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 끝난 거야
인왕산까지 가는 길은 토요일 오후라 많이 막혔다. 그의 회사 얘기, 나의 학교 얘기, 날씨 얘기까지 나누다 대화가 잠시 주춤해진 사이 나는 살포시 차창을 내려본다. 상쾌한 봄바람이 훅 들어온다. 이제 제법 날씨가 따뜻해졌는지 바람에 온기가 서려 있다. 지훈이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3월 중순이라 꽤 쌀쌀한 바람이 불었는데 어느덧 4월이 되어 길가의 가로수에도 제법 파릇파릇한 새싹이 나 있다. 봄이라는 계절이 성큼 다가온 것 같았다.
지훈이는 여러 번 와봤는지 경사가 진 인왕산 중턱, 주차장도 아닌 도로가 한 편으로 주차를 기가 막히게 했다. 살짝 숲이 우거진 곳 바로 밑이었는데 차가 딱 한 대 들어갈 만한 공간이었다.
"내릴 때 조심해요. 나뭇가지에 찔릴 수가 있어요."
"아, 네."
그냥 알았다고만 대답하면 될걸. 바보같이 아, 네가 뭐니...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한 유행가 가사가 생각나기도 하는 순간이다. 지금 내 모습이 딱 그 가사의 주인공 같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지훈이 앞에만 서면 머릿속이 그냥 텅 비어버리기는 것을...
무아지경(無我之境) : 정신이 한 곳에 온통 쏠려 스스로를 잊고 있는 경지
나는 지금 그 무아지경에 이르러 민지훈이라는 황홀함을 앓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부터 출발하면 정상까지 금방 도착해요. 그게 낫죠? 너무 밑에서부터 시작하면 한참 걸려서."
"그럼요. 근데 여기 자주 와보셨나 봐요. 지리를 잘 아시네요."
"운동은 다 좋아해서 등산도 자주 해요. 여기가 돌산이긴 해도 북한산보다 코스도 짧고 경치가 좋아요. 서울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거든요."
우리는 그렇게 인왕산 중턱부터 함께 등산을 시작했다.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인 나와는 달리 지훈이는 등산바지에 등산화까지 갖춰 입고 왔다. 이 사람은 등산화까지도 잘 어울리는구나. 역시 뭐든 다 잘 어울리네. 작은 배낭에 물통도 챙긴 것 같았다. 나는 화장만 하느라 시간을 다 허비했지 정작 물통도 챙기지 않았다. 지훈이 물 나눠마시면 되겠지? 콩닥콩닥. 물 나눠마시는 게 뭐라고.. 그렇지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등산은 최소한 오르락내리락 3시간은 걸리겠지? 내려와서 밥이라도 같이 먹으면.. 흐흐.. 오늘은 최소 4시간 이상은 붙어있을 수 있겠다. 온갖 상상을 하며 한 발짝, 두 발짝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인왕산은 완전 돌산이었다. 서울에 살면서 남산 이외에는 산을 타본 적이 없었던 나는 적잖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올라가는 길목에 커다란 바위를 몇 번 타야 했었는데 운동화를 신어서인지 죽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제대로 산을 못 타는 그런 나의 손을 지훈이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잡아 주며 물었다.
"등산화 없어요?"
"네.."
"등산 좋아한다고 해서 당연히 등산화 신고 올 줄 알았어요. 산 별로 안 타봤죠?"
지훈이에게 정곡을 찔려서 그런 것인지, 단지 그의 손을 잡아서인지 순간 얼굴이 확 달아 올랐다. 지훈이의 손은 참 크고 따뜻했다. 짧고 뭉툭한 내 손과는 달리 손가락도 길었다. 옛말에 남자가 손가락이 길면 게으르다는데 운동도 열심히 하는 지훈이를 보면 이 말도 다 사실이 아닌가 보다.
"네.. 사실은 서울 와서 남산 이외에는 딱히 가본 산이 없는 것 같아요. 어디 구경하고 돌아다니는 건 좋아하는데... 산은 심심하고.. 같이 갈 사람도 없고.. "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어 지훈이에게 이실직고했다.
"하하하. 그런데 왜 등산 좋아한다고 했어요? 그냥 솔직하게 말했으면 다른 것 하자고 했을 텐데.. 영화 봐도 되고.."
뭐라고 답해야 할까 고민된다. 단지 너에게 반해서, 같이 있고 싶어서, 처음부터 까다롭게 튕길 수가 없어서, 사실은 다른 걸 하자고 제안하기도 싫어서 그저 하자는 대로 했다고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
"음.. 지훈 씨랑 같이 오면 왠지 등산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이것만큼 확실한 고백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너에게 이토록이나 호감이 있어서 생전 처음으로 인왕산에도 따라와 본 것이란다. 그러니 나의 진심을 제발 알아봐 달라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정상에 올라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시원한 바람도 적당히 불어오고 발 밑의 경치는 멋있었다. 서울이 정말 거대도시는 맞나 보다. 이토록 많은 건물들과 집, 도로,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니... 새삼 놀라웠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어떻게 지훈이를 만나게 된 건지 우리의 만남 자체가 신기했다. 그와의 만남이 과연 우연일까, 아님 운명인 것인가?
전망 좋은 산에서조차 바로 옆에 그와 붙어 있으면서도 머릿속으로 또 그 사람 생각을 하고 있다니.. 이 정도면 병 수준인게지.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보고 있어도 자꾸만 생각나고 보지 않게 되면 병이 난다는 치료약도 없다는 그런 상사병 말이다..
지훈이가 가져온 물을 나눠 마시고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쉬었다. 이제 돌아가야 되는데 내려갈 일이 걱정이다. 평소에 운동도 잘하지 않는 게으른 몸이라 이미 올라오면서 나의 체력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하행길 경사가 급한 부분을 내려가는데 다리에 힘도 빠졌고 운동화 바닥이 미끄러워 아니나 다를까 흙바닥에 죽 미끄러졌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아프기도 하고 지훈이 보기가 참 창피했다.
"괜찮아요? 원래 내려가는 길이 더 힘들긴 해요."
지훈이는 길고 커다란 손을 나에게 다시 내민다. 그 손이 진흙탕에 빠진 날 꼭 구원해 주는 손길 같아 잠시 넋을 읽고 쳐다보기만 했다.
"어서요."
지훈이 재촉한다.
"네.. 고마워요."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차로 돌아가는 길 내내 우리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고 무사히 출발했던 장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배 고프죠? 밥 먹으러 어디로 갈까요?"
지훈이는 차 시동을 걸면서 묻는다. 행동도 민첩하고 다음 코스도 척척 챙긴다. 부지런한 사람 같다.
"음.. 신촌은 좀 지겨운데.. 홍대 앞으로 가볼까요? 주말이니 주차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좋아요. 근데 클럽 가자는 건 아니죠? 은수 씨 혹시 클럽 다녀요?"
"제 복장을 보세요. 클럽 갈 사람으로 보이나요?"
"하하하. 그렇죠.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요."
"왜요? 요즘은 클럽 많이들 다녀요. 저는 춤을 못 춰서 안 가지만.. 1학년 때 친구들하고 다 같이 한 번 가봤어요. 시끄럽고 정신없는데 좋아하는 친구들은 또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혼자 춤추는 사람도 많고 다들 자유로워 보였어요."
내 말에 지훈이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클럽을 안 다니니 내가 만나는 사람도 안 다녔으면 해서 물어본 거예요."
내가 만나는 사람? 지금 지훈이는 나를 계속 만날 생각인 거지? 심장이 또 쿵 내려앉는다.
우리는 홍대 메인 스트릿에서 좀 멀리 떨어진 한강이 보이는 골목 한적한 곳에 주차를 하고 한참 걸어 나왔다. 토요일 저녁 홍대 거리는 한껏 치장한 젊은이들도 북적북적하다.
식당과 술집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자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르바이트 생이 2층 이자카야로 가라며 우리에게 호객행위를 한다. 신규 오픈한 집이라 서비스로 안주를 많이 준다고 했다.
"맛있어 보이는데 들어갈까요? 사람들도 많은 것 같고.. 등산하고 피곤하니 한 잔 해야죠."
지훈이는 별 망설임 없이 먼저 들어간다.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되는데.. 은수야, 정신 차리고 조금만 마시자.'
나는 분위기를 잘 타서 기분 좋으면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끝도 없이 마시곤 했다. 주량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별로 취해본 적은 없었고 꽤 잘 마셔서 인사불성 된 친구들을 모두 집에 데려다주고 간 적도 많다. 그렇지만 지훈이랑 이제 막 친해지기 시작했고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조심할 필요는 있어 보였다. 스스로에게 되뇌며 조용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모님,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저녁 6시쯤 자리 잡은 거 같은데 벌써 밤 12시가 가까웠다. 우리 테이블은 이미 다 먹은 안주 접시가 몇 번이나 정리돼서 나갔고 빈 소주병과 맥주병만 가득했다. 서비스로 따끈한 조개탕이며 계란찜도 여러 번 들어온 것 같았는데.. 배는 부른데 뭘 얼마나 마시고 먹은 건지도 기억이 안 난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난 취하지 않았고 더 마실 수 있다는 것.
"와, 은수 씨 주량이 얼마나 돼요? 이제 시킨 것까지만 마시고 가요. 난 조금 있다가 대리 부를게요."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지훈의 두 뺨이 벌겋다. 사실 그와 6시간 동안 무슨 얘기를 한 건지도 하나도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냥 그 사람이 날 보며 계속 웃었던 것만 기억난다. 그리고 나도 그와 함께 계속 웃었다. 딱히 재밌지도 웃기지도 않은 얘기를 나눈 것 같은데 그냥 같이 웃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시킨 술을 다 마시고 새로 개업한 서비스 잘 나오는 그 이자카야를 나온 게 새벽 2시쯤... 이곳은 주말엔 새벽 4시까지 영업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우리 둘 다 등산도 다녀오고 너무 피곤해서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지기로 했다.
주차한 곳으로 가니 이미 대리기사가 도착해 있었다. 신촌 우리 집 근처에 먼저 들러서 나를 내려주고 서초로 가는 코스를 지훈이 기사분께 부탁한다.
집 앞에 내려서 지훈에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을 열자마자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벌러덩 바닥에 드러눕는다. 너무 피곤했다. 세수라도 하고 자야 되는데 눈꺼풀이 자꾸 감긴다. 초인적인 힘으로 신발을 벗고 양치만 겨우 하고 다시 1층 바닥에 눕는다. 2층에 있는 침대까지 갈 힘도 없다. 오늘은 그냥 이렇게 자야겠다.. 근데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눈을 감고 잠을 자는데도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난 분명 취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