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열매 말고도
영적인 것의 규정은 창조주가 하는 것이고 인간이 그것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주의 규정은 성서에 들어 있죠.
그중에 '영의 열매'라고 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이 산출하는 특성들이죠. 맨 처음에 사랑이 언급되죠. 영의 열매에는 아홉 가지 측면이 있는데 그중에는 오래 참음(patience)과 자제(self-control)가 있습니다. (갈 5:22)
또한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규정에는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인내하는 것이 포함되죠. (patient, bears all things, endures all things고전 13:4,7) 또 소위 신의 성품에 이르는 단계라는 것에도 자제와 인내(self-control, endurance)가 있습니다.(베후1:6)
인간의 성향 혹은 특성, 인성,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에 본래 참을성이라는 이라는 것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죠.
인간이 죄를 지어 불완전해졌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지녀야 할 일시적인 특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은 창조주가 프로그램한 대로 기계적으로 혹은 로버트처럼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정성에 지배받는 것이죠. 양자요동과도 관련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머리카락을 구성하고 있는 전자가 터무니없이 혹은 비이치적이게도 목성의 주변공간에 있을 수학적 확률도 0은 아니라는 것이죠. 어떤 터무니없어 보이는 생각이나 감정 즉 충동도 떠오를 수 있죠. 원인이야 어떠하든 죄짓기 전의 완전했던 하와도 금지된 선악과를 먹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 것이죠. 그걸 규제, 억제 즉 자제했어야 했죠. 완전했던 일부 천사들도 더구나 인간들에게 동성애나 수간과 같은 본능이 없는 것처럼 성적인 본능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 여자들과 성관계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 것입니다. 인간 중에도 동물과 성적 접촉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인간에게 동성애 유전자가 없는 것처럼 수간 유전자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떠오를 수 있는데 생각을 중단시키지 않고 발전적이고 구체적으로 상상을 하다 보면 그런 욕망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것이죠. 욕심이 발전하면 행동으로 옮겨지고 바로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죠. 결과는 죽음입니다.(야고보 1:15)
충동이라는 것은 신체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이 있죠. 술에 취하고 싶다든지 성행위를 하고 싶다든지 욕을 하고 싶다든지 하는 등이죠. 충동이란 그 자체에 나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작위적으로 혹은 우발적으로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 때 그걸 발전시켜 충동이나 욕망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본래적으로 자제라는 특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 규제 혹은 억제인 것이죠. 인간의 자유 혹은 자유의지란 스스로에 대한 통제권 혹은 통치권이라고 할 때 그것을 사용하고 발휘해야 할 중요한 한 면인 것이죠. 자제력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권력을 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이나 천사도 그러해야 했다면 불완전해진 인간들은 더욱더 그러해야죠.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 인간은 너무 취약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고 안정되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자녀나 피교육자가 그렇게 교육을 시키고 훈련을 시키고 징계를 하기도 했는데 어떤 면에서 변화나 발전이 더디면 속상함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생길 수 있죠. 그것 때문에 실망을 표현하거나 화를 낸다면 자제에 실패하는 것이죠. 참아야 하고 인내해야 하죠.
아무리 말해줘도 이해를 못 하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든 말을 듣자마자 모든 글을 보자마자 즉각적으로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게 됩니까? 그렇지 않죠. 실제로 깨닫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알 수 없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아 그게 그 말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될 때가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 경우가 있는 것이죠.
이런 현상은 불완전성 때문이 아니라 속성이기도 한 것입니다. 어떤 수학문제를 보았을 때 문제의 뜻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온전히 이해됐다 해도 그 문제에 대한 답이 언제 머릿속에 떠오르냐 하는 것은 의지에 달린 것은 아니지요. 원하는 바는 바로 떠오르는 것이겠지만 실제는 1분 후일지 5분 후일지 떠오르지 않을지 알 수 없는 것이죠. 그가 완전한 인간이냐 하는 것과는 상관없죠. 인간은 누구나 전지전능을 향한 과도기에 있으며 수억 년을 살아도 그렇게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지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 결코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속성입니다. 지식이나 기술의 습득뿐 아니라 습관이나 태도, 지혜나 능력의 발전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이죠.
인간은 불완전하게 되어 너 나 할 것 없이 수준 미달인 면, 한심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면들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이나 남의 그러한 면을 못 견뎌해서 일탈행위를 한다면 자제도 인내도 하지 못하는 것이죠.
자제나 인내, 오래 참으라고 한 창조주는 당연히 그 점에 있어서 본이 될 것이고 그분을 본받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그럴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도 바로 멸망사키지 않고 120년의 텀을 두었고 노아는 60년 정도는 사람들에 알렸습니다. 충분히 기회를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켜야겠다는 충동을 모세에게 피력하였으나 오히려 모세가 만류했다는 기록도 있죠. (출 32:9~12)
창조주는 이 악한 인류에 대해 6,000년 이상 참아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유익한 목적을 달성한 것이죠. 여호와께서는 대단히 큰 자제력을 나타내셔서, 하느님에 대한 반역과 그분으로부터 독립한 인간 통치의 파멸적인 결과를 모든 창조물들이 온전히 볼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허락해 오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의 죽음은 순종하는 인류를 구출하고 “마귀의 일을 분쇄”할 수단을 마련해 주었습니다.—요한 첫째 3:8; 히브리 2:14, 15. 참는 것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만이죠.
그러므로 인간도 성급하게 판단하거나 충동대로 감정표현을 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오래 참거나 인내하는 것이 인격화, 일상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거나 죄절감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도달 가능한 유익한 목표라면 오래 인내할 필요가 있죠. 범죄행위나 반역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사랑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영의 열매 아홉 가지는 인간의 본래적 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홉 가지 영의 열매를 언급한 후에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영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선함, 믿음, 온화, 자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을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기둥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가 영을 따라 살고 있다면, 계속해서 영을 따라 걸어갑시다. 자기중심적이 되어 서로 경쟁하지 말고 서로 시기하지 맙시다.(갈 5:22~26)
자제와 오래 참음은 사랑처럼 인간이 열매처럼 맺어 있어야 합니다. 과목이 열매들을 맺지 못하면 잘려 불에 태워지는 것입니다.(요한 15:2,8 마가 11:1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