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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우 May 21. 2018

3_분만실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릅니다

최초의 밤



23.

소리는 간헐적으로 들려옵니다.

끊어지는가 싶으면 이어지고,

이어지는가 싶으면 끊어집니다.


자정을 넘긴 병원의 복도는 어딘지 모르게 으스스합니다.

문 쪽에 달린 형광등 몇 개에만 흐릿하게 불이 들어와 있습니다.

복도는 끄트머리로 갈수록 컴컴해집니다.


몇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거렸지만 자꾸 오줌이 마렵습니다.

나는 닫힌 문을 보며 연신 마른침을 삼킵니다.






24.

가만히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소리는 깊은 곳에서 끓어오릅니다.

인간의 소리라기보다는 짐승의 소리에 가깝습니다.

소리는 서서히 고조되다가 차츰 격렬해지더니,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지점까지 가파르게 치솟다가,

정점에서 잘려나가 일순 종적을 감춥니다.

나는 문 밖의 복도 대기의자에 홀로 앉아 그 소리를 듣습니다.      


저 안에서는 대관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소리의 잔향殘響이 꼬리를 흔들며 어두운 복도 끝으로 빠르게 빠져나갑니다.

나는 소리가 사라진 복도 저편의 어둠을 바라봅니다.

이제 곧 내 인생을 완전히 뒤바꿀만한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는 걸 직감적으로 예감합니다.






25.

김이을 씨.

대기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는데도, 간호사는 내 이름을 부릅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섭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간호사가 연초록색 수술복을 건넵니다.

나는 입고 있던 옷 위에 그걸 덧입고 그녀를 따라갑니다.

간호사는 분만대기실 안으로 들어섭니다.

대기실을 가로지르자 분만실이 나옵니다.


침대는 어둑한 분만실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아내의 두 다리는 각각 거치대에 묶여 벌려져 있습니다.

그 거치대는 프랑스의 어느 고성古城을 홍보하는 팸플릿에서 보았던

중세시대의 고문도구 같아 보입니다.

아내는 무고한 희생자입니다.

아내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어쩐지 아내가 나를 대신해 이곳에 붙잡혀온 것만 같습니다.


나는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가 아내를 내려다봅니다.

아내의 몸은 익사 직전에 구조된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습니다.

내가 들어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병원의 로고가 프린트된 초록색 천이 가랑이 사이를 가리고 있습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는 그 아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26.

분만실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릅니다. 


아내의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옵니다.

거치대에 묶인 아내가 몸을 뒤채기 시작합니다.

산통이 나쿠르 호수의 홍학 떼처럼 하늘을 연한 분홍색으로 빽빽이 물들이며 몰려오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고통은 아내의 뼈마디를 들쑤시며 모세혈관을 따라 온몸으로 퍼져나갑니다.


신음은 점점 비명이 되어갑니다.

나도 모르게 아내의 호흡에 맞춰 내 호흡을 조절합니다.

콧구멍이 커지고 숨이 거칠어집니다.

내가 묶여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소리가 다시 치솟기 시작합니다.

의사가 낮은 음성으로 힘을 주라고 아내를 채근합니다.

두 명의 간호사가 화음을 넣는 코러스처럼 그 말을 따라 합니다.


다행히, 산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소리는 돌연히 곤두박질치다가 별안간 뚝, 끊어집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적어도 한 차례의 산통이 아내를 막 빠져나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아내의 입술이 벌어져 있습니다.

입술 사이의 어둠이 유난히 검습니다.

아내는 여전히 소리를 내지르고 있습니다. 

기도氣道로 숨이 거칠게 유입되는 소리가 메마르게 들려옵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맞닥뜨리면 비명도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27.

의사가 허리를 숙이고 가랑이 사이를 가린 초록색 천 아래로 상반신을 쑥 집어넣습니다.

내내 낮은 음성으로 차분히 말하던 의사의 음성이 한 옥타브쯤 올라갑니다.


더, 더, 더.


의사가 음주측정기를 들이민 경찰관처럼 아내를 채근합니다.

간호사들이 무심하게 그 말을 더 높은 음정으로 따라 합니다.

아내의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간호사들은 그때를 놓치지 않습니다.

매몰차게 아내를 몰아붙입니다.

그들로부터 아내를 지켜주고 싶지만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내를 고문하는 작자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의사가 마지막으로 아내를 다그칩니다.

아내는 행주처럼 몸을 쥐어짜며 육신의 한 곳에 온 힘을 모읍니다.

아내의 일그러진 표정이 한순간 스륵 풀어집니다.


공기의 밀도가 갑자기 높아집니다.

짧은 정적이 흐릅니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언이 이루어질 순간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습니다.


의사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뜹니다.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이상한 기분에 빠져듭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보는 건 난생처음입니다.

나는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습니다.

얼어붙습니다.


왜 갓난아기를 ‘핏덩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만 같습니다.






28.

간호사가 아기를 건네받습니다.

그녀가 고무 흡입기를 아기의 입안에 밀어 넣습니다.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딸 때처럼 그녀의 손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습니다.

고무 흡입기의 불룩한 부분을 누르자 대기가 아기의 호흡기로 밀려듭니다.

아기가 식도를 막고 있던 양수를 뱉어냅니다.      


아기가 작은 새처럼 웁니다.     


“새벽 3시 6분. 왕자님입니다.”

간호사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합니다.


나는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아기의 몸은 점액질로 뒤덮여 있습니다.

점액질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납니다.

간호사는 아내의 가슴에 아기를 내려놓습니다.

아내는 마지막 한 움큼의 힘마저 죄다 쏟아낸 터라 아기와 눈을 맞출 기력도 없습니다.


나는 아기를 훔쳐봅니다.

이상한 말이지만, 어쩐지 훔쳐보는 기분이 듭니다.






29.

그때 무언가가 내 눈에 들어옵니다.      

탯줄입니다.      


간호사가 내게 가위를 건넵니다.

나는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가위를 들고 손가락을 오므립니다.


"앞으로 밀면서 자르세요."

간호사가 내게 말합니다.


탯줄이 가윗날에 서걱거리며 잘려나갑니다.

아기의 배꼽 앞, 반 뼘쯤 되는 지점입니다.

간호사는 미리 대야에 담아둔 따뜻한 물로 아기를 씻깁니다.


나는 간호사가 아기를 씻기는 내내

기요틴의 칼날 위에 남은 몸통처럼 대롱거리며 흔들리는 탯줄을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남몰래 훔쳐봅니다.

누구나 한 번은 달고 태어났을 그 생명선生命線을.







30.

내가 어디에서 기원起源했는지, 태어난 지 서른 해를 훌쩍 넘겨서야 비로소 목격합니다.

아내와 아기가 나의 기원을 알려줍니다.


신은 실수를 한 게 틀림없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탄생의 순간만은 기억하게끔 했어야 합니다.

인간이 이 순간을 기억한다면 적잖은 것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내 기억은 깡그리 지워졌지만, 아기의 탄생으로 희미하게나마 복원됩니다.

나는 내 아기의 탄생에서 나의 탄생을 봅니다.  






31.

출산을 끝낸 아내는 하늘색 겨울 담요를 온몸에 휘감고도 오한에 몸을 벌벌 떱니다.

살집이 포동포동한 간호사가 미는 휠체어에 태워져 아내는 회복실로 올라갑니다.

아기는 하얀 면포대기에 싸여 신생아실로 옮겨집니다.

그제야 출산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는 안도감이 밀려옵니다.


나는 오디션에 떨어진 배우처럼 홀로 덩그러니 남겨집니다.

아비의 역할은 애당초 이런 것입니다.


불 꺼진 복도를 따라 걷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밖으로 빠져나옵니다.

5월이라고는 하지만 새벽의 밤공기는 제법 쌀쌀합니다.

나는 어머니와 장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아내와 아기가 모두 무사하다고 알립니다.







32.

시간이 시간인지라 산부인과 앞 도로는 한산합니다.

사람은 없고, 오가는 차량만이 드문드문 눈에 띕니다.

새벽의 거리는 여느 밤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내 눈엔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습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습니다.

연거푸 심호흡을 합니다.

그래도 심장이 빠르게 뜁니다.


빌딩들 위에 떠 있는 새벽별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새벽별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별들 사이를 불어온 바람이 내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지나갑니다.


이 밤은 무한한 비밀을 숨기고 있습니다.

이 밤은 최초의 밤입니다.

새 생명이 태어난 밤이고,

내가 우주의 섭리 한가운데에 서 있는 밤입니다.      







33.

세상에 많고 많은 여자들 중에 한 여자를 만나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미래를 함께 하자 약속하고,

그 약속이 무르익어 한 생명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 한 올의 머리칼을 떨어뜨리면

그 머리칼이 바람에 실려 대양을 건너고 산맥을 넘어 천천히 낙하하다가,

지상의 무수한 사람들 중,

마침 그때에,

하필 그곳을 지나는 한 사람의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을 확률.


불가佛家에서는 인연因緣을 이렇게 설파합니다.      

우리 사이에 바로 그 인연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단 한 사람이 되는 인연.      







34.

나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아기와 나를 잇는 선분線分이 별과 별을 이어 별자리를 만들 때처럼 조용히 그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가 되다니.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대관절 어쩌자고 이 모진 세상에 겁도 없이 생명을 덜컥 내놓은 걸까요.

우리는 무슨 까닭으로 이 넓은 세상에,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아비와 자식이 되어 만난 걸까요.


이 인연 앞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더할 나위 없이 기쁜 날인데,

왜 하필 두려움이 제일 먼저 나를 사로잡는지 알 수 없습니다.







35. 나는 내 감정의 기원을 추적합니다.


사랑은 집착이 되기도 하고,

구속이 되기도 하고,

눈물이 되기도 합니다.


서른을 넘긴 나는

사랑이 언제나 사랑으로

우리 곁에 머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고보면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랍니다.

사랑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우리 사이에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난생처음 겪는 이 인연의 탄생 앞에서 나는 한없이 나약해집니다.


아버지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하나도 알지 못한 채, 아버지가 되어버린 겁니다.


나는 느낍니다.

아버지라고 해서 모두 아버지인 것은 아닙니다.

나는 끝끝내 아버지가 되지 못한, 불행한 남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거기엔 마땅히 어떤 자격이 필요합니다.


나는 나조차 감당하기 어려워 헤매는 인간인데,

그래서 아내를 자꾸만 힘들게 하는데,

어쩌자고 이런 일을 저지른 건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나의 아기를 잘 보살필 수 있을지 심히 두렵습니다.


나는 아내와 아기를 향해 나부낍니다.





36.

나는 밤하늘 어딘가를 황급히 더듬습니다.

어떤 시선이 느껴집니다.

어떤 눈동자가 아주 높은 곳에서 나를 은밀하게 훔쳐보고 있습니다.

멀리, 저 새벽별 사이 어딘가에서.


분명,

그런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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