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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육수 Jul 22. 2024

아빠

연재소설

10. 아빠


수인은 마트에서 장을 보다 맥주코너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살까 말까 잠시 망설였지만 곧 500ml 캔 4개를 집어 카트에 넣었다.


시댁에 다녀온 뒤로 수인과 남편이 말을 안 한 지 5일 정도 지났다. 수인이 시어머니의 말에 공격을 당해도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 때문이냐고 추궁하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보다, 남일처럼 멀뚱히 쳐다만 보는 남편이 죽도록 미웠다.


네가 그러고도 남편이냐고, 네가 아빠 자격이냐 있냐고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할 힘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수인의 냉랭함이 온몸에 퍼져선지 남편도 말을 걸지 않았다. 5일 내내 집안은 묵직한 기운만 맴돌았고 그 분위기를 준후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방방 뛰기만 했다.


수인은 남편이 먼저 미안하다고, 화해의 제스처를 취해주길 바랐지만 남편은 그런 기미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남편의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런 남편인걸 알기에 항상 수인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한 번은 화해 후 수인이 남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왜 먼저 사과하지 않냐고.

“너무 미안하니까. 너무 미안해서 먼저 말을 거는 것 자체가 염치없게 느껴져.”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용기도, 자신감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누구보다 생각 많고 진심인 사람.


연애 때도 그렇고 결혼 후도 그렇고 수인과 남편은 맥주 마시는 걸 좋아했다. 편의점에서 세계맥주를 종류별로 사서 마시기도 하고 신혼여행도 독일의 옥토버페스트에 맞춰서 갔다. 둘이 퇴근 후 집 앞에 있는 맥주집에 가서 홀짝 거리며 서로 누가 더 힘들었나 입씨름하는 것도 하루의 낙이었다. 나중에는 둘이 엄청 진지하게 퇴직 후에 맥주집을 차릴까 하며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수인은 얼굴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만약 준후를 낳지 않았다면 둘이 맥주 마시며 그저 고민 없고 단조로운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준후를 재우고 거실로 나오니 남편은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수인이 맥주를 들고 쓱 다가가자 남편이 기다렸다는 듯이 테이블에 앉았다. 맥주를 앞에 놓고 앉긴 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수인은 정신없이 바뀌는 TV화면만 쳐다봤다.


“... 미안해.”


목이 잠긴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 옆을 돌아보니 남편은 TV를 보고 있었지만 눈은 저 먼 허공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못 하는 사람이, 그 말을 하면 염치가 없다는 사람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때 내가 엄마한테 이야기했어야 하는데. 혼자 감당하게 내버려 둬서 미안해. 내가 참 그때... 용기가 없더라. 그걸 내 입 밖으로 꺼내는 게.”


맥주캔을 따면서 남편은 고개를 돌렸지만 수인은 남편의 훌쩍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수인이 밤마다 울 때도, 의사의 진단을 듣고 훌쩍거릴 때도 남편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저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수인이 바쁘게 센터 다니고 다른 치료가 없나 이리저리 알아볼 때도 남편은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네가 준후 때문에 고생하는 거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했어. 난... 난 인정할 수 없었거든. 우린 둘 다 아무 문제 없이 잘 태어났고 잘 커왔는데 왜 내 자식이 이런 문제가 있어야 하는 건지. 왜 우리가 이런 고통을 껴안고 살아야 하는 건지.”


수인은 잠자코 맥주만 홀짝거렸다.


“준후 자폐라는 소리 듣고 갑자기 초등학교 때 같은 반 애가 생각났어. 걔가 말도 못 하고 화나면 소리 지르고 수업시간에 교실 돌아다니는 애였는데 그땐 별 관심이 없었어. 걔가 다른 애들한테 괴롭힘 당해도 나는 무시하고 내 친구들과 공 차는데 바빴지. 그러면서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문득 걔가 떠오른 거야. 왜 생각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내가 걔한테 아무 관심도 없어서, 나랑은 상관없는 아이라고 자만해서 벌을 받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수인은 잠자코 남편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준후가 자폐판정받은 후로 남편이 이렇게 길게 이야기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준후 자폐라는 소리 듣고 어떻게 살아가야 되나 싶더라.  아무리 일찍 치료를 하면 지금보다 낫다고 하지만 이게 완전한 치료도 아니잖아. 약 먹고 뚝딱 낫는 병도 아니고. 지금 치료센터를 다녀도 솔직히 발전이 있는 건지 잘 모르겠고. 그냥 미래는 아주 컴컴한데 우리는 거길 그저 더듬거리며 가다가 빠져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남들은 특별한 아이라고, 사랑으로 키울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자기애가 그런 애가 아니니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야. “


수인은 맥주캔의 둥근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계속 문질렀다. 남편도 수인처럼 아파하고 좌절하고 슬퍼하고 있었다. 다만 자신은 그런 슬픔을 밖으로 표출했지만 남편은 슬픔과 좌절을 자신의 안으로 계속 삭히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 퇴근할 때 주차하고 아파트 공동출입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는데 저 멀리서 어떤 꼬마애 소리가 들리는 거야. 계속 ‘아빠, 같이 가!’하더라고. 그런데 걔가 내 쪽으로 오면서 소리치는 거야. 뭐지 하면서 기다리니 준후만한 아이가 내 앞에 서더라고.”


“자기 아빠인 줄 알고 그렇게 소리친 거야?”


“맞아. 걔가 날 보더니 ‘엇, 우리 아빠가 아니네.’하며 가더라고. 그 아이가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하더라. 난 그렇게 다정하게, 애타게 아빠를 부르는 소리를 처음 들어봤어. 준후는 한 번도 날 그렇게 불러본 적이 없잖아. 그 순간 우리 준후도 날 이렇게 불러주면 얼마나 좋을까...”


남편과 수인의 맥주캔에는 물방울이 가득 맺혀 테이블 바닥으로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내가 무슨 생각까지 한 줄 알아?”

“무슨 생각?”

남편은 입술을 핥으며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뉴스 보면 애가 자폐진단받거나 장애 진단받고 같이 동반자살하는 부모 나오잖아. 예전엔 참 무책임하고 잔인하다 생각했거든? 근데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젠 알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해. 그건 당사자가 되어봐야 알 수 있는 거야. “

“... “

“스위스에 안락사해주는 곳이 있다 하더라고. 치료가 더 이상 어렵거나 고령의 사람이 신청할 수 있는데 다른 나라는 외국인한테 안락사 허락 안 해주는데 스위스는 외국인이어도 해준대. 그래서... 평생 준후 걱정하며 사느니 그냥 돈 모아서 준후랑 우리 가족 모두 세계여행하며 재밌게 보내다 스위스에 가서 다 같이 한날한시에 죽으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잠깐 했었어. 후후, 웃기지?”


남편은 웃으면서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수인도 맥주를 마시며 자신들의 꿈꿔왔던 미래와 희망들을 삼켰다.


우리는 행복을 꿈꾸는 대신 그저 죽음만 바라는 삶만 원할 수 있는 걸까? 우리에게, 준후에게 행복해질 권리는 없는 것일까?


수인은 남편의 맥주캔과 맞부딪혔다. 오늘따라 맥주가 너무 쓰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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