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좋아한다. 그런데 와인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좋아한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동안 조용히 살아왔다. 형을 왜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그래서 오늘 처음으로 고백해 본다. 나는 와인이 참 좋다.
얼마 전 친구가 놀러 왔다. 절친답게 내가 와인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와인을 선물로 가져왔다. 나도 친구가 온다고 와인을 두병이나 사다 놨는데... 그리고 치즈, 올리브도 준비해놓았다. 그렇게 집에 와인이 세병이나 있었는데 한 병을 채 열어보지 못하고 1차로 시작한 소맥을 열심히 마시다 술자리가 끝이 났다. 아니 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소맥(소주+맥주)의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평소에 와인 또는 맥주만 마시던 나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흥에 겨워 소맥을 들이마시기 시작했고 결국 빠르게 취해버리고 말았다. 내가 취하는 것이 느껴질 때면 갑자기 심히 졸려오기 때문에, 아이들을 재운다는 핑계로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어버렸다. 소맥 다음 우리의 2차는 와인이었는데 그 와인은 고스란히 남겨지게 되었다.
졸지에 와인이 세병이나 생겨버렸다. 내가 미리 사둔 와인 두 병과 친구가 선물로 준 와인 한 병. 술에 유통기한이 있는 것이 아니니 앞으로 천천히 마시면 될 듯하다! 그래도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한 잔씩 마시고 싶었는데 아쉽긴 하다.
그러니까 와인이 왜 좋냐면 천천히 오래오래 마실 수 있어서 좋다. 소맥처럼 급하게 서둘러 마시다 취하지 않고, 게다가 나는 소주는 절대 마시지도 못하는 대다가, 맥주는 배가 불러 많이 마시지 못한다. 그렇다고 보드카 위스키 등의 다른 술은 내게는 아직 어렵다. 그러니까 와인이 딱 일 수밖에 없다.
와인은 친구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마셔도 좋고, 혼자 마셔도 참 좋다. 특히 맥주는 많이 마셔 배가 불러야 취하는 기분이 드는데, 와인은 적당히 마시면 배도 부르지 않고,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나 다른 술과 다르게 별다른 안주 없이도 잘 마실 수 있다. 왜 매일 저녁 마시는 포도주 한 잔이면 장수한다는 말도 있지 않았나?
요즘은 술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곳이 많이 생겼다. 그곳에 가면 와인코너, 맥주 코너, 각각의 술이 종류별로 구비되어 있다. 게다가 와인만을 파는 매장도 많이 생겨서 구매하기가 쉬워졌다. 특히 가까이에 있는 대형마트에서도 와인을 쉽게 살 수 있다. 마트에서는 때때로 와인 마켓을 열어서 공동구매를 통해 저렴하게 구매할 수 도 있다. 제주에도 와인 파는 매장이 참 많은데, 와인 창고 같이 크고 넓은 매장에 가면 세상에 이렇게나 와인의 종류가 많다니 하면서 한참을 놀라며 구경한다. 와인이 나라별로 이쪽부터 저쪽 끝까지 꽉꽉 채워진 진열대를 보면서, 죽기 전에 이 것들을 다 마시고 죽을 수는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보통 그곳에서 추천하는 와인들을 사고는 한다. 와인을 좋아하지만 잘 알지 못하니까 와인 앞에 '2022년 베스트' 이렇게 문구가 적혀있는 추천 와인을 사곤 한다. 매일 와인 판매 매장에 가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가끔 와인 매장에 들려 와인을 사서 오는 길은 많이 설렌다. 새로 산 와인은 무슨 맛일까? 가득 기대하며 늦은 저녁이 되면 오픈해 마셔본다. 아직도 자동 오프너를 사지 않아 힘겹게 와인을 오픈하고는 하지만 와인을 좋아하면서 와인 오프너를 사기 아까워하는 것은 다른 이유다.
그렇게 와인 매장에서 추천된 와인은 보통 무난한 맛이다. 보통 호불호가 없을 것 같은 와인이 걸려들고는 한다. 누구든 '괜찮네, 가성비 좋네' 생각할 만한 와인. 그래도 그중에 마음에 드는 와인은 잘 기억해뒀다가 다음번에 같은 것으로 구매해 오곤 한다. 보통 한번 마음에 든 와인은 여러 번 구매해 마시게 된다.
그런데 종종 라벨에 끌리는 와인이 있곤 하다. 눈에 띄게 화려하거나, 조금 특이한 라벨 그래서 눈에 띄었던 와인들. 그렇게 샀던 와인은 보통 80% 정도는 실패였다. 그래서 새로운 와인을 사는 것이 조금 두려운 때도 있었다. 그래서 마셔본 와인 중에 괜찮은 와인을 중간중간 다시 사서 마시는 것이다. 나도 때론 안전한 맛의 와인이 마시고 싶으니까. 늘 새로운 맥주만을 사서 마시는 남편이 내가 와인을 마실 때면 나타나 '그거 지난번에 마셨던 와인 아냐?' 하고 바라보는 눈빛에 늘 뜨끔한다.
보통 데일리 와인으로 저렴한 와인을 마신다. 여전히 비싼 와인은 부담스럽다. 게다가 사실 아직 맛을 잘 몰라서 비싼 와인인지 저렴한 와인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역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참 그렇다.
언제부터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시작은 결혼 직후 미국에 살았을 때부터였다. 남편은 맥주를 좋아해서 늘 새로운 맥주를 찾아 리쿼 샵(Liquor shop)을 들리곤 했는데, 그때부터 와인을 사게 되었다. 처음엔 나도 남편이 사는 그 새로운 맛의 맥주를 같이 마시곤 했으나 역시 맥주는 마시면 배가 불러서 밤에 잠을 푹 못 자게 돼서, 배부르지 않고 기분 좋아지는 술을 찾았는데 그게 와인이었다.
그때가 십 년 전쯤인데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하게 찾을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술을 미국에서는 더 쉽게, 저렴하게 마실 수 있었다. 게다가 미국 본토 와인은 어찌나 저렴한지(당연하게도) 데일리 와인은 10불 안쪽으로도 살 수 있었다. 나중에 그것들을 한국 매장에서 만났을 때 2배 넘는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암튼 그때부터 기회가 될 때마다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와인을 마시던 그때 와인을 고르는 기준은 딱 두 개였다. 마음에 드는 라벨 또는 가격. 특히 그때는 여유 없던 시절이라 가격이 제일 중요하게 작용했는데, 평소에 구매할 때는 10불 내외, 조금 기쁜 일이 생겼을 때 사던 와인은 20불 내외에서 끝냈다. 그러다 아주 자끔 값비싼 와인을 선물 받아 마실 때가 있었는데 비싼 와인이라 그런지 왠지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사실 뭐가 진짜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십 년이나 와인을 마셨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단지 내 입에 잘 맞는 와인과 새로 샀는데 아, 별로네... 실패다 하는 와인이 있을 뿐이다. 이는 나의 미각의 한계람 말인가!
언젠가 기회가 되어 프랑스나 이탈리아로 와이너리 투어를 떠나면 좋겠다. 햇살 좋고 드넓은 포도원에서 만들어지는 와인을 조금씩 마셔보며 즐겨보고 싶다. 그때는 와인을 조금 잘 아는 '와잘알' 이 되어있다면 더 좋겠지? 생각만 해도 즐거운 희망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