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

사랑을 아는 존재는 슬픔도 안다.

by 고생끝에골병난다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인문 지리학자 이푸 투안이 즐겨 쓰는 개념 중에는 '토포필리아'라는 단어가 있다. ‘topos(장소)’와 ‘philia(사랑)’의 합성어로, ‘장소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공간(space)은 선택 가능한 추상적 개념이고, 장소(place)는 기억·시간과 결부된 고유한 의미의 영역이다. 어린 시절 경험한 아름답고 행복한 낙원으로서의 고향에 대한 애착과 깊은 정서적 유대감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마을을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을 아는 존재는 슬픔도 안다.


사라지는 마을들을 생각하며 이 연재를 마치고 싶다. 경제 논리 때문에, 연식이 오래되어서, 부서지는 건물을 보며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시대에 글은 힘이 없고, 개발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을에 대한 관념을 한 번 쯤은 다르게 생각해보자는 주장 정도는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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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잡아보는 것들의 의회


서양의 지성 전통은 '역사가 발전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념은 하나의 이상 상태를 위해 무언가를 개발하거나,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서양의 지성사는 폭력이다.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자본주의적 인간은 세계를 경제성의 논리로 바라보게 되었다. 자연도, 마을도 도구가 되었다. 심지어는 인간도 기계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사람이 살기 위해 화폐가 필요했지만, 화폐를 위해 인간이 도구가 되었다. 이런 전복의 철학적 개념이 '소외'이다. 도시 공간에도 소외가 반복된다. 사람이 살아가고, 기억을 쌓고, 가족을 돌보기 위해 마을이 필요했지만, 마을의 개발을 위해 인간의 몸과 마음이 쫒겨나는 전복이다.


자본주의가 얕잡아 보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동물, 오래된 마을, 아픈 몸, 가난, 늙은 사람들. 어쩌면 '1호선 광인' 담론은, 그런 시대의 폭력을 드러내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끝없이 그 기분 나쁜 것들을 내쫒고 싶어한다. 지하철에서 노인과 장애인을 치우고 싶어하고, 동성애자의 게토를 도시 구석에 박아놓고 싶어한다. 인스타그램을 켜면 아이돌의 화려한 외모가 영원히 아름다울 것처럼 빛난다. 늙고 추한 것을 내쫒으려 저속노화 식단을 소비하고 피부과에 간다. 새 건물로 도시를 채우고, 공원에는 벌레를 태워죽이는 기계를 설치한다.


그렇게 오래된 골목을 부수면서, 우리의 몸이라는 자연은,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곳에서의 삶은, 다시 한번 상품이 되고 기계가 된다.


담장의 사회학


사회학자 브뤼노 라투르가 제안한 ‘사물의 의회’는, 더 이상 ‘인간만이 정치의 주체’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기후, 동물, 기술, 토양, 미생물, 건축물 등 비인간(nonhuman) 존재들도 정치적으로 대표되어야 한다는 아이디어다. 도시 골목을 재개발할 때, 사라지거나 침묵당하는 사물들(벽돌, 담벼락, 가로수, 고양이, 빛, 냄새, 물의 흐름 등)을 ‘발언 주체’로 세우는 것, 그것이 사물의 의회이다.


우리에게도 도시 공간을 기술·자본의 도구가 아니라, 삶과 생명의 정치 공간으로 되돌리는 구상이 필요하다. 청량리의, 구로동의, 용산의 골목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 비인간 행위자도 발언할 자격이 있다. 오래된 담장과 벽돌 또한 그 골목의 역사와 기억을 담고 있다. 자본의 논리로 그 담장을 무너트릴 때, 우리가 부순 것이 과연 담장 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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