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졌지만 잊히지 않을 마음으로
실체가 없는 것들을 사랑한다. 정확히 말하면 있었지만 빠르게 사라져 버린 것들. 오래도록 곁에 남아있어 주지 못했던 것들을, 지난 관계를, 자꾸만 되돌아본다. 매 년 봄이 오면 터질 듯한 꽃봉오리를 달랑 매단 벚나무를 사랑한다. 금방이라도 꽃 잎이 활짝 터져 나올 모습을 상상하며 참을성 없이 자꾸만 나무 끝을 바라본다. 활 짝 피어난 벚꽃은 일상에 치여 정말 잠시 잊고 지내면 기대가 무색하게도 금세 봄 비를 몰고 와 바닥에 축축하게 젖어 망가진 모습을 보일 뿐이다.
꽃 피우는 찬란한 봄에도 봄비는 따라오듯 기대에는 실망이 따라오고, 따뜻함에 쉽 게 들뜨는 나는 애써 티 내지 않기로 한다.
이제 잘 뛰어다닐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즈음 엄마와 둘이 밤산책을 나갔던 날. 이제는 안전상의 이유로 볼 수 없는 쇠냄새가 나는 놀이기구들과 흙이 쌓여있는 놀 이터에서 나는 300원짜리 아이스바, 엄마는 카스 한 캔을 들고 검은색 비닐봉지를 바스락 거리며 차가운 미끄럼틀 꼭대기에 앉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대화를 나눴 던 날.
잘 시간이 되면 항상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날 업고 거실 한 바퀴를 다 돌고서 야 내 방 침대에 날 조심스레 눕혀놓던 아빠는 술에 취해 들어와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아 떨리는 눈을 꼭 감고 자는척하는 나의 방에 들어와 두껍고 투박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나가던 날.
이제 걷기만 하면 신발 안으로 모래가 들어오던 놀 이터는 사라져 버렸고 방 틈 사이로 큰 그림자를 만들어 내던 아빠는 이제 꽤나 작아졌다.
내가 아끼던 귀여운 지우개도, 내가 사랑한 고양이와 강아지도, 이제는 그 순간순 간마저도 자꾸만 사라져 가는 것 같다. 내게 온 모든 순간들이 사실은 벚꽃이었나. 사는 모든 날들은 계속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일까. 꽃은 피기 시작 하면 지기 시작하는 것과 같이 영원히 그 모든 순간들이 피어나 있을 수는 없구나. 나만 기억하고 있다면 사라지지 않을 순간들이겠지만 어쩐지 요즘은 짝사랑을 하는 것만 같은 마음이 들어 애달프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에 애달파하는 게 우습지만, 잊을 만하면 모든 계절이 다시 돌아오듯이 그리운 순간도 잊을만하면 떠오른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마저도 사랑해야지.
사라졌지만 잊히지 않을 마음으로 사랑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