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부천과 노원구 / 도시의 본질과 이재명

by 고생끝에골병난다


이삿짐으로 시야가 가려진 탓에 그는 간판에 새겨놓은 글씨를 다 볼수가 없었다. '어서 오십시'. 그가 본 것은 그게 다였다. 안녕히 가십시오와 어서 오십시오. 거푸 받은 두 번의 인사가 그를 쓸쓸하게 하였다.

서울은 막무가내로 그들을 밀어내었다. 온갖 책략을 동원해서 그들을 쫓아낸 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음흉한 작별을 고했다. 달리는 트럭의 짐칸에 실려서 그는 부천시의 인사를 받았다. 어서 오십시오. 저 반지르르한 인삿말 속에는 또 어떤 속임수가 담겨 있는 것인지.

(중략) 마침내 트럭은 멈추었다. 노모와 어린 딸과, 만삭의 아내를 이끌고 그는 이렇게 하여 멀고 아름다운 동네, 원미동(遠美洞)의 한 주민이 되었다.

<원미동 사람들. 양귀자>


나의 고향은 부천시 원미구이다. 깔끔하게 정비된 1기 신도시의 격자형 도로가 부천의 모습이라고 오래 믿고 자랐다.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이 묘사하는 가난한 마을의 이미지는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씩 어른이 되면서 알게 되었다. 아파트 단지와 빌라촌이 섞이는 학교에서는, 높은 성적대의 아파트 아이들이 자치 기구를 관습처럼 차지하고 빌라 아이들이 섞이지 못하게 했다. 조금 더 멀리 걷다보면, 산자락에 늘어선 후락한 공장 건물 사이로도 초등학생들이 뛰어논다.


상계에서 땅굴로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에는 함임선 할머니의 이야기가 나온다. 재개발 때문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할머니와 상계동 철거민들은 오랜 투쟁 끝에 경기도 부천의 땅을 얻어 그곳에 정착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이 집을 지으려는 장소 옆 도로에서는 성화 봉송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주를 약속했던 시청은 용역을 동원해 아직 다 지어지지 않은 집들을 부순다. 아무것도 세울 수 없는 그곳에서 상계동 철거민들은 땅을 파고, 땅굴 속에서 산다. 화려한 올림픽과 아파트 단지 뒤에는 동굴 속에서 이불과 담요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겨레신문>에 따르면, 신상철 할아버지도 이 무렵 퇴거당한 뒤 철거민들이 모여 만든 산자락 마을에 정착했다. 야산을 일구고 집터를 마련했다. 그러나 반복되는 재개발로 마을 사람들은 다시 내몰릴 처지에 놓였다. 할아버지도 비싼 돈을 줘가며 새집에 입주할 수 없었다. 도시 개발에는 추방의 성격이 있다. 국가권력이 올림픽이라는 ‘자본과 내셔널리즘의 축제’를 열 때, 누군가는 생활 터전을 박탈당하고 외곽 지역으로 밀려났다. 이렇게 밀려난 사람들의 도시가 광주대단지, 부천, 상계동, 가리봉동 일대에 있었고, 시간이 흘러 그들의 새로운 터전은 또다시 '슬럼' 취급을 받으며 재개발의 표적이 되었다.


원미구와 상계동


군복무 시기에는 상계동에 갈 일이 많았다. 경기도 북쪽에 부대가 있었기 때문에, 집에 가려면 노원역에서 부천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을 거쳐야 했다. 처음 노원역 근처를 둘러봤을 때는 깜짝 놀랐다. 울창한 가로수들이 보기 좋게 자라있었고, 성냥갑 아파트들이 격자형으로 늘어서 있었다. 부천 중동의 모습과 거의 똑같아 보였다. 노원과 부천 중동이 비슷한 이야기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80년대 후반 정부는 급증하는 도시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서울 목동·상계동 등지의 택지 개발을 추진하고, 1988년 ‘주택 200만 호 건설계획’을 발표하여 부천 중동 등 수도권 외곽에 대규모 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개발 과정에서는 비공식 정착촌이나 무허가 주거지에 살던 원주민들이 강제 퇴거당했다. 경찰과 용역 깡패가 사실상의 공조 작전을 펼쳤다. 포클레인과 수백 명의 경찰, 묵인된 사설 폭력배까지 동원된 강제 철거 과정에서 주민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서울 상계동 판자촌에서는 1986년부터 올림픽을 앞둔 1987년까지 대대적인 철거 작전이 전개되었다. 철거민 약 120세대 400여 명은 명동성당 천막촌에서 농성을 이어가다 일부가 부천으로 집단 이주하여 저항을 지속했으며, 부천에 정착하려는 이들과 부천시 당국 간에도 충돌이 빚어졌다. 불암산역 일대의 당현천마을, 양지마을, 희망촌은 1960년대 말에 정부에서 서울 시내 판자촌을 철거하며 판자촌 거주민들에게 토지를 불하해주겠다는 조건으로 이주해 형성된 마을이다. 광주대단지와 유사한 철거와 추방, 수용의 역사이다. 인위적으로 형성된 이 달동네 또한 뉴타운 사업지로 지정되어 철거가 진행 중이다.



부천 중동신도시 개발 역시 기존 농경지와 주택이 수용되어 신도시로 탈바꿈한 사업으로, 원주민들의 생활 터전 상실과 함께 개발 이익을 둘러싼 갈등이 수반되었다. 현재 이들 지역은 중산층 주거지로 완전히 탈바꿈하여 빈민촌의 흔적이 사라졌다. 상계동과 함께 개발된 중계동 일대는 '강북의 대치동'으로 불리는 학군지가 되었다. 그러니까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엘리트 정치인이 상계 출신임을 내세우며 '나는 서민이요' 행세하는 것은, 가장 낮은 사람들을 처음부터 외면하는 시선이다.


도시의 본질과 이재명


도시화의 본질이 추방과 분리의 과정이라면, 이재명 대통령의 인생사도 모두 이 과정으로 설명된다. 광주대단지에서의 도시 빈민 생활. 사회운동가 시절 분당 파크뷰 특혜 분양과의 싸움. 대장동 불로소득과의 갈등까지. 그의 인생은 도시화의 어두운 면을 오롯이 통과한 셈이다. 그토록 오랜 송사와 정치적 시비에 휘말린 것은 그가 현대 도시 구조의 기득권에 도전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도시화의 이면에는 ‘있었다’로 끝나는 문장들이 많다. 올림픽으로 상징되는 도시 개발 과정에는 언제나 쫓겨난 사람들이 있었다. 상계동 성화 봉송 자리에는 함인선 할머니의 터전이 있었고, 아파트 부지에는 신상철 할아버지의 마을이 있었다.


쫓겨난 도시 하층민들은 끝없이 교외로 밀려나 땅굴과 판자촌을 보금자리로 삼았다. 그들이 뿌리내리는 곳을 쫒아다니기라도 하듯 도시 구석구석 부동산 개발 열풍이 불었다. 판자촌을 치워버리고 싶은 정치적 욕망, 브랜드 아파트를 선망하게 만드는 광고술, 땅으로 돈을 벌고 싶은 건설사와 투기 자본의 욕망이 교차한다. 가족을 꾸리고, 밭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내쫒기고 투기와 개발의 산식이 작동한다.


이렇게 존재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폭력으로 내모는 것이 도시 개발의 역사였다. 도시가 고도화되는 과정에서 공권력과 자본은 힘을 합친다. 폭력으로 기존의 마을을 파괴하고 거주민을 내쫒는다. 건설사의 특혜를 보장해주는 대신 공직자가 정치 자금을 제공받았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 고위층의 특혜 분양 의혹도 반복되었다. 아파트를 분양 받은 사람들은 마치 이곳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도시에서 살아가고, 그들의 생활 환경은 철거민들이 모인 달동네와 깔끔하게 분리된다.



우리는 무엇을 원했는가



유발 하라리는《사피엔스》에서 인류의 발전—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이 과연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묻는다. 그는 행복이 부의 총량에 달린 것이 아니라, 생화학적 요소, 특히 신경전달물질 세로토닌 수치에 좌우된다고 본다. 사람은 목표를 달성할 때마다 세로토닌이 분비되지만, 그 양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행복 수준은 기대치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단칸방을 얻은 노숙자나 아파트를 구매한 중산층이나 동일한 세로토닌 상승을 경험하지만, 기대치가 높으면 상대적인 만족은 떨어질 수 있다. 현대인은 기대치가 높아져 고대인보다 더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믿음에 불과하다. 종교와 화폐. 더 비싼 아파트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을 만든 사회 구조는 모두 인공품이다. 인생이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믿음에 불과하다. 행복감은 장시간 유지될 수 없는 세르토닌 수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성공해서 짧은 행복을 쟁취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관계 맺고 세상을 느끼기 위함이다.


좋은 아파트, 고층의 도시. 이런 것들을 원하는 이유는 무엇이였는가. 확실하지 않다. 왜 이런 것을 만들어야 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터전을 부수고 내몰았다. 인생의 본질은 일상을 가꾸고, 사색하고, 주변 사람을 사랑하는 순간들에 있다. 마을의 본질도 다르지 않다. 도시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갈 곳이 필요하다. 우리의 불도저 같은 도시 개발과 추방의 과정은 세상에 불필요한 고통만을 늘렸다. 도시화 과정을 막는 것은 비현실적일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동원되는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 개발은 세상에 행복의 총량을 늘리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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