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에 선물로 받았던 텀블러가 있었다. 기존에 쓰던 텀블러가 있어서 나중에 쓰려고 보관해 놨던 것이다. 그러다 오늘 커다란 텀블러가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되었다. 워낙 사이즈가 큰 텀블러라 커피 샷을 네 개(사실은 더 넣어도 될듯함) 내려서 가지고 갔다. 모임이 있는데 함께 커피를 나눠 먹으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존에 사용하던 작은 텀블러에는 나만 쓰려고 커피 샷 한 개를 내려서 가져갔다. 그런데 커피를 마시려는데 유독 컵 뚜껑이 잘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억지로 어찌어찌 뚜껑을 열었는데 원래 열리던 뚜껑이 아니라 다른 뚜껑이 열리는 것이다. 결국 그날 그 텀블러는 고장이 났다.
고칠 수 있는 텀블러가 아니어서 버리게 되었다.
버리는 것이 아까웠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했다. 왜냐면 오늘 사용하려고 꺼낸 새 텀블러가 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새 텀블러를 사용하면 될 것이다.
한참 전에 깨진 국수 그릇을 살까 말까 고민하다 여태 사지 못했다.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그릇은 많지만 아직 완전히 내 마음에 딱 들어오는 그릇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국수나 가락국수를 삶는 날이면 아빠곰, 엄마곰, 아기곰네 집처럼 사이즈가 각기 다른, 모양도 색도 각기 다른 그릇이 식탁에 올라오기 때문에 좀 아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 가는 친구 집에 도와주러 갔다. 친구는 식기류와 냉장고를 정리 중이었는데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가져가라고 했다. 그중에 면 그릇이 같은 모양과 색깔로 눈에 띄었다. 개수도 우리 가족 인원처럼 딱 세 개였다. 이게 웬 떡이냐 생각하며 곧바로 챙겨서 가져왔다.
지극히 평범한 면그릇이었다. 진작에 살려면 인터넷에서 하루 배송으로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을 정도의 모양새와 사이즈였다. 그러나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 면그릇을 집에 가져와서 여태껏 아주 잘 쓰고 있다. 그 어떤 면그릇이라고 해도 이만큼 만족스럽지 못할 것 같다. 면 요리는 물론 볶음밥, 넉넉하게 무엇인가 담을 때마다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같은 모양의 그릇 세 개가 식탁에 올라올 때마다 참 잘 가져왔다는 생각을 한다.
적시적소, 안성맞춤이다.
자주 사용하던 손잡이 달린 투명 유리컵이 있었다. 이것 또한 선물 받은 것인데 용량이 넉넉해 주로 커피 드립을 할 때 쓰던 유리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척을 하다가 살짝 부딪혔는데 쨍그랑 깨져버렸다.
평상시였다면 안타까운 마음이 이번엔 괜찮았다. 사실은 그걸 쓰기 전에 잘 사용하던 사이즈가 반만 한 유리병이, 서랍장 깊숙이 오랫동안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잘 쓰던 것이 깨져버려서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쓰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던 병을 다시 쓸 수 있어서 기뻤다. 드디어 다시 사용할 날이 오는구나! 거의 4~5년 만이다.
오랫동안 보관만 해오던 병을 꺼냈다. 요즘은 드립커피를 즐기지 않아서 그마저도 쓸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랜만에 차를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에 꺼낸 컵이라 깨끗하게 세척을 했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붓고 티백을 넣어 차를 우려냈다. 이전 것보다 사이즈는 작아졌지만 다시 쓸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층에 오랜만에 물건을 정리하다가 두 해전에 선물 받은 컵을 발견했다. '아... 여기 새 컵이 있었네.' 보통 집안의 물건을 다 기억하며 하나하나 유용하게 쓰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눈에 보이지 않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요즘 작은 컵이 많이 깨져서 가지고 있는 찻잔들을 평상시 물 잔으로 사용 중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쓰다 보니 찻물이 잔에 스며들어 내부가 지저분해졌다. 아무래도 자주 사용해서 더 착색이 된 것 같다.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내부를 보면 천년만년 쓴 느낌이다.
아무래도 버릴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마침 선물만 받고 쓰지 않던 컵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여전히 집안에 물건이 넘치도록 많다. 그리고 대체될 수 있는 물건도 한 두 개가 아니다. 그래도 꼭 필요한 물건인지 기다려도 보고, 이미 가진 물건을 소중히 여기며 잘 써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에는 아주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새 텀블러, 받아온 그릇들, 보관된 컵까지 딱 맞춤의 상황이다. 앞으로 이 물건들을 잘 쓰기만 하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