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6•25(한국전쟁)가 발발한 지 73년째 되는 해입니다. 지금 이 무대에 계신 분들은 그 당시 폐허 속에서 태어나 이 땅을 일구신 분들이에요. 아무것도 없는 절망의 땅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오며 한국을 일으키셨습니다. 이분들 덕분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식들과 손자•손녀들에게 좋은 세상을 물려주신 분들이에요. 많은 박수 부탁드립니다.
백세 합창단 공연을 2년째 함께했다.은퇴 후 삶의 여백 한 뙈기에 음악이라는 씨를 심고 가꾸어 세상에 내놓으신 시어머니 덕분이다. 함께 열심히 합창의 터를 일구신 어르신들이 희끗한 생의 한 지점에서 크게 환호를 받으셨다. 합창단원 중에서 가장 고령이신 97세 할아버지의 백발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여성으로 가장 연로하신 85세의 할머니는 100에 가까운 숫자에 비하면 아직도 청춘이다. 실제로 따져보니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중학생이 되었을 쯤에야 태어난 아기였다.이 땅에서의 첫 호흡은 때를 달리했지만 생의 평균점을 돌아 이제는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고 있다.인생이 들고 나는 시간 속에서세상에 처음 내뱉은 울음소리가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 한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그들의 무대가 경이롭다.84세의 시어머니는 공연티켓을 쥐어주며 아들의 손을 꼭 붙들고 부탁하셨다.
"서율아, 할머니 올해 마지막 공연이 될 것 같으니까 공연 2시간 동안 엄마랑 아빠 데리고 나가지 말고 꼭 앉아서 봐줘. 공연 보다가 지겨우면 자리 뜨지 말고 그냥 자."
"네!"
우렁차게 대답한 아들은 작년과 다르게 그 약속을 지켜냈다. 초등학생의 자존심을 멋지게 세워줬다. 유아와 어린이의 차이는실로 컸다. 잠자코 자리를 지켜준 아들 옆에서 백세 합창단원들의 노랫소리와 바리톤 고성현 씨의 고품격 독무대까지, 오래간만에 귀가 호강에 푹 젖었다.
'... 계절이 수놓은 시간... 연습이 없는 세월의 무게... 세상이 하얗게 져도 덤으로 사는 반복된 하루...'
반백 년을 훌쩍 넘어,다시 백년을 향해 달려가는 그들의 언어는 진심을 태운 선율이었다. 전쟁으로 쓸려나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던 생의 터에 첫 발을 내디딘 후, 무에서 유를만든 백세 인생의 무대는 후세대들에게은퇴 후를즐겁게꿈꿀 수 있는 멋진 삶의 노래가 되어 주었다.
시어머니는 은퇴후 삶의 롤모델이다. 언제나 한결같이 "난 지금이 가장 좋아."라는 말씀에 백분 합당한 삶을 사신다. 월화수목금토일, 꽉 찬 스케줄로우리 가족 중 가장 바쁘다.
"난 명퇴 전엔 TV 한번 못 봤어."
시어머니를 모셔야 했고, 아이 둘을 낳아 키워야 했으며, 일까지 해야 했던 직장 여성에게 청춘은 여유라는 틈새를내주지 않았다.그때 못한 걸 지금 다하고 계시니 시어머니의 황혼은 공평하다 못해 호사스럽다고 해야 하나. 극도로 기울었던 잉여 시간의 추가 무더기로 한꺼번에 옮겨와넘쳐나는 삶. 바빠서 시간을 쪼개 쓰는 나로서는 부럽기 그지없다.
산과 들의 자연을 화폭에 담아 매년 인사동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여는 삶.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외국어를 외우느라 머리 아프다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고운 화장에 예쁜 드레스를 입고 매년 합창 무대에 서는 삶. 교인들의 각종 대소사를 챙기며 결혼식 장에선 매번 목사님의 주례사에 콩닥콩닥 귀를 기울이는 소녀 같은 삶. 장례식장에서는 함께 울며 장지까지 따라다니며 상실감에 젖은 가족들을 위로하는 삶.약하고 여린 감수성으로 불필요할 정도로 지갑을 열어사람들에게 그저 호구가 되어주는 삶.잘생긴연하 남편이 곁에서 챙겨주고 때마다 당일치기 여행에 맛집 순방으로 눈과 귀가 즐거운 삶.여태껏 두 다리로 혼자 걸어 다닐 수 있는 건강으로 일상의 땅을 여기저기 밟으며 세상과 소통하는 삶. 마음과 시간의 넉넉함으로 많은 것을 해보아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아쉬움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
휴직을 하고,그전엔 보지 못했던 많은 것을 감각한다. 처음에는걸러지지 않은 채무수한 삶의 장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떤 풍경이든 들고 나는 것이 마냥 좋았다. 어느 순간 가장 흔하지만 그간 캡처하지 못했던 인생의 컷들이 눈에 맺힌다. 은퇴자들의 일상이다. 집 앞 뒷산은 어르신들의 눈인사로 가득했고, 주민센터 수채화 수업에서 수강생의 반이상은 나이가 지극하신 분들이었다. 한창 직장에 매어있었던 낮시간을 자유롭게 쓰다 보니 거리에서, 병원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카페에서 만나는 이들은 젊은이들이 아닌 어르신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 새롭게 보인다. 일상의 반이상이 그들과 함께 저장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젊었다면 여전히 그냥 지나쳤을 것 같다. 뛰어 가느라 바빠서 신경 쓰지도 않았을뿐더러 나에겐 너무나 머나먼 이야기라서다. 조금 늦게 걷다 보니 보이고 들리고 만져진다. 머지않은 내 이야기 같다.
등산로에서 서로를 부축하며 걷는 노부부의 뒷모습에 남편과 나를 끼워 넣는다. 불편한 걸음걸이를 보니 딱 재활치료 중인 할아버지다. 콜록 거리는 기침 소리와 함께 발걸음을 멈추고 옆에서 남편이 진정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주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온다. 곧이어 다리에 힘이 풀려 중심을 잃은 할아버지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깜짝 놀라 나도 달려가 힘을 보탠다. "아이고, 여보 괜찮아?우리 여보 어째..." 걱정어린 다정스러움으로 할아버지의 볼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얼굴에 갖다대기를 반복하는 할머니다. 코스를 돌아 내려가는 길에서 그 노부부의 뒷모습을 다시 만났다. 할아버지의 팔을 꼭 붙잡고 한 걸음씩 안내하는 할머니의 뒷모습. 이제는 구령까지 붙여가며 어눌한 걸음걸이에 힘을 불어넣고 있다.
뭉클한 인생컷이 머릿속에 찍혔다. 그리고 백세 합창단이 전해준 노랫소리가 귓가에서 맴돈다. 수많은 계절이 수놓았던 긴 시간이 그들의 현재를 새롭게 그려주고 있다. 그들은 예측이나 했을까 리허설 없는 이 세월을. 하얗게 저물고 있는 인생이라도 매일 반복되는 등산로에서의 하루가 또 그들의 생에 놓여있다. 부축 없이 자유롭게 걷는 부부의 일상이 회복되기를 기도했다.
"... 계절이 수놓은 시간... 연습이 없는 세월의 무게... 세상이 하얗게 져도 덤으로 사는 반복된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