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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ir Sep 22. 2022

돈만 소비했다는 착각

오랜만에 걷고 싶었다. 걸으려거든 올레길이나 오름으로 갔으면 좋았을 텐데, 무엇인가 구경하며 걷고 싶었다. 사실 걷고 싶은 것은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요즘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산속에 갇혀서 도를 닦는 마음으로 쇼핑을 피해왔다. 30여 년 쇼핑을 하던 사람에게 한순간 소비 단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눌리고 버티고 참았던 그 마음은 언제고 곪아서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요즘 기분도 안 좋고 신경질적이 돼버려서 아마도 그날이 가까워 온 것 같지만, '아니야 나는 쇼핑이 부족한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오랜만에 아이쇼핑이라도 해야 했다.



여러 번 말했다시피 제주도에는 쇼핑할 곳이 거의 없다. 그래도 있긴 하다. 잘 찾아보면 아주 아주 찾아보면 다. 평소에 내가 주로 다니는 곳신제주 쪽이므로 구경을 할 때는 구제주로 넘어간다. 구제주... 그곳은 칠성로라고 부르는 번화가가 있고 그 아래에는 지하상가 그리고 그 옆으로 거대한 동문시장이 위치하고 있어서 이것저것 두루두루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오늘은 그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나가는 길에 동문시장 언저리에 내려줬다.  실로 오랜만에 구경을 시작했다. 간만에 느끼는 색다른 기분이었다. 제주도에 여행 온 것 같으면서도 주민으로서의 여유가 느껴졌다. 나는 또 걷고 또 걸으며 구경했다. 지하상가를 샅샅이 훑어보고 동문시장을 거쳤다. 얼마나 오랜만에 하는 구경인지 시장에서 판매하는 귤, 기념품, 과일, 야채 구경도 재밌었다. 한참을 구경하는  중간에 당이 떨어져서 그 동네 유명하다는 커피를 한 잔 마시러 갔는데,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문이 닫혀있었다. 서울에 바리스타 대회가 있어서 참가한다고 했다. 아쉬웠다. 어쩔 수 없이 분식집으로 향했다. 동문시장에는 사랑 분식이라는 유명한 떡볶이 집이 있는데 그 집은 월, 화, 수를 쉬고 목요일부터 오픈한다. 오늘은 목요일, 분명히 그곳이 오픈할 것이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동문시장사랑 분식을 찾아갔다.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1등인가? 일단 사랑식(떡볶이+어묵+김밥+만두)이라는 제주도식 떡볶이 세트 모닥치기를 주문해서 먹었다. 분명 커피가 마시고 싶었는데 떡볶이로 대신한 것도 괜찮았다. 덕분에 뱃속이 든든해졌다. 다시 걷고 구경할 힘이 생겼다.




오랜만에 아이 옷을 쇼핑했다. 아이는 별로 크지도 않은 것 같은데, 봄에 입혔던 옷이 겨우 한 계절이 지났는데 벌써 옷들이 작아졌기 때문이다. 마침 자주 눈여겨보던 옷가게에서 세일 중이길래 원피스를 한 벌 샀다. 득템이다. 무려 50% 할인이었다. 약간 넉넉한 사이즈로 사서 아마 봄까지도 잘 입힐 수 있을 것 같다. 평소 아이 옷과 신발은 거의 물려받아 사용하기 때문에 일 년에 한 두벌 정도만 구매하는데 세일 덕분에 정말 잘 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이곳저곳 둘러보며 한참을 구경했는데 내 옷은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분명 한참을 둘러봐도 없었다. 그러나 역시 인간은 사려고 마음먹으면 기어이 고 마는가 보다. 집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들러본 spa 브랜드였다. 패스트패션 브랜드라 그런지 세일을 많이 한다. 역시 세일 무섭다. 눈이 불을 켜고 열심히 찾아본다. 그때 아주 심플한 연베이지 원피스를 발견했다. 오! 딱 내 스타일인데...



이런 spa옷가게가 좋은 이유는 옷 착용 편하게 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고른 옷은 원피스인데 윗부분이 살짝 오버핏이다.  상체는 조금 크게 느껴지지만 치마 부분 딱 맞고, 그 부분이 퍼지는 게 딱 내 스타일이다. 구매할까? 순간 충동구매를 하려는데 치마 지퍼 아래 터진 부분을 발견했다. 아쉬웠지만 불량의 옷을 살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살 수 없는 컨디션이니 잘 되었다 싶었다.




그런데 마치 운명처럼! 세일 코너에 하나뿐인지 알았던 옷 줄 알았는데, 다른 옷 뒤편으로 같은 사이즈의 똑같은 원피스가 한 개 더 걸려있었다. 어머! 이건 사라는 운명이다. 분명하다. 나는 가끔 이런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렇게 샀던 옷이 성공한 적이 몇 번이나 있던가! 그러나 이 순간 또 잊는다. 바로 구매했다.



결국 운명같이 만난 하자 없는 새 상품과 그리고 저렴한 가격에 무너졌다. 역시 이래서 세일은 참 무섭다.







이전에는 옷을 사면 신나고 즐겁기만 했는데 이제는 옷을 사고 나면 마음 한쪽이 불편하고 내가 왜 그랬을까 죄책감이 들기 시작한다. 이번에 세일해서 겨우 3만 원짜리 원피스를 샀는데, 분명 별로 비싸지도 않은데 집에 돌아는 길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분명 굉장히 오랜만의 쇼핑이었는데 처음엔 많이 불편했다.  그러다 나중엔 '아니 내가 뭘 그렇게 옷을 샀다고 그래! 가을이잖아~ 옷 하나 정도는 사도 돼~ 집에 있는 거 하나 버리면 ' 하는 자기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 다시 입어봤다. 집 거울은 옷 매장의 거울과 참 달랐다. 현실적이다. 아무리 봐도 상체가 조금 크다. 그곳의 거울과 다르게 큰 것이 더 잘 보이고 덕분에 나는 엄청 뚱뚱해 보인다. 가장 큰 문제는 거기서 봤던 컬러 다르다. 조명 탓이다. 너무 밝다. 나는 분명 연베이지색인지 알고 샀는데 이 정도면 화이트 아냐?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지...



아... 역시 물건을 살 때는 3번을 고민해보기로 했는데 또 잊었다. 역시 조금만 더 고민해볼걸... 사고 싶었던 그 순간에 한 번만 참고 밖으로 나와버릴걸 다시 후회했다. 아니 아예 가지 말 것을 그랬네. 결국 그 옷을 가지고 밤새 고민했다.







결국 환불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옷을 산지 하루 만에 환불을 하게 되다니 정말 바보 같았다. 하... 이것은 정말 미친 짓이다. 차라리 사지를 말지! 그리고 이번에는 차로 그곳을 갈 수도 없었다. 앱으로 대중교통으로 가는 경로를 찾아보니 버스로 1시간이 족히 걸리는 거리다. 왕복 2시간. 아... 망했다.



지금 시간 11시 10분. 집에서 10분 정도걸어가면 버스를 탈 수 있다. 불행 중 다행인지 한 버스만 타고 가면 도착한다. 그러나 50분 정도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5분 정도 걸어야 했다. 환불을 결심하고 바로 버스를 타러 나갔다. 버스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생각보다 그곳은 먼 곳이라 나는 졸음을 겨우 참으며 갔다. 버스는 가고 또 갔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했다.



다시 5분을 걸었다. 곧장 매장으로 달려가 환불을 했다. 부끄러웠다.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제 옷을 산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야지. 다시 5분을 걸어서 버스를 탔다. 이번에는 버스를 한번 환승을 해야 한다. 긴 시간 차를 타고 다시 환불하고 다시 버스에 앉아있던 것만으로도 피로가 몰려와, 환승하는 곳에 내렸을 때 초콜릿을 먹었다. 아... 긴 하루였다.  





환불은 미친 짓이다







집에 돌아온 시간 1시 40분.  버스 탄 시간만 2시간이고 이리저리 이동하고 기다린 시간이 30분 정도인 것 같다. 와우,  시간 반의 긴 여행이었다.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아 글을 쓰고 있으니 밖으로 나가 환불하고 온 것이 꿈만 같다.




고작 몇만 원 하는 원피스였다. 별생각 없이 그것을 구매해 온 대가가 이렇게 크다니! 그것을 환불하는데 든 시간은 두 시간 반이었고, 결국 나는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길에 시간을 버렸다. 아마 다녀온 시간으로 따지만 그 원피스를 환불하는 것보다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돈만 소비했다는 착각. 나는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지 않았다. 내 금 같은 시간!!!




순간의 잘못된 선택, 결코 내 것이 되지 않아야 하는 것. 이번 환불 사건을 통해 다시 소유와 무소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다음번에는 정말 신중해야 한다. 절대 이런 똑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정신 차려야겠다. 이렇게 아이쇼핑계도 떠나야 한다니 마음이 아프지만 결국 분명한 것은 보지 않아야 사지 않는다. 역시 아이쇼핑은 위험했다.



돈만 소비했다는 착각. 내 시간 절대적으로 소중하다. 앞으로도 신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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