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11. 에코와 크롱
“준후야, 과자 줄까?”
“과자 주까?”
내가 과자 쪽으로 손을 뻗자 엄마가 다시 과자를 뒤로 멀리 보내며 말했다.
“엄마 말 따라 하지 말고 과자 먹고 싶으면 ‘네’ 해야지.”
“해야지.”
“그만 좀 따라 해.”
“따라 해.”
엄마는 내가 엄마 말에 대답을 했는데도 답답하지 한숨을 푹 쉬며 결국 나에게 과자를 건네줬다.
요즘 나는 말을 한다. “아아”밖에 모르던 내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썩 괜찮은 발전인 것 같은데 엄마는 그리 기뻐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내가 말을 한두 마디씩 따라 하니 엄마는 내가 드디어 말이 트였다며 마치 이제 다 나은 것처럼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하지만 내가 말을 하면 할수록 엄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아닌데...”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였다. 그 시간에 다른 애들도 다 등원하는 시간이라 엘리베이터 안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애들 소리에 어른들 수다에 거친 숨소리가 좁은 엘리베이터 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나는 사람이 많으면 답답하고 불안했다. 특히 이런 좁은 공간에 갇혀 있으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엄마는 엘리베이터 숫자 전광판만 쳐다볼 뿐이었다. 소리를 질러보면 좀 나아지려나 싶었지만 그러면 또 엄마가 불같이 화를 낼 게 뻔했다. 아직 1층에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는데 어떡하지 싶었다.
그때 불현듯 며칠 전 엄마가 매일 읽어준 동화책 구절이 떠올랐다.
“기픈 바다속 무꼬기가 한 마리 딸고 이써씀미다. 그언데~(깊은 바닷속 물고기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뭉개지는 발음으로 중얼거리자 그렇게 시끄럽던 엘리베이터 안이 한순간 조용해지며 아줌마들과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꽂혔다. 엄마는 허겁지겁 내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엄마가 막은 손 사이로 나는 계속 중얼거렸고 1층에 도착하자마자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부리나케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에서 이상한 말 하지마!”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엄마가 그렇게 바라던 말을 했는데 엄마는 버럭 화를 냈다.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이건 나만의 주문인데. 신을 믿는 사람들이 기도문을 외우듯이 나는 불안할 때 이렇게 내 머릿속에 생각나는 말을 중얼거리면 마음이 편안해지던데 엄마는 왜 못하게 막는 걸까?
엄마는 내가 의미 없이 그냥 따라 말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큰 오해다. 다 나름의 뜻이 있다.
뽀로로 만화에는 크롱이라는 공룡 캐릭터가 나오는데 크롱은 화를 내면 발을 구르며 “크롱크롱!”하고 소리친다. 그 소리가 웃겨서 내가 따라 말해보니 입에 착 감겼다. 그 뒤로 나도 화가 나면 “크롱크롱!”했는데 그 뜻을 알리 없는 어린이집 선생님은 내가 크롱을 좋아하는 줄 알고 크롱 인형을 줬다가 내가 그걸 집어던지자 물건을 집어던졌다고 혼을 내셨다. 난 그런 뜻이 아니라고요, 크롱 인형을 달란 소리가 아니라 크롱처럼 화가 났단 말이에요!
어디 아프거나 다쳤을 때는 “괜찮니?”라고 말한다. 내가 어디 부딪히거나 아프면 엄마는 항상 “괜찮니?”라고 물어봐서 나는 아프다는 표현이 “괜찮니?”인 줄 알았다. 어른들이 나에게 질문할 때는 무슨 뜻인지 몰라 끝을 따라 말하는 거고 심심하거나 마음이 불안하면 그걸 해소하고자 동화나 만화에서 본 대사를 따라 하는 것이다.
나의 계속 반복되는 말에 엄마는 또 걱정이 되는지 언어 선생님과 엄청 심각하게 상담하는 걸 들었다.
“준후가 계속 제가 한 말을 반복해서 말해요. 가끔은 예전에 유튜브 영상에서 봤던 대사를 갑자기 중얼거리기도 하고요.”
“아, 그건 반향어라고 자폐특징 중 하나입니다. 반향어에는 자기가 방금 들었던 질문을 그대로 따라 하는 ‘즉각적 반향어’가 있고요, 또 하나는 어떤 소리를 들은 지 며칠, 몇 달이 지난 뒤에 그 소리를 반복하는 ‘지연적 반향어’가 있습니다.”
“그럼 이건 못 고치나요?”
“반향어는 아주 어린아이가 말을 배울 때도 나타날 수 있는 거라서 긍정적인 신호이긴 하지만 너무 심한 경우는 적절히 대응해 주시는 게 좋아요. 반향어를 대체할 수 있는 말을 하게 하고 반향어를 할 때는 무시해서 애가 흥미를 더 느끼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반향어를 할 때 다른 장난감이나 다른 곳에 관심을 유도해 반향어를 멈추게 할 수도 있고요. 그리고 유튜브 영상은 이제 안 보여주시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유일한 낙인 유튜브를 못 본다고?! 나는 고개를 훽 돌려 선생님을 째려봤지만 나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와 선생님의 모의작당은 계속됐다.
그날부터 나는 유튜브 영상을 볼 수 없었다. 저녁 먹고 엄마가 설거지하는 동안 30분 정도 유튜브로 만화를 보는 게 나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즐거움인데 그걸 못하게 하다니.
“이이이잉. 비가 와, 비가 와.”
내가 엄마 옆에 가서 칭얼거리고 짜증을 내도 엄마는 눈 깜짝하지 않았다.
“안돼. 이제 너 만화는 당분간 금지야. 그리고 비도 안 오는데 무슨 비 타령이니?”
보다 못한 아빠가 엄마 몰래 살짝 유튜브를 틀어주려다가 엄마에게 들켜 불호령을 맞았다.
“안된다고 했잖아! 그거 보여주면 애 반향어가 심해진다고오!”
“언어선생님이 반향어 하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며. 준후가 말 한마디하는 게 소원이라더니 막상 말하니까 왜 애 말을 못 하게 해?”
“막상 말을 하니까 너무 이상한 티가 많이 나잖아. 준후가 말할 때마다 사람들이 다 쳐다봐. 어휴, 차라리 말 한마디 안 하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몰라.”
엄마는 내가 말을 한다는 사실보다는 내가 말을 할 때 사람들한테 어떻게 보이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엘리베이터에서도 손으로 내 입을 막았구나. 엄마는 내가 부끄러운 모양이다.
사촌동생 도윤이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도윤이는 내 예상처럼 역시 내 장난감을 이리저리 꺼내고 있었다. 내가 줄 세워놓은 피규어마저 흐트러뜨리자 내가 이렇게 소리쳤다.
“엄마가 조용히 하랬지!”
도윤이는 슬쩍 나를 쳐다보고는 다시 자기 하던 걸 계속했고 나는 또 “엄마가 조용히 하랬지!”라고 말했다.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고모가 물었다.
“준후야, 그럼 도윤이보고 ‘만지지 마’라고 해야지. ‘엄마가 조용히 하랬지’는 왜 말하는 거야?”
그러자 과일을 깎고 있던 엄마가 말했다.
“그거 아마 제가 준후 혼낼 때 하는 소리를 따라 말하는 걸 거예요.”
“아, 그래?”
고모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도윤이한테 맨날 지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고모가 도윤이 못하게 막아줄까?”
“막아주까?”
나는 고모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고모의 마지막 말을 따라 말했다.
그러자 소파에서 책을 보고 있던 지윤이 누나가 말했다.
“준후, 에코 같아.”
“에코?”
“유치원 선생님이 가르쳐주셨는데 그리스 신화에 에코라는 요정이 있었대. 그런데 에코가 헤라의 저주에 걸려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못 하고 남이 하는 말의 끝부분을 따라 말한대. 그래서 동굴에 숨어 지내면서 우리가 산에서 소리치면 에코가 우리말을 그대로 따라 말하는 거래.”
“우와, 우리 지윤이! 그런 것도 알고 대단하네!”
고모는 자기 자식이 똑소리 나게 설명하는 게 뿌듯한 모양이었다.
“맞아! 준후 형은 저주에 걸려서 나보다 말도 못 하고 따라 할 줄 밖에 모르는 거야. 형아는 저주에 걸렸대요~ 걸렸대요~”
도윤이는 누나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나보고 저주에 걸렸다며 놀려댔고 지윤이 누나는 자신의 지식자랑을 더 뽐내려고 다른 그리스 신화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는 과일 깎는 손을 멈추고 가만히 그들을, 그리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정말 헤라의 저주를 받은 에코 요정일까? 저주를 받아 이렇게 엄마를 힘들게 만드는 걸까?
고모네가 우리 집에서 한바탕 놀다간 뒤 엄마는 바닥에 널브러진 장난감을 치우다 말고 고개를 푹 숙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엄마는 울고 있었다. 나 챙기는 것도 힘든데 고모네까지 와서 힘들어서 그런가? 아니면 사촌들한테 치이는 내 모습을 보고 속상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누나가 저주 운운한 게 마음에 걸려서?
“비가 와. 비가 와.”
나는 이렇게 소리치며 현관으로 달려갔다.
예전에 엄마랑 밖에서 놀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어머, 비가 와!”
엄마는 이렇게 소리치며 나를 안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지만 이미 옷이며 머리며 비에 다 홀딱 젖어버렸다. 엄마가 수건으로 내 얼굴과 몸을 닦아줬는데 그런 엄마의 얼굴에도 빗방울이 많이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엄마가 우는 모습 같았다. 그때부터 “비가 와.”는 나에게 슬픔을 나타내는 표현이 되었다.
엄마는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쓰는 거라고 했다. 나는 현관에서 우산을 챙겨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 비가 와.”
나는 엄마에게 우산을 씌워 줬다. 엄마는 손으로 눈물을 닦더니 우산을 가져온 내가 우스웠는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엄마가 우는 게 비 오는 것처럼 보여서 ‘비가 와.’라고 한 거야? 엄마 울지 말라고 우산 씌워주는 거야?”
엄마는 나를 와락 껴안았다. 안으면서 엄마는 나에게 계속 미안하다고 말했다. 엄마가 하도 꽉 껴안아서 숨이 막혔지만, 뭐가 미안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난 그저 포근한 엄마 품이 좋아 더 푹 안겼다.
뽀로로 만화에서 뽀로로나 루피, 에디 같은 친구들은 말을 잘 하지만 크롱은 “크롱크롱”밖에 할 줄 모른다. 즐거울 때도 크롱크롱, 슬플 때도 크롱크롱, 배고플 때도 크롱크롱. 하지만 친구들은 크롱이 저주에 걸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크롱을 이상하게 쳐다보지도 않고 크롱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같이 논다. 내가 저주에 걸린 에코요정이라 해도 크롱처럼 의미만 통한다면, 이런 나의 언어도 받아들여진다면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