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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혜정 Sep 13. 2023

말년복은 대기만성으로

깨지지 않는 그릇이 있다는 것만으로 좋다

늦깎이가 되고 보니 맘에 쏙 들어오는 단어 하나가 있다. 


'대기만성(大噐晩成)'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 


그릇 사이즈는 모르겠고 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마냥 내 것이고 싶다. 그런데 이 사자성어가 원래 '큰 그릇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 '대기면(免)성'의 왜곡된 표현이란 걸 알게 되었다. 부정형이 긍정형으로 바뀌어 완전히 반대의 뜻으로 오랫동안 낙자나 실패자들, 그리고 나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말이 되었다니. 그 운명 장난이 극적이다.


직장을 다니던 20대 중반, 회사 언니들과 우연히 들른 사주카페에서 밑도 끝도 없는 부러움을 샀다.


"어머어머. 혜정이 '-사'자로 끝나는 직업을 가진 남편을 만난대!"

"우와, 좋겠다. 의사? 약사? 변호사? 판사? 변리사?"


언제 결혼할지 밑도 끝도 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건너고 나서야 알았다. 완전 헛소리였다는 것을. 그럼에도 도둑놈 심보를 은밀하게 품고 있었다는 것까지도. 결혼 후,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던 소리들을 가슴에서 탈탈 털어 냈다. 괜한 상술의 설레발에 가슴 뛰었던 구린 과거를 지워 기가 무섭게 구석 어딘가에 박혀있먼지 덩어리 또 한 뭉치 발견했다.

어느 날, 남동생이 찬물 끼얹는 말을 한다. 평소 관상을 볼 줄 안다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듣는 말을 신나게 늘어놓았더니 뼈 있는 대꾸.


"내가 말년 복이 엄청 나대!"

"누나, 이미 말년 다 된 거 아니야?"

 

희망으로 잡고 있던 지푸라기를 송두리째 뽑아내고 뒤통수를 후려치는 말 둘 다 빵 터졌다. 동생의 재치에 허탈인지 후련함인지 모른 채 한참을 웃어젖혔다. 내가 무슨 빈말들 또 휘둘리려 했던 건지, 정신번쩍 든다.




찾아보니 대기만성형 관상이라는 것이 있다. 앗, 내 맘을 끌었던 대기만성이 말년복과 찰떡궁합이었다니. 말년복은 얼굴의 하관이 중요하귓불, 인중, 턱의 상으로 인생의 후반을 가늠한다고 한다. 귓불이 도톰하고 인중이 선명하며 뾰족하지 않게 살이 두툼한 턱이 말년 관상에 긍정적인 지표다. 인중은 모르겠고 다른 건 진짜 나 아니야? 순간, 입꼬리가 올라간다. 귓불이 두꺼우면 뭐 하랴. 얄팍한 팔랑귀가 중심을 잡지 못해 널뛰는.


젊어서 잡지 못한 기회를 천천히 한발 한발 나아가다 보면 늦게 운이 잡히고 쉽게 놓지 않는 것이 대기만성형 인간이다. 관상 붙어있는 대기만성형 말년복이란 것이 과연 운명지 노력인지, 헷갈린다. 이래서 그런 게 아니라 그래서 이런 거 아닌가? 관상이 이래서 복이 따라오는 게 아니라 복이 오도록 그렇게 노력을 하다 보니 관상 받쳐준 건 아닐까. 전후 인과관계가 불분명하다.


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익어가는 것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이 듦은 그저 시간의 흐름에 나를 풀어놓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정성이기도 하다. 꽃이 피고 열매가 익어가면 나비와 벌이 저절로 날아드는 정원처럼 대기만성은 익어가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굴러들어 오는 것이 아니다. 땀과 피로 인생밭을 일구어 내는 과정이다.


늦은 결혼을 앞두고, 시어머니께서 우스개 소리로 말씀하셨다.


"혜정아, 너 시집 잘 오는 거야."

"아들아, 넌 장가가는 게 기적이야."


아직 다 차지 않은 그릇을 내놓는 것이 못내 아쉬워 힘을 채워 주시듯 한 마디 붙이셨다.

 

"우리 아들은 대기만성형이야."


현재의 초라함을 꽉 채울 수 있는 말.

희망을 불어넣어 지금을 견디게 해주는 말.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리게 하는 말.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는 게 아니라 결국은 완성된다는 역설의 말.

그릇 안 내용물의 양과 상관없이 그릇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다는 말.


대기만성형의 남편과 대기만성형의 아내가 합작하여 대기만성형 인생을 일구어 간다. 그냥 늦게라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나란히 놓여 있다는 사실이 좋다. 그릇을 채워 넣는 노력을 연료 삼아 말년복을 단단하게 구워볼까 한다. 대기만성의 결과는 깨지지 않는 그릇 자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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