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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육수 Jul 19. 2024

사촌

연재소설

9. 사촌


왁자지껄한 집안이 한순간에 조용해져서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밥상을 치우다 말고 엄마가 할머니 앞에서 울고 있었다. 엄마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흐느껴 울고 있었고 할머니나 가족들은 그런 엄마를 미워하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나는 그런 모습이 보기 싫어 커튼 뒤로 숨어버렸다.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할머니 집에 와서 내 이야기만 나오면 엄마는 기가 팍 죽어버린다. 특히 오늘은 저렇게 서럽게까지 우니 나에 대해 심각한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다. 왜 내 얘기를 할 때마다 엄마는 저렇게 슬퍼할까. 왜 내 얘기를 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엄마에게 뭐라고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며 숨죽이고 있을 때였다. 


“형아, 우리 큰방 가서 TV 보자.”

눈치 빠른 도윤이는 어른들의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거실에서 놀다 말고 내 손을 잡고 할머니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벌써 지윤이 누나가 돌침대에 자리를 꿰차고 누워 있었다. 


지윤 누나, 도윤이는 고모의 아이들로 각각 나보다 한 살 위, 한 살 아래 사촌들이다. 누나와 동생을 본 지 벌써 몇 년째이지만 나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낯설게 느껴진다. 마치 다른 누나, 동생인 듯 볼 때마다 달라져있어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셋이서 할머니 집 소파에 쪼르르 앉아 뽀로로 만화를 같이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누나는 책을 많이 읽는지 아빠랑 고모부처럼 안경을 쓰고 있고 나처럼 말 못 하던 도윤이는 이제 말도 잘하고 어려운 레고도 혼자 척척 조립할 줄 안다. 나는 아직도 뽀로로가 좋지만 그들은 이제 뽀로로는 시시하다며 다른 거 틀어달라고 난리다. 


이들도 처음에는 나를 볼 때마다 같이 놀자고 다가왔지만 내가 좀 다르다는 걸 눈치챘는지 둘이서 놀 때가 더 많았고 가끔 사람 수가 모자라거나 어른들이 같이 놀라고 부추기면 그때서야 억지로 나를 끼워주기도 했다. 


특히 내가 걸어 다닐 때 기어 다니던 도윤이는 훨씬 과격해진 것 같다. 나보다 밥을 적게 먹는대도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 항상 뛰어다니고 목소리도 쩌렁쩌렁해 옆에 갈 때 미리 귀를 막을 지경이었다. 사람을 좋아해서 할머니, 할아버지는 물론 우리 엄마, 아빠를 보면 안기고 달려들며 좋아했다. 나한테도 헤드락을 걸거나 내가 사람들 많은 곳을 피해 작은 방 침대에 피신해 있으면 있는 힘껏 날아와 내 몸 위에 올라탈 때도 있어 나는 도윤이와 같이 있으면 슬금슬금 피한다. 


원래 도윤이는 나처럼 어린이집에 다녔는데 최근에 누나가 다니는 학교의 병설 유치원으로 옮긴 모양이다. 나한테 계속 “형아는 계속 어린이집 다니지? 나는 이제 병설 유치원 다닌다아~!” 하며 뻐기는데 왜 뻐기는지 알 수 없다. 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도윤이는 “얼레리꼴레리, 형은~ 아직도~ 어린이집 다닌대요~”하며 혀를 날름거리며 놀렸다.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으니 도윤이는 금세 재미가 없어졌는지 휙 돌아서 자기 누나한테로 갔다. 


아무도 내 옆에 없는 걸 확인한 후 나는 조심스럽게 ‘준후의 보물상자’를 꺼냈다. 이건 엄마가 붙여준 이름인데 내가 좋아하는 공룡 피규어, 미니 자동차, 종이접기 등 내 소중한 컬렉션들이 들어있는 상자다. 이건 엄마, 아빠도 절대 건드릴 수 없는 내 소중한 보물이다. 상자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도윤이가 듣고는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달려왔다. 


“우와, 이거 뭐야? 신기한 거 많다! 나도 갖고 놀래!!”

도윤이의 손이 빛보다 빠르게 내 상자로 뻗더니 곧바로 공룡들을 꺼냈다. 내가 손쓸 틈도 없는 사이 도윤이는 이것저것 꺼내더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트리케라톱스 인형을 자기 눈앞에 갖다 댔다. 그건 내가 마트에 가서 유일하게 갖고 싶다고 손을 뻗어 엄마가 사준 것으로 버튼을 누르면 트리케라톱스 뿔에 반짝반짝 빛이 난다. 안돼, 그건 내가 너무 좋아하는 거란 말이야!


“아아아악!”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소리를 꽥 질렀다. 하지만 누나의 핍박으로 단련돼서 그런지 도윤이는 내 반응에 놀라거나 타격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소리 지르는 게 재밌는지 상자 안에 있는 것들을 마구 털어내며 나를 보고 씨익 웃고 있었다. 


“헤헤, 이거 뺏어봐라!”

도윤이는 공룡을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가 자신의 등 뒤로 빼며 나를 놀렸고 나는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렸다. 돌려줘, 돌려줘!

“아아아악!”

내가 좀 더 큰소리로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눈이 퉁퉁 부은 엄마와 고모가 방에 들어와 우리를 살폈다. 


“형 거 뺏으면 안 돼.”

고모가 도윤이를 다그치자 도윤이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뺏으려고 한 게 아니라 같이 놀려고 한 거예요.”

“맞아요. 도윤이가 준후랑 장난감 가지고 같이 놀려고 하는데 준후 혼자 갖고 놀려고 했어요. 준후는 욕심쟁이예요!”

관심 없는 척 돌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지윤이 누나도 갑자기 자기 동생을 두둔했다. 점점 내 걸 빼앗은 도윤이보다 같이 놀지 못하는 내가 더 잘못한 것으로 기울어졌다. 


내 편을 들어줄 엄마를 쳐다보자 엄마도 무서운 얼굴을 하며 나를 쳐다봤다. 

“동생이랑 같이 놀아야지, 혼자 놀면 안 돼. 동생 한번 장난감 빌려줘.”


서로 공룡 장난감을 가지려는 혈투에서 말을 할 수 없고 목소리가 작은 나는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최종 승자인 도윤이가 의기양양하게 손에 트리케라톱스를 쥐었고 나는 눈물을 쏟으며 도윤이를 원망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아무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졸지에 막무가내로 떼쓰는 아이, 장난감을 혼자 독차지하려는 아이가 되었다. 억울하다. 분하다. 믿었던 엄마마저 나를 혼내니 배신감이 든다. 


사촌들과 만나면 나는 늘 뒤로 밀린다. 할머니가 쟁반에 과자를 가득 담아 같이 나눠 먹으라고 주면 사촌들은 서로 많이 먹으려고 두 손으로 한 움큼 자기의 몫을 앞에 챙기고 팔로 막았다. 나는 결국 남은 과자부스러기만 주워 먹을 뿐이다.

 

어른들은 나에게 맞춰주고 어떻게 할 것이다 예측이 되지만 아이들은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할 수 없다. 어른들은 사이좋게 나눠먹어야 된다며 오히려 나에게 과자를 양보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게 없다. 선생님이나 어른들 앞에서는 사이좋게라고 말하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물고 뜯으며 빼앗는다. 


아이들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행동들을 불쑥불쑥 해서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나 사촌들이 다가오는 게 무섭다. 내가 아는 공식대로 아이들은, 세상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자유분방하게 움직이고 노는 거고 그게 일상일 테지만 나는 그게 이해하기 어렵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내가 다른 아이들처럼 똑같이 행동해도 다르게 받아들이는 경우이다. 똑같이 방방 뛰어도 다른 아이들이 그렇게 하면 신나 한다고 더 뛰라고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면 혹시 뭐 문제가 있는 건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다른 사람한테 피해 준다고 못 뛰게 막는다. 나를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대하는 어른들이 이해가 안 되고 어떨 땐 밉다. 


그래서 혼자이고 싶다. 혼자인 게 편하다. 엄마는 서로 어울리면서 친구들과 노는 법, 싸우는 법, 함께 지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세상 어떤 것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어렵다. 


어린이집에서 선생님이 무인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무인도란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 섬이에요. 사람은 혼자 있으면 외롭고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무인도에 탈출하기 위해 빨리 구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해야 돼요. 불을 피우거나 모래사장에 커다랗게 SOS로 써 놓으면 사람들이 구하러 올 거랍니다.”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나는 오히려 그 무인도에 갇히고 싶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섬. 간섭이나 잔소리가 없는 섬. 사람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을 느낄 수 없는 섬. 

아, 맞다. 엄마, 아빠는 없으면 안 되니 같이 무인도에 데리고 가야지. 엄마, 아빠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밥 차려주고 옷 입혀주고 재워주는 엄마, 아빠가 없다면 너무 괴롭고 무서울 것이다. 


“엄마, 아빠가 평생 너 뒤에 졸졸 따라붙을 수 없어. 엄마, 아빠 없어도 다른 사람과도 잘 지낼 수 있어야 해.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어.”

사람은 왜 혼자 살 수 없다는 걸까? 왜 다른 사람과 같이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까? 엄마는 이런 무서운 소리를 하며 나를 계속 세상 밖으로 내보내려 한다. 나는 아직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고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아직도 무섭고 어쩌면 영영 무서울 지도 모른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등을 떠미는 엄마의 눈빛도 불안하게 떨리긴 마찬가지다. 


“형, 이거 돌려줄 테니까 화 풀어.”

밤이 되어 집에 돌아갈 때쯤 도윤이가 트리케라톱스 인형을 돌려주며 말했다. 분명 고모가 시켜서 하는 것이겠지만 베실베실 웃으며 쑥스러워하는 녀석을 보니 그리 나쁜 애는 아닌 것 같다. 그냥 얘도 나랑 같이 놀고 싶어서 그런 건데, 내가 어떻게 노는 건지 몰라서 그런 건데 싶어 나도 살짝 미안하다.


“형, 다음에 형 집에 놀러 갈게! 그때는 장난감 같이 갖고 놀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데 도윤이의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들어와 엘리베이터 안을 꽉 채웠다. 좀 전의 그 미안한 마음이 싹 달아났다. 어휴, 우리 집에 오면 내 물건을 헤집을 게 뻔한데.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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