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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기영 Oct 09. 2023

4. 사랑은 어렵다

추억에서 건진 단상

타인에 대한 '사랑'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단어이지만, 내 삶의 방식으로 삼고 싶었던 소망의 단어이기도 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다. 외가가 기독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어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는 것이 나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인생을 어찌 살아가야 할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예수님이 강조하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사랑 인생의 모토로 삼기로 했다. '오른편 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편도 돌려 대고',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는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는' 사랑시전하면 상대방에게 낌없는 사랑이 전달되고 이러한 경험들이 쌓여가면 세상이 조금은 아름다워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의 생각과 현실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닫기까지는 채 몇 년도 지나지 않다.


학사장교로 군생활을 하던 때였다. 비록 군대이긴 하지만 나와 같이 복무하던 사병들이 고생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병들을 사랑으로 대하려고 노력했다. 어느 날 부대 연병장을 걷다가 동료 장교가 내 휘하의 사병들에게 기합을 주고 있는 상황을 목격했다. 내가 사병들에게 어떤 일을 지시하면 그에 대한 대응이 신속하지 않다고 느끼던 때였다. 우리 사병들에게 다른 장교가 기합을 주는 것 기분 좋지 않았지만, 기합을 받고 있는 사병들의 목소리와 행동이 나에게 보였던 것보다 더욱 크고 민첩 것을 보면서 절망하였다. 사랑을 베풀려고 노력하는 사람보다 무섭게 채근하는 사람에게 더 긴장하고  좋은 결과를 보여주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군대 사회의 일반 조직과 다른 특별한 조직이기 때문일 거야.'라며 나의 마음을 다독였고, 실망하지 않고 나의 삶의 신조계속 지켜나가자고 다짐했다.


직장에 취직하였다. 열심히 일했고, 같이 일하는 직장 선후배, 동료에게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신입의 모습이 희미해시간이 흘러갈수록 기쁘게 나의 모토를 실천해 나가던 활력이 사그라들고 '나는 베푸는데 타인들은 왜  호응이 없을까?' 하는 의문이 커져갔다. 왠지 나만 손해 보는 느낌이 들어 힘이 들었다. 어느 늦은 저녁 시간, 사무실에 혼자 남아 더미 같은 서류를 하면서 타인을 사랑하기는커녕 배신감을 느끼고 미워하는 감정이 곧 터질 풍선처럼 차오르는 나의  모습을 보며 소스라쳤다.


이 날 저녁 이후로 나를 포함한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며, 나의 이익을 뒤로하고 손해를 감수하면서 타인에게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간의 경험들로 인해 상대의중을 의심하게 되웃던 나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갔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착한 사람이기보다는 착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세간에 회자되는 '착한 사람이 손해 본다'는 말이 맞는 듯했다.


외출하기 위해 샤워를 하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동그란 화장대 거울에는 눈밑과 목덜미의 주름살이 부쩍 짙어지고, 하관이 네모나고, 입꼬리가 내려가 있어 완고한 표정을 가진 중년남자 무심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얕보여서 손해 보는 일이 생기는 게 싫어서 웃는 표정을 버렸고 미간을 찌푸린 채 살아간 세월이 켜켜이 쌓여 표정 없는 가면 쓴 얼굴이 되어버렸다. 


젊은 직장인 시절. 점심을 먹으러 명동길을 걷다가 밝은 가을 햇빛에 눈부신 은발을 가진 노신사가 단정하게 차려입은 노부인과 함께 길을 걷는 모습이 우연히 돌린 눈길에 사진처럼 박혔다. 노신사의 온화하고 은은하게 밝은 표정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내가 늙으면 저 노신사 같은 표정을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곧 직장을 떠나게 되면 불가능하다며 포기했던 그 어려운 '사랑'의 불씨를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 생존과 번영을 위해 몸부림치던 삶의 정글에서 벗어나 조금 자유로워지면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나의 이상형이었던 은은하게 밝고 온화한 표정을 가진 노신사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삶의 모토였던 '사랑'의 불씨를 되살려내 인생 2막을 달려 나가야 할 때가 바야흐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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