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날씨 요정

by oj


여행이 다가오면 항상 날씨 걱정부터 앞선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안 좋으면 여행을 망치기 쉽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나름 운치가 있어 개의치 않기도 하지만 걷기 힘들 정도로 쏟아 붓는 비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날씨를 확인하고 기온에 따라 옷을 준비하며 여행을 기다릴 때부터 여행은 이미 시작된다.


작년 가을 네 자매 부산 여행도 전 날까지 부산에는 큰 비가 내린다는 소식이 들렸다. 많은 양이 내렸다는 소식에 우리가 가는 날도 계속 되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했다. Ktx 첫차를 타고 도착하니 먹구름이 잔뜩 끼긴 했어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오륙도가 보이는 스카이워크에 도착했을 때 잠깐 약하게 흩뿌린 비를 제외하고는 오후부턴 날이 개이기 시작하면서 여행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전 날 여행 온 사람들은 비 때문에 카페에서 있거나 쇼핑 하고 심지어 요트도 비 맞고 타면서 실망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누구를 탓하겠냐며 아쉽게 여행을 마쳤다고 했다. 하루 사이로 날씨가 좋아지고 언제 흐렸냐는 듯이 햇빛까지 뜨겁게 내리쬐자

"누가 날씨 요정인 거야?"

작은 언니가 물었다. 내가 "언니잖어" 라고 하자 바로 얼굴을 찌푸리더니 "죽을래?" 했다.


우리 자매들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작은 언니는 유난히 날씨 운이 없어 여행 갈 때마다 비를 몰고 다녔다. 제주에 가도 강원도를 가도 우비나 우산을 쓰고 다니면서 고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여서 내가 역설적 표현으로 놀렸다는 걸 안 거다.


예전에 남편이 명퇴하고 제주에서 4월 두 주 살 때는 비 덕을 본 적이 있었다. 제주는 비가 자주 오는 편인데도 우리 여행 기간 동안 날씨가 계속 화창했다. 두 주를 있다보니 큰 비가 내린 날 오후에 많은 양의 비가 내려야만 볼 수 있다는 엉또 폭포에 갔다. 서귀포시 강정동에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폭포지만 우린 그 전부터 알고 있어 비가 꽤 많이 온 날 기대하며 보러 갔지만 허탕쳤다. 그만큼 많은 양의 비나 장마철 정도는 돼야지 웬만해선 볼 수 없는 폭포였다.


그 날 비는 거의 퍼붓다시피 해서 볼 수 있겠다 싶었는데 쏟아진 비에 계곡물이 빠르게 불어나면서 큰 소리를 내며 무섭게 흐르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우비도 입고 데크와 계단으로 이어진 길을 한참 오르니 그야말로 거침없이 쏟아지는 물줄기와 웅장한 물소리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폭포의 경관에 탄성을 질렀다. 옆에 있는 남편 목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폭포수의 거센 물소리가 굉장했다. 괜히 엉또 폭포가 유명한 게 아니었다. '엉'은 제주 방언으로 작은 바위나 동굴. '또'는 입구란 말로 엉또 폭포는 작은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폭포란 뜻이다. 그 날 내린 비는 여행을 망친 여느 때의 비와는 다르게 멋진 자연 경관을 선물해준 완벽한 비였다.


다음 날 비가 그치자 정말 비가 올 때만 볼 수 있는 폭포인지 궁금해서 확인하러 다시 가보았다. 전 날 그렇게 퍼부었던 비에도 물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그냥 기암 절벽 뿐이었다. 비가 올 때만 내리는 폭포라니 정말 기이했다.

국내. 국외로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도 날씨 때문에 고생한 일이 거의 없었다. 비 소식이 있을 때도 날이 개이고 차를 타면 비가 내리고 여행할 때면 맑아지고 신기할 정도였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난 날씨 요정으로 통했다.


지난 번 친구들과 평창 여행 때였다. 출발할 때는 비가 오지 않았다. 비 소식이 있어 걱정한 터라 다행이지 싶었다. 점심을 먹고 핫하다는 육백마지기로 갈 때까지도 잔뜩 흐리기만 했지 비가 오진 않았다. 엄청 좁고 가파른 길을 따라 한참 올라와 주차를 하는데 약하게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숲으로 둘러쌓인 곳이라 비가 쏟아지면 어떤 상황이 될지 몰라 서둘러 둘러봐야지 하며 급히 둘러봤다.

산책을 끝낼 때쯤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해 차로 뛰어갔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친구가 운전해 거의 내려왔을 때쯤부터 거센 빗줄기로 변하더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졌다. 간발의 차였다. 저녁 장소로 이동해서 식사를 끝내고 나왔을 때는 또 빗줄기가 그쳐있었다. 친구들은

"누가 날씨 요정인 거야?"

하며 나를 쳐다봤다. 웃음이 나왔다. 다음 날은 맑은 날씨가 이어져 1박2일 평창 여행을 잘 마칠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지인들은 날씨 요정이라고 하고 난 운이 좋다고 여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버지 만나러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