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꿀 것은
창원에서 강의하고 인천으로 올라가는 길에 막내 오빠 부부가 우리집에 들른 날이었다. 나는 신나서 올케에게 고추장아찌 담근 이야기를 비롯해서 꽃밭 돌보기며 열심히 풀 뽑은 이야기를 한 바탕 좍 쏟아 부었다. 언니, 이젠 갸름하게 꽤 잘생긴 오이가 열려요. 작년처럼 비리비리 ㄱ자로 꼬부라진 8자 오이가 아니예요. 아욱도 심었어요, 가을 아욱국은 문 닫고 먹는다잖아요, 언니... 아름답고 튼튼한 카펫 서너 장 펼치며 씩씩하고 멋지게 날아올랐다고 생각했다. 벙글벙글 미소 가운데 눈도 살살 깜빡이며 잘 듣고 난 우리 막내올케 정순언니가 거침없이 말했다. “언제 그런 걸 다 해요? 그만 책이나 읽고 글이나 써요!”
아찔, 어리둥절! 맞아, 왜 이런 걸 다 했지?
왜 그토록이나 힘들게 즐거우려 애썼지?
여러 웃음이 떼구르르 구르는 사이 내 놀란 정신이 슬금슬금 돌아온다
돌연 배신 때린 언니에게 줄 매실장아찌와 간장고추를 싼다
스윽 실실 계속 웃으며 좋아하는 언니, 흥.
뒤통수 친 언니에게 오디잼도 조금 덜어 준다
신기하대. 흥!
이렇게 여러가지를 진짜 애기씨가 다 했단 말이요?
그려~ 내가 다 했슈.
이젠 잼이나 만들고 장아찌나 담그랄라고?
하하하 하하
아욱 꺾는다는 언니 따라 밭으로 가니 들깨향이 고였다가 반겨 맞으며 까불까불 한다
흙도 바람도 따라한다
책이나 읽고 글이나 써요, 써요, 써요...
정언명령, 가슴 한복판에 쾅
힘찬 각인, 아름다운 낙인
매혹이 풀린 듯, 아니아니 어떤 미혹이었던가...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자, 내 이야기를 하자 내 말을 쓰자
내가 가꿀 것은 예쁜 꽃밭이 아니라 글밭이었다
나는 글집을 짓고 싶었던 거야
고정관념에 따라 계속 굴러가고 있는 나를 죽여야 할 때다
대타자의 명령을 촘촘히 의심하고 모든 응시를 벗어던져야 할 때다
밖으로 나간 모든 에너지를 불러모아 나에게 온전히 몰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가꾸며 홀로 충분히 사람 하나로 존재할 수 있는 날들이 길지 않다
세상의 여자들에게도 손을 내밀며 말해야 한다
각자 글밭을 일구고 글집을 지어야 해요
타자들의 언어로 자신을 해석하게 두지 말아요, 새이름을 지어요
내가 원하지 않는 이름이라면 이제 버려야 한답니다
자신의 이름을 만들고 스스로 부르며 내 목소리로 대답해요
여자를 부림이 아니라 더불어 살려는 남자들에게도 외쳐야 한다
자신의 말을 잘 들어보아요, 진짜 내 목소리를 찾아보세요
타자의 욕망으로 넘치는 모든 이름과 기표들을 내려놓아요
채울 수 없는 결핍의 구멍, 그것을 지닌 채 우리는 우리일 수 있답니다
공백의 심연으로부터 살림의 언어를 길어올리며 손잡고 춤을 추어요