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없이 어디까지

by 법칙전달자

사랑 없이 어디까지


그 무엇이 인간에게 제한이나 불편 혹은 감춤이 된다는 거짓말은 지금은 인간의 무의식에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창조주에 대한 숭배 혹은 그 통치에 대한 순종입니다. 창조의 법 혹은 진리에 대한 순종이죠. 지금은 대다수가 아예 그러한 것이 없다는 식으로까지 생각합니다. 그것은 필요 없고 부당하고 행복을 제한한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깔려 있는 것이죠. 인간의식에 대한 지식이 누구보다 많은 악한 근원에 의해 그렇게 세뇌된 것이죠.


대부분의 종교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은 무신적인 삶을 삽니다. 과학적 지식 즉 계몽적인 지식으로 말미암아 고대의 부당한 속박에서 벗어났다고도 생각하는 것이죠. 오늘날 종교는 창조주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다른 활용가치가 있다고 여겨 상당수의 사람들은 문화화된 제도권 종교에 속해있긴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창조의 법을 알고 순응하는 것은 절대 아닌 것이죠.


한편 신접 무당들은 창조주의 법에 순응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점은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유신적 생활을 한다는데 있어서는 일반인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전 세계 수십만 정도가 그러하지만 소위 양성적인 세계의 무신적인 사람들과 잘 공존하고 있죠.


오늘날 약 천만 정도의 사람들이 창조의 법에 순응하고 창조주의 통치권에 적극 순종하여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우주조직의 지상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죠.


인간이 창조의 법을 무시하고 어떻게까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지금 세상과 개인들의 삶의 모습과 현상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글의 주제는 아니므로 그것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이 사랑 없이 어떻게까지 할 수 있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이글의 취지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1절에는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꾕가리 소리와 같다는 말이 있죠. 부수적이긴 하지만 천사의 언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것은 지금 인간이 사용하는 어떤 언어도 아닙니다. 그런데 언어란 사상을 내포하죠. 그래서 그 사상이 아무리 고매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사랑의 개념이 결여되어 있거나 사랑과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그것은 소음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사실 수천년간의 모든 인간의 말언어, 글언어에는 사랑의 개념이 결여된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머리에서 짜내어 나온 것이기 때문이죠. 정치 경제 분야 등등의 모든 인문학 분야에 대해 쏟아져 나온 천문학적 수의 논문, 저서, 강의 등등 사실상 다 쓰레기죠. 그 극히 일부가 정책에 적용되는데 그 실상이 지금 세상의 상태이죠.


2절에 예언의 능력과 모든 신성한 비밀과 모든 지식을 이해하여 산을 옮길 믿음을 가졌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데 여기서 부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지식은 이해가 되어야 믿음이 생기고 그대로 행할 수 있다는 점이죠. 사도 바울은 그렇게 되었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쓸모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3절에는 타인을 위해 모든 재산과 심지어 생명을 내준다 해도 그것이 순수한 사랑의 동기에서가 아니면 무가치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도 가끔 자신의 집단이익을 위해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 고통스러운 죽음을 치르는 경우가 있죠. 만약에 그것이 "봐 조금이라도 동료를 위한다고 하면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희생하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야?" 하는 자랑의 의도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무가지하다고 한 것이죠. 오늘날 한 목숨 바치는 것이 애국 즉 나라나 민족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면서 죽음을 요구하기도 하도 더러 그 뜻을 알리기 위해 분신이나 할복 자살하는 경우도 있죠. 물론 이 경우에 성서에서 말하는 그러한 사랑은 아닌 것이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이 없어도 어떤 희생적인 행위도 인간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세상을 어떻게든 지금 상태로 유지하는 하나의 요소로 활용되는 것이죠. 그러한 희생이 사랑에 의해서가 아닌 것은 4절 이하에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기술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죠.


참 사랑만이 모든 참 성공과 진정한 행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그 사랑은 사랑의 하느님의 저서인 성서에서만 배울 수 있는 그런 지식입니다. 그렇게 해서 점진적으로 배양될 수 있는 것이죠. 그것을 기술이라고 한 것은 지식만 있다고 자동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연습이나 훈련이 필요한 것이죠.


반드시 그렇게 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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