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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ir Apr 04. 2024

잊기 전에, 다시 취미로

오랜만에 바늘을 손에 잡았다. 또 몇 달 동안 손을 놓고 있었다. 가끔은 생각나 매일 바느질을 하고 언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느질을 멈춘다. 내가 하는 바느질의 정확한 명칭은 프랑스 자수이다. 그런데 지금 하는 것은 전통 프랑스 자수는 아니고 내 마음대로 하는 것에 가깝지 때문에 바느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프랑스 자수와의 인연은 대학원에 다닐 때였다. 2학기는 남겨두고 이제 슬슬 논문을 써야만 졸업하는데, 논문을 쓰려니 앞이 캄캄했다. 논문을 쓰려면 책을 더 많이 읽고, 논문도 더 많이 읽고 해야 했는데,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다른 길로 도망갔다. 그게 바로 프랑스 자수였다.



워낙에 손으로 하는 모든 취미활동을 좋아하는데(그렇다고 잘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자수는 계속 배워보고 싶었는데 미뤄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프랑스 자수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을 만났다. 그 당시에 프랑스 자수 수업으로 제일 유명한 선생님이었다. 매주 한번 강남역의 카페에서 프랑스 자수 클래스가 열렸다. 그리고 나는 그분께 꽤나 비싼 수업료를 내고 자수를 배웠다.



그때는 잠깐 미국에서 나와 친정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을 때라 지방에 있었는데, 매주 화 목 대학원 수업을 들으러 올라왔었다. 수업을 들으러 올라와서는 대학원 수업에 가기 전에 강남역으로 향했다.



특히나 수업 전에 그 클래스를 들으니 더욱 꿀맛이었다. 원래 시험공부할 때 보는 책은 교과서를 제외하고는 뭐든 재밌지 않은가! 아무튼 시험공부만 아니면 다 즐거운 법이니 그때는 논문 이외의 것은 모든 것이 재밌었었다.



그래서 그때 논문 쓰는 시간 이외의 시간, 특히 도저히 책도 글도 컴퓨터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된 늦은 시간이면 실과 바늘을 잡고 프랑스 자수 숙제를 하며 힐링했었다.



그래서 논문은 잘 썼냐고? 당연하다. 매주마다 교수님께 지도받고 차근차근 써냈더니 가까스로 통과되었다. 100% 만족은 아니었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고작 대학원생의 졸업 논문이니 그 정도로 끝났던 것 같다. 겨우 한 개 쓰는 논문이 뭐 그렇게 힘들었을까 싶지만, 그때의 나에겐 그게 전부였다.  








시간이 흘러 아이를 낳고 바느질과는 먼 삶을 살았다. 그러다 제주에 오니 다시 바느질이 하고 싶어졌다. 그전까지는 아이가 어려 바늘로 무엇을 한다거나, 아니 육아에 온통 신경 쓰느라 바느질은 조금 사치였다. 그러나 제주에 올 즈음에 아이는 어느 정도 커 있었고, 나는 제주집에서 정원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밖을 바라보며 바느질을 하는 로망을 꿈꿨던 것 같다.



이제는 어려울 것도 없었다. 프랑스 자수는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선생님께 제일 값비싼 수강료를 내면서 배웠으니까... (사실 배운다고 전부가 아니긴 하다)



그러나 그 모든 재료들은 미국에 두고 돌아왔으므로, 다시 주문했어야 했다. 원단, 수틀, 바늘까지 모두... 어쩔 수 없이 간편한 패키지로 주문했다.



가장 첫 작품은 친구에게 주는 생일선물이었다. 오랜만에 했던 첫 작품이라 부실하기도 하지만 제일 공들여 작업했던 것이다. 얼마 전 친구네 집에 갔을 때 그 자리에 남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사실 어디로 숨겨졌을까 봐 걱정했던 것 같기도 하다)



두 번째 작품은 아이의 작은 손가방이었다. 그 손가방은 정말 귀여운 곰, 도토리, 나무 등등의 작은 동식물로 이루어진 작은 에코백이었다. 뭐라도 넣어서 가지고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또 꽤 오래 걸린 바느질로 인해서 내 작품을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잘 포장해서 넣어두었다.



세 번째 작품은 밤비였다. 핑크색 원단이 마음에 든 그 작품은 사슴이 참 예뻤다. 나중에 아이방이 생기면 걸어두고 싶었다. 가장 쉬워 보이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1,2,3.작품들






밤비를 마지막으로 바느질을 한참 동안 쉬었다. 그러다 또다시 취미생활에 발동이 걸릴 때가 있는데, 그때 새로운 프랑즈 자수 패키지를 주문했다.



이왕이면 필요한 것을 만들자 싶어서 이번에는 티슈커버를 제작하기로 했다. 티슈상자가 상자채 그대로 나와있는 것이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물론 티슈케이스를 사도 되지만 이왕이면 취미생활 겸 만들어도 좋으니까,



그런데 너무 어려웠다. 설명서는 대충 적혀있었고,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하다 말다 거의 시작인 채로 내버려 뒀고 그 후에는 겨울방학을 보내고 오느라 반년이 넘도록 전체의 10%밖에 완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드디어 다시 오늘 바느질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사놓고 보관만 한지 몇 달이나 된 프랑스 자수 패키지가 싫어서라도 빨리 완성해야겠다 싶었다. 지난번 티슈커버 패키지를 주문하며 딸기 액자도 함께 주문했기 때문에 부지런히 해야 한다. 다음 바느질 완성품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진행중인... 그리고 다음 작품






다양한 취미생활을 할수록 집에는 그와 연관된 재료나 제품들이 쌓이기 시작한다.



먼저 프랑스자수는 이미 3개프랑스 자수 패키지를 완성했더니 가지고 있는 바늘이 많아졌고, 실도 조금씩 남게 되었다. 그리고 작년에 취미로 그림을 시작하며 사두었던 물감과 붓도 남아있다. 또한 요가와 필라테스를 시작하며 사두었던 요가매트도  보관되어 있다.



취미생활은 말 그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된다. 다만 그 취미생활이 멈춰버리면 그때 사용했던 재료나 제품들은 그대로 묵혀질 수밖에 없게 된다. 다음에 언제라도 사용하면 다행인데... 보통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취미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진다. 집에 취미용품만 늘어날까 봐서이다.



그래서 그 장비들이 잊히기 전에 다시 프랑스 자수를, 그림 그리기를, 요가를 찾아서 하려고 한다. 취미생활을 멈추지 않고 꾸준히 해나가는 것도 가진 물건을 소지하는 것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번 프랑스 자수 패키지인 티슈커버를 모두 완성하게 되면 그때는 다시 그림을 그리려고 한다. 그리고 그 중간마다 시간이 날 때(아니 만들어서라도) 요가매트를 켜놓고 다시 요가를 시작해야겠다.



새로운 취미를 찾는 대신에 이미 가진 취미를 더 잘 활용해 볼까 한다. 이미 가진 취미로도 나는 풍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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