹게 노 저어야 했지만, 금방 익숙해지니 즐기게 되었다. 그리고 카약에는 앉아있을 수 있었고 다른 활동보다는 몸을 적게 써서 꽤나 편했다.


가장 싫었던 활동은.. 생각해 보니 딱히 없는 것 같다. 거의 다 힘들었고 재미도 없었지만 참여하고 나니 보람 있었던 것 같다. 가장 좋았던 건 아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자전거 타기였다. 땅에는 온갖 장애물 코스가 설치되어있었고 그 장애물 코스를 완주해야 됐다. 난 자전거를 그럭저럭 괜찮게 탔었다. 평평한 땅에서만 말이다. 하필 장애물 코스 땅이 거칠고 울퉁불퉁한 흙길이었기에 자꾸만 흔들리는 자전거를 꼭 붙잡고 나름대로 힘겹게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 언덕 하나가 튀어나왔다. 아니, 지금도 힘든데 언덕이 웬 말인가, 올라가는 것부터가 관건이었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뒤따라 오는 자전거들이 있었기에 하는 수 없이 젖 먹던 힘 다 짜내어 겨우겨우 올라갔다. 그래, 올라가는 거 말고 내려가는 게 역시 문제였다. '휴... 이제 무사히 내, 려, 가... 자아자아아악!!' 이런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최대한 조심히 내려가고자 했지만 우당탕탕 내려가버린 것이었다. 브레이크를 밟을 타이밍을 놓쳐버리고만 것이었다. 다행히 지켜보던 안전요원 선생님이 재빨리 잡아주셨다. 정말 십 년 감수할 뻔했다.


첫 번째 고비 이후로는 다시 열심히 평평한 길은 아니지만 언덕은 아닌 울퉁불퉁한(?) 그나마 안전한 길을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내달렸다. 그런데 곧바로 또 다른 언덕 = 두 번째 고비가 나와버린 것이었다. 이번엔 기필코 해낸다는 도전정신으로 또다시 힘껏 언덕을 오르고야 말았다. 이번 도전은 그리 좋은 도전이 아니었다.

자전거로 내려가기 시작했고 '오케이, 지금 딱 브레이크를 잡자'하면서 잡았는데.. 어? 안 멈추네? 그 순간 나의 자전거는 날았고 퍽퍽한 땅과 아름다운 입맞춤을 하였다. 그 순간 나는 진짜 블랙아웃 되고 아, 죽나 보다 생각했다. (그땐 자전거가 공중에 떠올랐다는 충격이 컸다.)


그렇게 처참히 땅바닥에 떨어졌다. 양쪽 다리 모두 새빨간 피멍이 들어있었다. 담임쌤이 급하게 내 상태를 확인하러 오셨다. 너무 속상하고 쪽팔려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괜히 도전한 것 같아 너무 후회되었다.

긴급처치를 끝낸 내게 쌤이 곧 숙소로 돌아갈 텐데 너무 힘들면 따로 버스에 타서 돌아가도 된다 하셨다. 잠시 망설여졌지만 끝내 거절했다.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다른 쌤들과 친구들과 또다시 자전거를 타서 숙소에 도착했다. 물론 많이 힘들었지만 서로 응원하면서, 거의 다 왔다고 격려하며 가니까 힘이 났던 것 같다.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낸 보람찬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런 힘든 활동들로 지친 하루 끝에 잠자리에 들어도 쉽사리 잠이 오지 않고 계속 뒤척였다. 그러니까 낮과 밤 모두 각각의 이후로 지치곤 했다. 밖에서는 몸이 지쳤고 안에서는 마음이 지쳤다. 친구들과 한 방을 처음 같이 쓰며 지내다 보니, 참 서운한 일들도 많고 불편한 일들도 많았지만 꾹 참아야 했다. 그리고 몇몇 아이들은 참던 것이 터져 서러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면 우린 안절부절못하며 사과를 하고 위로했다.

이틀 동안은 방을 썼지만 남은 이틀은 텐트에서 자야 했다. 물론 그랬지만, 숙소를 옮긴 첫날부터 어지럽고 머리가 지끈거려서 보건실에 머물다가 그날밤 만약에 대비해 준비된 방에서 나와 같이 아파서 보건실에 있던 친한 친구 Si양과 잤다. 난 워낙 낯선 환경에 예민하다 보니 또다시 오랜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어찌어찌해서 잠에 들었다 생각했는데 순간 눈이 떠지고 왠지 모르게 Si양의 침대 옆에서 자연스럽게 "엄마!"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전혀 의식하거나 의도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자 잘 자고 있던 Si양이 약간 짜증 난단 투로 뭐라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음.. 지금 생각하니 좀 창피하다..-.-)

다음 날에도 똑같이 어지러움이 몰려왔고 보건쌤께 또다시 아프다고, 활동하러 못 가겠다. 말씀드렸다. 체온을 쟀지만 저번처럼 열은 정상이었다. 그 뒤 바로 Si양의 말이 날카로운 화살처럼 꽂혔다.

"(번역) 너 열도 안 나는데, 그냥 가지 그래?"

물론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겠지만 그때 아주 예민했던 상태였던 나에게는 몇 배는 더욱 못된 말처럼 들렸다. 약간 이런 식으로 말이다.

"너 아프지도 않으면서 은근슬쩍 빠지는 거냐?"

가뜩이나 친한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까 너무나 서운했고 또다시 펑펑 울었다. 컨디션이 좀 나아지자 그냥 가기로 맘먹고 신발을 신고 나가려 하는데 어라? 내 신발이 없었다. 물론 수도 없이 많은 신발들로 복잡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정말 없었다. 순간 너무 충격을 받아서 덜덜 떨며 울고 말았다. 쌤께 혼날까 봐 정말 두려웠다. 그래도 하는 수없이 말씀드렸다. 그런데 예상과 아주 달리 담임쌤은 근처에 있는 모든 쌤들과 활동요원분들 동원해 내 신발을 열심히 찾아보셨다. 심지어 괜찮다고 위로까지 해주셨다. 아까 일 때문에 미웠던 Si양은 못 찾으면 자신의 신발을 신고 가라고 신발을 양보해 줬다. 그러자 미웠던 게 싹 사라졌다.

그리고 모두가 포기할 때쯤 한 활동요원분이 싱글벙글 웃으며 내 신발을 가져다주셨다. 알고 보니 꽤나 생뚱맞게 한 텐트 앞에 있었다 하셨다.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ㅎㅎ) 아무튼 이 일로 모두에게 너무 크게 감동받고 인류애가 풀로 충전되었다.




처음에 얘기한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명언과 반대로 내 캠프생활은 "피할 수 없으면 울어라"가 되어버렸다.. ㅎ

이렇게 길고 긴 4박 5일을 거의 울며 보냈지만 분명 즐거웠던 일도 참 많았다. 무엇보다 이 캠프로 인해, 정말 인간은 뭉쳐야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동물이란 걸 깨달았다. 혼자서는 막막해도 서로 의지하고 믿어주면서 용기를 조금이나마 낼 수 있었다. 그냥 너무나 정말로 감동이었다. 원래도 거의 다 착했지만, 뭔가 캠프에 있을 때는 모두가 힘든 걸 아니까 1.5배씩 조금 더 관대해졌던 것 같다.

그렇게 4박 5일이라는 짧으면서도 긴, 강렬하고 의미 있던 시간이 지나고 벌써 2년 전의 일이 돼버렸지만, 아직 난 그때의 따뜻한 분위기를 느낌으로 기억한다. 그럴 때마다 씩 미소가 지어지곤 한다.


스쿨캠프; 말레이시아에서의 카약킹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